2008년 6월 12일 목요일

김정배씨의 뉴욕/김형준씨의 유럽배낭여행


잠들지않는 뉴욕 맨허튼
뉴욕 벤처맨들 "일이 문화"


세계 디지털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실리콘 앨리(Silicon Alley). 문화예술의 중심지 뉴욕의 맨해튼에 둥지를 튼 수 백개의 벤처회사를 통칭하는 말이다. 서부의 ‘실리콘 밸리’가 정보통신 첨단기술의 본산이라면 이곳은 닷컴 기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디지털 문화의 산실이다.


실리콘 앨리 사람들은 주로 이메일 등 온라인으로 의사를 소통한다. 그러나 얼굴을 맞대고 몸과 몸이 부딪치는 아날로그식 만남도 중시한다. 실리콘 앨리의 중요한 문화는 다름 아닌 파티다. 다른 업체로부터 주말 저녁 파티 초대를 받으면 만사 제쳐놓고 참석하는 것이 이곳의 ‘비즈니스 상식’이다. 칵테일이나 간단한 음식을 들고 둘러서서 왁자지껄하게 수다를 떠는 것이 파티 ‘콘텐츠’의 전부다. 파티를 통해 친분을 넓힐 뿐 아니라 자신의 회사를 알리고 최신 정보를 교환한다. 그래서 앨리의 파티는 ‘노는 비즈니스’로 통한다.


새로운 세기 디지털문화 생산지의 또 다른 특징은 ‘바쁨’이다. 실리콘 앨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문화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그럴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시간도 없고 돈도 없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댄다. 맨해튼 다운타운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앨리 기업인 ‘미디어팜’(www.mediafarm.com)의 브라이언(29)처럼 대개 “다른 뉴요커와 다를 바 없이 가끔 영화나 공연을 보고, 전시회를 찾아갈 뿐”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생각하는 디지털문화란 무엇일까. 이곳에서 일하는 제레미 스탠튼(30)는 “그런 건 없다. 미디어는 새로운 문화의 성장을 돕는 역할을 할 뿐이지 미디어 자체가 문화는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브라이언은 “‘디지털 문화’란 용어도 없지만 그렇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마치 ‘언어 문화’나 ‘잡지 문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터넷은 각종 문화가 섞인 용광로이며 각각 번영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일 뿐이다”고 설명했다.


미디어팜의 공동창업자인 앨리사 화이트(31)는 ‘실리콘 앨리’ 문화의 특징을 한마디로 ‘모험심’이라고 말했다. “인터넷이 일으킨 골드러시는 모험에 대한 자신감을 자극했기 때문에 벤처기업에 몰리는 20대의 청년정신이 30대 40대에도 광범위하게 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바쁜 생활속에서도 앨리 젊은이에겐 자유스러움이 넘쳐 보였다. 직원이 100명이 넘는 큰 회사건 서너명에 불과한 신생 회사건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맡은 일이 다르고 능력에 따른 연봉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프로젝트 마감이 임박할 때를 제외하고 밤샘 근무는 거의 없다. 오전 10시에 출근해서 오후 10시까지 일하는 것도 ‘중노동’으로 여길 정도. 복장도 반바지에 샌들을 신는 것이 보통이고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출근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앨리에는 출신배경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일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컴퓨터를 전공한 사람은 오히려 소수이고 경영학이나 인문학, 예술 관련 전공자들이 많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인재로 구성된 다국적 면모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의 다양한 소양이 실리콘 앨리를 움직이는 창의력의 근간을 이룬다. 앨리가 내놓은 다양한 서비스가 국제적인 파급력을 갖는 것도 이런 점과 무관치 않다.


여기서 근무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직장에 연연하지 않는다. ‘재미 없어졌다’는 이유로 6개월마다 회사를 옮기는 경우가 흔하다. 높은 연봉 보다 새로운 일감을 찾아 나서는 경향이 강하다. “아파트 구하기보다 일자리 찾기가 훨씬 쉽다”고 말할 정도. 출신이나 학력보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처리해본 경력을 제일로 여기는 풍토가 잦은 이직을 불러온다.


외형적인 성공 이외에 앨리 종사자가 중시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앤더스 램시(33)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인터랙티브 웹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커스틴 솔버그(31)은 “젊고 전도양양한 회사에서 지적이고 활동적인 일에 기여하는 즐거움”을 꼽았다.


하지만 ‘닷컴’에 몰아친 돈벼락은 순수한 ‘꿈’을 퇴색시킨 측면도 없지 않는 것 같았다. 브라이언 누네즈(31)의 말이 이를 대변한다. “초창기에는 디지털혁명을 통해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키겠다는 이상주의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요 몇 년새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큰 돈을 버는 것이 최고가 됐다. 이제 삶의 질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브라이언은 ‘실리콘 앨리’에서의 ‘성공’에 대한 뼈 있는 정의를 내렸다. “자기 회사를 만들어서 키운 뒤 30세에 수 천만 달러의 재산가가 된다. 그 뒤에 다음과 같은 수순을 밟는다. 첫째, 회사를 팔고 새 사업을 시작한다. 둘째, 주간지인 ‘실리콘 앨리 리포터’에 표지인물로 나간다. 셋째, TV 탤런트나 영화배우와 사귄다.”

공연예술의 최고전당 '뉴욕 카네기홀'

다니엘 바렌보임, 로린 마젤, 피에르 블레주, 제임스 레바인, 볼프강 자발리쉬, 마리스 얀손스, 마이클 틸슨 토머스, 피터 제르킨, 안드라스 쉬프, 마우리치오 폴리니, 제시 노먼, 캐슬린 배틀, 체칠리아 바르톨리….


2000년 7월 뉴욕 카네기홀 안내판에 걸린 ‘2000∼2001년’ 공연 스케줄을 봤더니 현존하는 간판급 지휘자와 연주자 이름이 대부분 올라와 있었다.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입장권 가격이 250달러나 됐지만 내년 3월치까지 거의 매진이라 했다. 메인홀(2804석)을 유료관객으로 꽉채운다 해도 한 회 공연 수입 70만달러(약 8억원).입장료 수익만으로는 세계 최고수준의 개런티를 요구하는 아티스트를 끊임없이 무대에 세우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애당초 수지타산 맞추기가 불가능한 공연이 쉼없이 무대에 올려지는 비밀은 뭘까.


카네기홀의 운영을 책임진 카네기홀 코퍼레이션의 제이 골란 감독(개발기획부)은 “튼튼한 재무 구조 덕분”이라고 요약했다.


“연 200여개 공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경비 1700만달러(한화 약 190억원) 중 98%를 자체 조달합니다. 이중 티켓 판매대금은 30%에 불과합니다. 후원자들로부터 받은 기부금을 증권등에 투자해 얻는 수익 30%, 카네기홀 임대수익 30% 등이 재정독립의 기반이죠.”


1999년 카네기홀 재무보고서에는 ‘카네기식 경영’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경상 경비(3949만달러)와 수입(2450만달러)을 맞춰보면 1499만 달러가 적자. 그러나 입장료와 공연장 등 임대료를 합한 ‘영업 수입’외에 후원금(991만달러), 주식배당금과 평가이익 등 기부금 투자수익(742만달러) 등이 1897만달러에 달해 부족분을 메우고도 398만달러나 남았다. 카네기홀의 투자항목을 보니 주식 등 유가증권은 물론이고 각종 수익증권과 일반 기업 출자까지 구성이 다채로웠다.


“이익금은 재투자를 통해 지속적으로 적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성된 카네기홀 순자산이 1억7000만 달러가 넘습니다.”


카네기홀이 처음부터 유럽의 내로라하는 공연장들이 앞다퉈 벤치마킹하려는 ‘알부자’였던 것은 아니다. 1891년 설립 이후 적자를 면치 못했던 카네기홀은 1955년 건축개발업자에게 팔려 헐릴 위기에까지 몰렸다. 그러나 뉴욕의 유서 깊은 명소가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는 반대여론이 들끓자 뉴욕 주정부는 1960년 카네기홀을 500만 달러에 사들여 비영리조직인 ‘카네기홀 코퍼레이션’에 운영을 맡겼다.


여기서 주의깊게 봐야할 대목은 주정부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돈을 대준 것이 아니라 자립이 가능한 구조에 ‘투자’했다는 것이다. 카네기홀 건물은 팔리지 않게 보존해 줬으니, 그 나머지 충당비용은 카네기홀 코퍼레이션이 경영을 통해 창출하도록 ‘간접지원’ 방식을 택한 것. 실제로 카네기홀이 99년 뉴욕 주정부와 시정부에서 직접 지원받은 돈은 전체 소요경비 1700만 달러 중 110만 달러가 조금 넘는 수준이다.


카네기홀 코퍼레이션의 초대 대표로 추대된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은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1년치 티켓을 예매하게 하는 캠페인을 시작으로 자립 경영의 기틀을 만들어 나갔다. 특히 기부금 모금에 발벗고 나서 현재 1만5000여 구좌에 이르는 기업과 개인을 후원자로 끌어들였다. AT&T를 비롯해 200개가 넘는 쟁쟁한 기업이 있지만 연간 기부액 1999달러 이하인 개미 기부군단(‘카네기의 친구들’)도 1만3000명이나 된다. 기부금을 현금만이 아니라 기업의 주식, 부동산으로 기탁받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골란감독은 마치 상품을 파는 기업이 단골을 확보하듯, 후원자를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카네기홀 코퍼레이션의 주요 업무라고 강조했다.


“돈을 낸 만큼 후원자들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연 관람의 우선권을 주고 입장료를 할인해주는 것을 비롯해 갈라 콘서트, 유명 아티스트와의 만찬 등을 수시로 마련하죠. 원할 경우 기탁자의 이름을 새긴 고정 좌석도 마련해 드립니다.”


공연 안내책자 뒤편에 연간 2000달러 이상 기부한 개인과 회사의 명단을 일일이 밝히는 것도 비슷한 취지다. 내로라하는 재력가들이 카네기홀 후원자가 되는 것을 상류층의 명예로 여기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다.


하지만 후원금을 모으고 운용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지난 5월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매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뉴욕의 마사 그레이엄 현대무용센터의 활동 중단은 그 어려움의 단적인 사례. 오랜 적자에 시달리던 현대무용센터는 1998년 뉴욕 이스트 63번가 건물을 팔고 외곽으로 이사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했지만 재정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모든 공연일정을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이곳 기부자들이 현대무용센터의 론 프로터스 예술감독의 ‘실정’에 등을 돌리는 바람에 고작 50만 달러의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경영부실의 책임이 있는 CEO를 개미군단 주주들이 밀어내듯 기부자들이 경영권을 행사한 셈이다.


기부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투자’와 ‘수익’개념이 핵심인 뉴욕. 무대 위에서 고결한 아리아가 울려퍼질 수 있게 하는 것은 무대 뒤의 치열한 문화경영이다.

자본주의 시그널…거리덮은 현란한 광고판

맨해튼은 그 자체가 거대한 광고판이나 다름없다. 대서양 너머 구대륙을 향해, 아니 우주공간을 향해 끊임없이 깜빡거리는 자본주의와 인공문화의 상징인 대형 사인보드. 하지만 이 사인보드는 계속 환한 빛을 발하는 네온사인이 아니라 빛과 어둠이 교차하면서 끊임없이 명멸하는 전광판이다. 그리고 드러냄과 감춤의 미학은 그 전광판의 양전지와 음전지다.


뉴욕 맨해튼의 한복판에 있는 타임스스퀘어. 격자형 도로로 이뤄진 맨해튼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브로드웨이의 배꼽 쯤에 위치한 이곳은 그 빛의 한복판이다. 밀물처럼 밀려오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관광객들의 시선은 타임스스퀘어에서 소용돌이치며 수직으로 상승한다. 밀집된 공간을 가득 채운 어머어마한 규모와 현란한 색채의 광고들에 발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볼 수 밖에 없다. 마치 홍해를 갈랐던 모세의 기적이 도심 한복판에서 실현되는 듯 현혹적이다.


팬티만 입은채 엎드려서 함박웃음을 보내는 자키 속옷 광고모델의 거대한 사진, 각종 TV프로그램 광고를 내보내는 ABC방송사의 대형 모니터, 원통형 빌딩 자체를 스크린으로 증시현황과 더불어 각종 인터넷 콘텐츠 광고를 뿜어내는 나스닥의 전광판. 현란한 색채와 빛으로 자본주의의 광휘를 한껏 뿌려내는 공간이다. 미국의 코카콜라와 일본의 산토리 위스키, 한국의 삼성그룹 광고판 등이 겹겹이 쌓아올려진 다국적 광고탑은 마치 신의 분노로 언어가 달라져 뿔뿔이 흩어졌던 인류가 다시 쌓아올리기 시작한 바벨탑을 보는 듯 아득한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광고내용을 뜯어보자. 상품광고보다는 콘텐츠광고가 압도적이다. ‘라이언 킹’과 ‘아이다’같은 뮤지컬은 물론 토니 블랙스톤과 크리스티나 아귈레라 등의 음반, 워너 브라더스의 영화와 각종 TV프로그램으로 가득찼다. 상품광고는 도요타 승용차와 코카콜라 정도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이는 더욱 뚜렷해진다. 뮤지컬, 영화, TV프로그램, 소설책에 최근엔 닷컴 등 각종 인터넷콘텐츠 광고 일색이다. 다른 광고라도 금융 통신 의료 교육 등 각종 서비스 안내 광고일 뿐 제품광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맨해튼은 이미 콘텐츠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광장이 아닌 밀실로 들어선 탓일까. 이곳의 광고들은 표현이 좀더 우회적이다.


뉴욕의 거리풍경으로 지하철 한칸을 가득 매운 흑백사진들은 첫눈에 무슨 광고인지 알 수가 없다. 썰렁한 거리풍경의 차이나타운에 선 한 중년여성, 주택가를 걸어가는 교복차림의 여학생, 주인의 손에 끌려가는 두 마리 강아지.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진 한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서 보일 듯 말 듯 컬러로 씌여있는 ‘Recycling’이라는 글자를 발견할 수 있다. 재활용을 권장하는 뉴욕시의 공공광고에서조차 메세지는 표면 뒤에 숨어있다. ‘About.com은 무엇에 관해서든지(about anything)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심지어 About.com에 대해서까지도’라는 인터넷 업체의 광고에서도 역시 이런 드러냄과 감춤의 숨바꼭질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아이러니는 브로드웨이 같은 관광객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뉴요커들의 생활공간으로 들어서면 더욱 확연해진다. 뉴요커들이 즐겨찾는 레스토랑과 유명 바는 간판조차 찾기 힘들다. 소호구역 머서가에 위치한 머서 호텔 레스토랑 앞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간판은 볼 수가 없고 겨우 유리창에 ‘(The Mercer) Kitchin’이라고 써있을 뿐이다. 그나마 머서라는 이름조차 구차스럽다는 듯이 괄호안에 들어가 있다. 소호의 유명 옷가게나 안경점들도 간판은 아예 없이 유리창에 보일 듯 말 듯 상호를 새겨놓은 가게들이 많다. 첼시에 있는 ‘LOT61’도 뉴요커들에게 인기높은 바지만 허름한 부두가 창고들 사이에 희미한 불빛을 내는 조그만 간판 하나로 겨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을 뿐이다.


‘LOT61’의 바텐더 브라이언(28)의 설명.


“맨해튼에는 두 개의 구역이 존재한다.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가는 공간과 뉴요커들이 가는 곳은 별개의 장소다. 후자는 자신의 존재를 되도록 감추려고 한다. 그래서 진정한 뉴요커가 되려면 노훼어(Know Where)가 중요하다.”


이런 이중성이 조화를 이뤄 나타난 것이 플래그컬처(깃발문화)가 아닐까. 맨해튼에는 간판은 없어도 깃발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건물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도심속의 대학인 뉴욕대(NYU)의 수많은 건물들도 보라색 바탕에 흰색 횃불이 들어간 깃발을 통해 아이덴티티를 유지한다. 서울의 청담동쯤 되는 소호에서도 대로상에는 DKNY나 캘빈 클라인의 대형벽화도 보이지만 골목안에 위치한 아나 수이, 비비안 웨스트 등 유명 디자이너의 옷가게들은 대형 간판보단 오히려 각자의 독특한 색깔과 문양을 내세운 깃발을 선호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어둑어둑해진 맨해튼의 밤거리를 걷다보면 문득 깨닫는다. 맨해튼이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것은 그곳이 번쩍번쩍한 네온사인의 거리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어둠속에서 깜빡이는 불빛처럼 반쯤은 모습을 감춘채 그렇게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는 점을.
'도시전체가 거대한 세트'

뉴욕, 특히 맨해튼은 천일야화의 도시다. 수 많은 민족과 종교, 직업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마주치고 부대끼는 이곳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화와 전설이 도시 곳곳을 굴러다닌다. 어쩌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에 귀기울이기 위해 맨해튼은 ‘잠들지 않는 도시’가 됐는지도 모른다.


거리 모퉁이만 돌아서면 경찰과 갱, 예술가와 모델, 월스트리트의 ‘돈벌레 일벌레들’과 할렘의 부랑아, 외교관과 테러리스트, 유태인과 아랍인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곳. 여의도 면적의 10배가 조금 넘는 땅(81㎢)에 수백만의 운동인자들이 분열과 융합을 거듭하면서 에너지를 분출하는 곳. 이야기 사냥꾼들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사냥터가 또 있을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맨해튼은 영화와 TV드라마에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는 장소다. 이런 경향은 최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98년 뉴욕에서 제작된 장편 상업영화는 221편으로 최대를 기록했고 10억달러에 가까운 돈이 뉴욕시에 뿌려졌다. 99년에는 209편에 8억3940만달러로 약간 주춤하긴 했지만 이 수치 역시 영화제작 편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94년 이후 6년을 통틀어 두 번째로 높은 것이다.


TV프로그램 쪽을 보면 ‘맨해튼의 힘’은 더욱 세다. 올해 뉴욕에서 제작되는 TV프로그램 수는 110여편으로 양적으로는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프라임타임 시간대 방영되는 프로그램은 두배 이상 늘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뉴욕을 무대로 하는 프라임타임 프로그램은 NBC의 ‘로 앤 오더(Law and Order)’, HBO의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와 ‘오즈(Oz)’ 등 6편이었으나 올해는 베트 미들러 주연의 CBS 코미디 ‘베트 쇼(Bette Show)’와 가브리엘 번 주연의 ABC 시트콤 ‘매디건 멘(Madigan Men)’ 등이 더해져 13편으로 증가했다.


영화와 TV프로그램을 합치면 98년과 99년 각각 25억달러가 넘는 수입을 뉴욕에 안겨준 것으로 분석된다. 뉴욕의 ‘엔터테인먼트 르네상스’가 불어닥치기 전인 93년의 14억달러에 비하면 두배 가까운 증가율을 기록한 셈이다.


실제 제작이 뉴욕에서 이뤄지지 않더라도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까지 포함하면 스토리 뱅크로서 맨해튼의 위력은 더욱 실감난다.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NBC의 시트콤 ‘프렌즈(Friends)’는 LA에서 제작되지만 뉴욕 여피들의 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다. 파킨슨 병에 걸린 마이클 J 폭스 주연의 시트콤으로 유명한 ‘스핀 시티(Spin City)’ 역시 캐나다 토론토에서 제작되지만 내용은 뉴요커들의 이야기다. 올여름 개봉한 ‘엑스맨(X―Men)’ 도 대부분 컴퓨터그래픽으로 이뤄지긴 했지만 ‘자유의 여신상’이 초능력자들의 마지막 결투장소로 등장하는 등 역시 뉴욕이 주무대다.


이처럼 많은 영화와 TV프로그램들이 이 좁은 섬에서 출발하는 데는 ‘스토리뱅크’라는 위상 외에 또다른 이유도 숨어있다.


폭스뉴스의 국제담당 편집자인 브라이언 노블록은 “맨해튼을 포함한 뉴욕시 지역 전체 시청가구는 120만가구로 단일지역으로는 미국 최대의 시청자 시장”이라고 말한다.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최대수요자인 뉴요커들의 관심사를 붙들어두는 것이 시청률 제고에 매우 유리하다는 계산이다.


뉴요커들은 자신들을 ‘뉴요커’가 아닌 ‘아메리칸(미국인)’이라고 부르면 불쾌감을 느낀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전체 미국과 자신들을 차별화해서 바라보는 자의식이 뚜렷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뉴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적은 뉴요커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도 뉴욕을 주무대로 등장시킨다는 것.


영화 ‘고질라’에서 남태평양 핵실험의 부작용으로 생겨난 고질라를 파나마운하를 가로질러 수천㎞ 북쪽 대서양변의 맨해튼까지 끌고온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맨해튼에 사는 영화감독과 배우들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도 한 원인이다. 우디 앨런과 마틴 스콜시즈, 폴 머저스키, 스파이크 리 등의 영화감독들은 물론 팀 로빈슨과 수전 새런든 부부, 리처드 기어와 줄리아 로버츠 같은 할리우드의 유명배우들도 점차 인터네셔널한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맨해튼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다.


줄리아 로버츠의 영화제작사인 슈레이스사의 플리니 포터사장은 그들이 맨해튼에 사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집밖에 나가 한시간 거리에서 피카소의 작품을 볼 수 있고 길거리를 걷다보면 무명예술가들의 온갖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 밤마다 열리는 파티에서는 지긋지긋한 연예계 인사들이 아니라 월스트리트 증권중개인과 그리니치빌리지의 예술가, 소호의 패션디자이너 등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그들 중 누구도 사인해달라고 귀찮게 구는 사람은 없다.”

뉴욕의 文化지도가 바뀐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돈, 새로운 문화(New People, New Money, New Culture).



많은 뉴요커들은 최근 몇 년 새 뉴욕 문화의 변화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한다. 인터넷 문화의 보편화와 미국 경제의 호황이 탄생시킨 주머니 두둑한 ‘신 인류’가 뉴욕의 문화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의 ‘뉴 피플’은 일요일 낮 늦은 모닝커피를 마시기 위해 커피 체인점 ‘스타 벅스’를 찾은 젊은이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반납할 비디오 테이프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으로 간단하게 구별된다. 간밤에 ‘코즈모닷컴’(cosmo.com) 같은 인터넷 배달 서비스로 빌려본 테이프를 반납하는 것이다.


인터넷 비디오 대여 서비스가 ‘뉴 피플’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이곳 기성세대에게는 뜨악한 일임에 틀림없다. 인터넷으로 주문하지만 실제로 배달해주는 곳은 동네 비디오 대여점이기 때문이다. 뉴욕대에서 뉴미디어를 강의하는 데니 로진은 “직접 가서 금방 빌려오면 되는데 굳이 컴퓨터로 주문하고 30분씩 기다리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은 인터넷을 통해서 공개된 업체를 선택하는 것이 더 신뢰할 만하다(authentic)고 여긴다”고 설명했다.


이런 ‘뉴 피플’의 새로운 행태는 미국 닷컴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인프라가 됐다. ‘새로운 돈’이 나스닥으로 몰리면서 실리콘 앨리와 월 스트리트에는 하루 아침에 큰 돈을 쥐게 된 젊은이들이 줄지어 생겨났다.


최근 미술을 필두로 예술시장의 판도를 급속하게 바꿔놓는 것도 이들의 출현과 무관하지 않다. 뉴욕타임스의 표현을 빌면 “뉴욕과 런던 경매장을 오가면서 등단한지 몇 해 되지도 않은 신인들의 멀티미디어 작품을 ‘묻지마’ 구매하는 신원 불명의 젊은이들”이 바로 이들이다.


현대예술의 흐름 뿐만 아니라 뉴욕의 문화지형도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동원할 수 있는 돈의 크기에 따라 근거지가 결정되는 거주의 재배치가 몇 년새 이뤄졌다. 대표적인 지역이 소호(SOHO)로 이제는 ‘가난한 예술가의 거리’가 아니다. 2,3년전부터 20,30대 백만장자들이 정형화된 아파트 대신 탁 트인 공간을 마음대로 디자인할 수 있는 이곳 스튜디오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을 뒤따라온 고급 브랜드의 패션 점포가 자리 잡으면서 소호는 순식간에 ‘다운타운 쇼핑몰’로 변모했다. 이에 따라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올라 50평짜리 스튜디오 월세가 보통 6000∼7000달러에 이른다. 지난해까지 소호에서 갤러리를 운영했던 양 킴은 “빌 게이츠 같은 갑부나 제프 쿤스 같은 부유한 예술가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동네가 된 소호 거리에는 쇼핑백과 카메라를 든 관광객들만 넘쳐난다”고 말했다.


이곳을 세계적인 예술의 산실로 만들었던 많은 갤러리와 예술가들은 더이상 신흥 부촌에 머물 수 없었다. 3년전 뉴욕의 대표적인 갤러리인 폴라 쿠퍼 화랑을 필두로 3분의 2 가까운 화랑이 값싼 창고 건물이 많은 챌시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하지만 나스닥 호황은 인적이 드물어 황량하기 그지 없는 챌시의 집값을 1년 사이에 3,4배나 올려놨다. 다시 짐을 싸지 않을 수 없는 많은 화랑은 맨해튼 다리를 건너 브루클린 공장지대로 쫓겨갔다. 브루클린에 형성된 신 예술촌 ‘덤보’(DUMBO)가 최근 신예 아티스트의 산실로 주목받는 데에는 이런 저간의 사정이 있다.


‘뉴 머니’는 문화만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뉴요커의 정신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듯하다. ‘미드라이프 크라이시스’(Midlife Crisis)란 신조어가 최근 뉴요커의 화두로 자리잡은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30대 중반까지 백만장자가 되지 못하면 영영 불가능하다는 말에는 이들이 가진 위기감이 투영되어 있다.


뉴욕대 사진학과 교수이면서 문화비평가인 프레드 리친은 “‘뉴 피플’이 주도하는 ‘뉴 컬처’가 중요한 전환점을 맞고 있다”고 분석했다. “새로운 문화는 갈림길에 서 있다.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을 이룰 수 있는 진정한 다원주의의 길과 사회적 네트워크에 필수적인 대인접촉이 사라진 개인주의의 길이다”.


그는 구체적인 전망을 유보하면서도 “‘뉴 머니’가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다는 한탕주의를 만연시키고 문화의 생산보다 소비에 치우치게 만들어 신인류의 문화적 역량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뉴욕시 정부가 올해의 슬로건으로 ‘세계의 문화 수도’를 내건 것은 어쩌면 이런 위기감의 표현이 아니겠느냐.”


잠들지 않는 도시 맨해튼

맨해튼은 ‘잠들지 않는 도시’다.



미국의 대도시들은 보통 오후 8시가 넘으면 도심은 블랙홀처럼 텅 빈 공간으로 바뀐다. 그 시간 도심의 빌딩들이 환한 불을 켜놓고 있다고 해도 차를 타고 다니면 모를까 도심을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황량한 공간이다.


하지만 뉴욕의 맨해튼은 밤 8시부터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우선 맨해튼 사람들의 저녁식사 약속은 밤 8시가 넘어야 한다. 그 전에 저녁약속을 잡는 것은 촌스런 일이 된지 오래다. 요즘에는 아예 10시쯤 저녁약속을 하는 것이 첨단패션을 따르는(chic) 일이 됐다.


고급 의상실과 화랑가가 밀집한 소호의 고급 레스토랑 ‘머서 키친’에 손님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간은 밤 10시경. 8시반까지도 테이블이 절반 이상 비더니 9시반이 넘으니까 지하 1층 레스토랑의 테이블은 물론 1층의 바까지 사람들로 꽉 찬다.


이렇게 늦은 식사가 다이어트에 도움이 될리는 만무하다. 단순히 근육을 키우는 ‘육체미 가꾸기(Body Building)’라는 말 대신 신체 부위별로 들어갈 곳과 나올 곳을 조각하듯 가꾼다고 해서 ‘인체조각(Body Sculpture)’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신체적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뉴요커들에게는 더욱. 하지만 언제나 과학보다는 유행의 힘이 더 강한 법.


워너브라더스의 해외출판물 스카우터인 마리아 켐벨은 “오후 늦은 시간 맨해튼의 사무실은 어딜 가나 피자나 도너츠를 먹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면서 “하지만 정작 이들의 저녁식사 식탁에 오르는 스테이크는 미국 다른 곳의 절반 크기 밖에 되지 않는다”고 귀뜸해 줬다.


또 밤은 마치 만화 ‘이상한 나라의 폴’에 등장하는 삐삐가 마술봉을 휘두른 것처럼 맨해튼을 새로운 차원의 공간을 향한 통로로 바꿔놓는 시간이다. 어둑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사무실의 불이 하나둘씩 켜지는 맨해튼 마천루들은 하나하나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백개의 눈을 지닌 거인 아르곤이 깨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인들이 깨어나는 시간이 되면 맨해튼의 독신남녀들은 저마다 폴이 돼서 마왕의 손에서 구할 니나를 찾아 도심의 미로를 헤맨다.


소호와 이스트빌리지 첼시에 수없이 많이 생겨난 ‘바(Bar)’들은 분위기있는 음악에 술 한잔 걸치면서 대화를 즐길 수 있는 일과 성공을 좇아 맨해튼에 상륙한 수많은 싱글들의 집결지다.


첼시 지역의 허드슨강변 옆에 있는 ‘LOT61’. 겉에서 보면 허름한 창고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은은한 조명에 검은색 톤 인테리어에 맞춰 의상을 통일한 바텐더들이 컴퓨터로 주문을 받는다. 캐주얼 정장차림의 남자들과 착 달라붙는 검정색 원피스나 바지정장 차림의 여자들은 대부분 마티니를 마신다.


럼과 백포도주를 섞은 마티니는 가히 맨해튼의 술의 여왕이라고 할만하다. ‘LOT61’의 메뉴를 보면 마티니 목록이 빼곡이 적혀있는 페이지가 네 페이지, 종류는 90여 가지나 된다. 나머지 두 페이지 중 하나에는 맥주, 다른 하나는 위스키와 기타 술이 적혀 있다.


대부분 짝을 지어오거나 남녀가 각각 친구들을 데려와서 만나는 경우가 많지만 밤 11시가 넘으면 즉석 만남도 심심치 않게 이뤄진다. 이 때 중요한 것이 첫마디 인사말을 뜻하는 픽업라인(Pick―up Line).


뉴욕대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아론 리펠스(21)는 “싱글들에게 자신만의 독특한 픽업라인은 사인과 같다”며 “뉴욕에서 싱글로 살아남으려면 멋진 픽업라인부터 만들라”고 충고했다.


만일 미술적 감수성을 지닌 남자로 상대에게 비치기를 원한다면 ‘Nice Figure, Italian?’도 괜찮다. 이 말은 ‘몸매가 멋있는데 이탈리아 출신이십니까?’라는 뜻과 함께 ‘멋진 조각품이네요. 이탈리아제입니까?’라는 중의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직선적인 터프가이로 비치기를 원하다면 “당신의 피에 한국계가 섞여있느냐”고 묻고 당연히 “노”라고 답할 때 “그러면 한번 섞어보는 것이 어떠냐”는 말로 웃음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뉴욕에선 이 한두줄짜리 픽업라인을 위한 전문적 잡지가 등장할 정도다. 하지만 픽업라인의 생명은 독창성. 어디서 한번 들어본 것 같은 내용이면 효과가 금방 떨어진다. 이쯤되면 일본의 하이쿠 못지않다는 말도 농담만은 아니다.


맨해튼의 미로에는 아무리 멋진 픽업라인으로도 열 수 없는 요지경의 세계도 숨어있다. 소호 그랜드호텔 2층에 있는 ‘그랜드 라운지’도 고급스럽기로 유명한 바. 자정 가까운 시간에도 월스트리트에서 방금 걸어나온 듯 말끔한 정장차림의 남자들과 마티니를 흘끔거리는 여자들로 발디딜 곳이 없다.


하지만 진짜는 이 라운지의 끝에 있는 출입문 뒤에 감춰져 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덩치들’의 주머니에 40달러 가량을 찔러주며 “캐비어 맛 좀 보러왔다”는 주문을 외어야만 열리는 그 문은 1층 발코니로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 그곳에는 캐비어를 안주삼아 고급포도주를 맛보는 또다른 비밀의 장소가 숨어있다.


다시 그곳을 나와 소호와 이스트빌리지의 밤거리를 걷는다. 오전 2시가 넘는 시간에 비까지 퍼붓지만 밤거리는 젊은이들로 북적거리고 여전히 불을 밝힌 바들은 음악소리와 흰 연기를 거리로 뿜어낸다. 발 밑으로는 그 시간까지 지하철이 달린다. 지하감옥에 갖힌 용처럼 울부짖으며.


19세기말 서정시인 부르디용의 ‘밤은 천개의 눈을 가졌다’는 싯구마냥 맨해튼도 천개의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뉴욕 맨해튼의 동키 쇼
"구경은 싫다…관객도 같이 놀자"


무대도 없고 객석도 없다. 연극도, 뮤지컬도 아니다. 전위적인 퍼포먼스인가하면 질펀한 놀이다. 오감을 자극하는 즐거운 파격. 관객은 열광하고 비평가는 찬사를 보낸다. ‘동키 쇼’(The Donkey Show)와 ‘데 라 과르다’(De La Guarda). 뉴욕 오프브로드웨이를 들썩이며 공연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오프브로드웨이는 향후 ‘본 무대’인 브로드웨이의 판도를 가늠하게 해준다.

■셰익스피어와 디스코의 만남

‘동키 쇼’가 열리는 ‘클럽 엘 플라멩고’에 들어서면 당혹스럽다. 공연장인 줄 알았더니 디스코텍이다. 널찍한 플로어, 몇 개의 테이블, 현란한 조명, 디제이 박스, 맥주와 칵테일을 파는 바까지. 앰프에서는 귀에 익은 디스코 노래가 귀청을 때린다. 댄스 플로어에서는 육감적인 남성 댄서들이 현란한 춤을 선보인다. 관객도 분위기에 취해 어울린다.

정신 없는 디스코판 30여분. 본 공연은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을 디스코풍으로 리메이크한 ‘한 여름밤의 디스코’다. 중세의 숲을 찾은 연인들의 뒤죽박죽 사랑 이야기를 70년대 디스코텍에 놀러온 커플 사이의 해프닝으로 둔갑시켰다. 관객은 관람자이면서 엑스트라인 셈이다.

인물 설정도 기발하다. 원작의 오베론 왕은 거만한 디스코텍 사장으로, 요정의 여왕인 티타니아는 관능미 넘치는 댄서로 바꿨다. 장난꾸러기 요정 퍼크는 외계인 복장에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플로어를 누빈다. 압권은 상대의 파트너에 눈 멀게 만드는 사랑의 묘약을 코카인(마약)으로 바꾼 것. 셰익스피어의 시적인 대사는 도나 섬머나 아바 등이 부른 70년대 디스코 노래가 대신한다. 50대 중년부터 10대 고등학생까지 어울려 댄스파티를 벌인다. 공연이 끝나도 한 여름 밤의 디스코 축제는 새벽까지 계속된다.

■공중에서 펼쳐진 비상의 꿈

아르헨티나 작품 ‘데 라 과르다’ 공연장에 들어서면 검은 장막이 둘러처진 어두컴컴한 공간이 전부다. 갑자기 바람소리가 들리더니 머리 위의 하얀 막이 밝게 빛난다. 괴성을 지르며 하늘을 나는 배우의 그림자가 비친다. 형광색 작은 공과 풍선을 떨어뜨려 아름다운 스크린을 연출하기도 한다. ‘후두두둑…’ 형광액을 뿌리는 소리가 들리고 조명이 꺼지면 별이 빛나는 밤하늘로 바뀐다.

배우들이 괴성과 함께 천정 스크린을 찢으며 나타났다 공중으로 사라진다. 놀란 관객들의 비명. 이내 막이 모두 찢어지면서 3층 높이의 극장 천정이 드러난다. 정장 차림에 밧줄을 매단 배우 10여명이 2,3층 벽면에서 튀어나와 날아다닌다. 공연이라기 보다는 곡예에 가깝고, 정확히는 퍼포먼스다. 공연 부제가 ‘나는 법 배우기(Learn to Fly)’. 대사 없이 라틴 음악과 곡예만으로 상징적인 장면을 잇달아 연출한다. 높은 오피스 빌딩속에서 경쟁,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창문 밖으로 날아다니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다.

공연 도중 옷이 젖는 것도, 한시간 넘게 서서 고개를 쳐들고 있어야 하는 것도 관객은 개의치 않는다. 마지막에 배우들은 관객을 한명씩 끌어안고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관객과 함께하는 축제의 시간이 이어진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두 공연은 브로드웨이 대작 못지 않은 인기와 찬사를 얻고 있다. 뉴욕타임스를 위시해 타임 빌보드 피플 등 주요 매체가 앞다투어 대서특필했다. 연극도 뮤지컬도 전통공연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 모두인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 것을 높게 평가했다.

기발한 아이디어만으로 얻은 반짝 인기는 아니다. 요즘 한 달을 넘기기 힘들다는 오프브로드웨이 공연시장에서 ‘동키 쇼’는 1년, ‘데 라 과르다’는 2년 가까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오랜 준비와 맹연습이 뒷받침된 탄탄하고 정교한 연출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데 라 과르다’의 경우 공중쇼 배우들의 기량은 서커스 단원을 뺨치는 수준이다. 또 ‘동키 쇼’ 주인공의 연기는 공연이 끝나야 1인2역이었음을 알 정도로 감쪽같다.

두 공연의 큰 특징 중 하나는 ‘관객 참여’(Audience Participation)다. 수동적인 구경에서 벗어나 배우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공연예술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이런 것일까. 남사당 놀이나 봉산탈춤 같은 공동체 연희의 정신이 뉴욕에서 꽃을 피운 것일까.

'동키쇼' 프로듀서 조르단 로스

‘동키 쇼’ 프로듀서인 조르단 로스는 24세의 미남이었다. 그 나이면 ‘핫 초컬릿’이 부른 ‘유 섹시 싱(You Sexy Thing)’ 같은 디스코 넘버를 접한 세대가 아니다. 오프브로드웨이 데뷔작으로서는 뜻밖의 선택이다.

“저 같은 젊은이에게 디스코와 70년대는 묘한 매력과 환상을 줍니다. 셰익스피어 고전을 디스코 버전으로 바꾼 것도 모든 세대가 공감할 거라는 예상 때문이었습니다.”

그 ‘감’은 적중했다. 지난해 8월 개막한 뒤 6개월간 전회 매진됐다. 지금은 춤과 노래를 따라하는 단골(?) 고객이 많아졌고, 주말에는 새벽 3,4시까지 관객이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조르단은 ‘동키 쇼’의 가장 큰 매력을 “관객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앉아서 보는 공연으로는 관객을 만족시키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관객을 공연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죠. 직접 참여만큼 큰 즐거움은 없으니까요.”

이같은 발상의 전환은 매일 200개의 공연이 열리는 뉴욕 쇼 비즈니스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란 말도 덧붙혔다. “뉴욕에서는 남들과 다른 경험을 주지 않으면 관객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조르단의 어머니는 ‘데 라 과르다’의 기획 제작자인 대릴 로스다. 조르단은 프린스턴대 철학과 출신으로 대학 시절 연극활동을 했다. “고정관념을 깨는 것에 흥미를 느낍니다. 공연을 파티처럼, 파티를 공연처럼 하는 것도 이런 취향 때문인가 봅니다.”

그는 가을에 브로드웨이 공연에 맞먹는 대형 프로젝트를 선보일 예정이다. 컬트영화의 대명사인 ‘록키 호러 픽쳐쇼’를 소재로 삼았다고 귀띔했다. 그가 말하는 ‘관객과 함께 웃고 즐기는 전대미문의 하드코어 록 쇼’가 무엇일지 기대를 갖게 한다.
브로드웨이 최대 호황 만끽

지금 브로드웨이는 호황을 만끽하고 있다. 지난해 공연 수입이 사상 최대였다. 1년치 예약이 끝난 ‘라이언 킹’를 비롯해 ‘시카고’ ‘아이다’ ‘미녀와 야수’ 등 롱런하는 뮤지컬이 10개가 넘는다. 그것도 ‘메이드 인 런던’이 아닌 ‘메이드 인 뉴욕’이다.

1980년대 이후 브로드웨이를 점령한 것은 영국산 뮤지컬이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전위에는 ‘캣츠’ ‘미스 사이공’ ‘레 미제라블’ ‘팬텀 오브 오페라’ 등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빅4’가 섰다. 100년 가까이 정상을 지켜온 미국 뮤지컬의 영화가 저무는 듯했다.

침체에 빠졌던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96년 혜성처럼 나타난 조너선 라슨의 ‘렌트’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 뒤를 ‘라이프’가 받쳐줬고 대작 ‘타이타닉’이 선전하면서 중흥기를 맞게 된다.

98년 ‘라이언 킹’의 ‘대박’은 미국을 뮤지컬 최강국으로 다시 우뚝 세운 결정타가 됐다. 명 연출자 줄리 데이머는 동명 만화영화를 혁신적인 사운드와 비주얼의 뮤지컬로 재탄생시켰다. 엘튼 존의 발라드곡(‘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등)을 아프리카 리듬으로 과감히 편곡했고, 머리만 큰 우스꽝스런 동물 가면 대신 정교하게 제작된 의상을 도입했다. ‘라이언 킹’의 성공으로 고무된 디즈니는 브로드웨이에 본격적으로 진출, 타임스스퀘어 중심가 극장을 장기 임대해 ‘아이다’ ‘미녀와 야수’를 올려 모두 성공했다.

요즘 브로드웨이는 오프브로드웨이에서나 시도할 법한 새로운 형식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토니상을 수상한 ‘콘택트’는 이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새로 작곡된 노래가 한 곡도 없이 토니상을 받은 첫 사례이기 때문. 기존 노래에 춤 위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파격이 공인을 받은 것이다. 뮤지컬이라고 부르기엔 알쏭달쏭해 ‘댄스 플레이’란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미국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도시,
미국의 제1의 관광도시... 뉴욕 .
-cyan 21-


이는 단지 미국인들의 힘으로만 이루어진 명성은 아니다. 혹자는 뉴욕을 인류가 만들어놓은 가장 거대한 도시라고 했다. 지구촌 인종전시장이라고 불리우듯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다양한 인종 만큼 다양한 문화를 그들 나름대로 잘 가꾸어 놓아 전체로 보았을 때‘뉴욕문화’라는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부조화속의 조화를 이루며 뉴욕에서만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워킹걸>의 첫 장면 -칼리 사이몬의 “Let the River Run”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면서 자유의 여신상이 클로즈업 되었다 멀어지고 하늘을 찌를듯이 빼곡히 서있는 호화로운 초고층 건물들 사이를 비추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말그대로 힘차게 출근하는 뉴요커들- 의 활기찬 모습이 떠오른다. ‘자본주의의 수도’ 뉴욕의 생기넘치는 아침이다.
이 마천루 숲을 구성하는 빌딩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영화의 단골손님이기도 한 곳. 영화 <러브 어페어>에서 아네트 베닝과 워렌 비티의 만남을 그토록 기다리게 만들고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소로 등장하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지금 한창 진행중인 연인들이라면 한번쯤 이곳에서 사랑고백을 하고 싶고 또 받아보고 싶게 하는 그런 곳으로, 자칫 삭막할 것만 같은 빌딩숲속에서 잠깐 동안이라도 낭만적인 상상들로 미소짓게 한다.

상업.무역의 중심지의 모습에서 이어 이번엔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피어나는 또 하나의 뉴욕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몇년전부터 매니아외에 젊은층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급작스럽게 대중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재즈’. 뉴욕하면 ‘재즈’를 빼 놓을 수 없다. 사람의 심장박동수와 엇비슷한 재즈의 리듬을 타고 흑인가수 빌리 할러데이의 감칠맛나는 목소리와 맨하탄 트랜스퍼의 환상적인 화음. 관객과 혼연일체가 되는 즉흥연주를 들으면 정신없이 일에 몰두한 뉴요커들의 하루 피로는 말끔히 가신다. 30여곳의 재즈클럽을 주무대로 현대재즈의 중심지를 이루는 그리니치 빌리지에는 뉴욕인들 뿐만 아니라 유럽. 남미. 동양. 흑인등 세계 각국의 재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값진 경험을 하게 된다. 그밖에 화려한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세계 각지 지망생들의 희망과 좌절이공존하는 브로드웨이에는 줄줄이 늘어서 있는 40여개의 극장과 셀 수 없을 정도의 오페라하우스나 뮤지컬 홀들이 문화생활을 만끽할 수 있게 한다. 빌딩숲사이에서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공원과 세계미술의 메카 소호에 있는 각종 박물관, 갤러리들은 뉴욕문화의 다양함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1. 하우스튼가 남쪽의 원더랜드


소호는 지루하다. 더 이상 ‘쿨’하지 않다.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지라 불리는 소호는 이제 패셔너블한 뉴요커들과 각지에서 온 관광객으로 뒤덮인 ‘물’좋은 거리일 뿐이다. 들뜬 관광지가 내뿜는 기운은 감각의 마비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핫’하다. 산뜻한 옷 가게나 가구점 쇼윈도우와 형형색색의 식당과 술집들은 19세기 말의 투박함이 녹아있는 울퉁불퉁한 코블(cobble)길, 묵중하고 투박한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들이 내뿜는 지난 시대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활기로 가득찬 예술과 패션의 거리로 바꾸어버렸다. 그 거리 위를 관광 가이드와 카메라,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흩어진다. 뉴욕의 명물, ‘뉴욕 애플 투어(New York Apple Tour)' 2층 버스는 카메라에 썬그라스를 걸친 관광객들을 가득 싣고서 시커먼 배기가스를 내뿜으며 소호의 거리 위를 달리고 있었다.

트라이베카(TriBeca)에 살다보니 일주일에 몇 번이고 소호를 걸어서 지나가게 된다. 소호에 비해선 아직 개발되지 않은 탓에 진짜 로프트(창고)들이 드문드문 눈에 띠는 코블로 된 거리를 지나서 돗데기 시장같은 커널(Canal)가를 지나면 소호의 남쪽에 도달하게 된다. 보통은 웨스트 브로드웨이(West Broadway)를 따라서 걸어 올라가지만, 기분과 목적에 따라서 어떤 날은 브로드웨이로 또 어떤 날은 우스터(Wooster)가나 그린(Greene)가를 따라서 걷기도 한다.

소호로 들어가는 남쪽 커널가는 서쪽 뉴저지로 넘어가는 홀랜드 터널(Holland Tennel)과 동쪽 브루클린으로 들어가는 맨하탄 브릿지가 양 끝에 붙어있어 오고가는 차량들로 뒤엉켜 언제나 극심한 정체현상를 이루고 있다. 커널가를 따라 연접한 보도에는 차량 수보다 몇 십배나 많은 사람들이 가짜 프라다나 뤼비똥 가방, 구찌나 발리 구두, 샤넬이나 캘빈클라인 향수, 까띠에르나 롤렉스 시계, 쏘니나 아이와 미니 콤포넌트 따위를 사려고 야단법석을 이루고 있다.

커널가 안쪽 난립한 중국 식료품가게나 생선가게, 중국 빵집과 식당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분주하게 오가고 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커널가 지하철 역 주변은 공사를 하느라고 가뜩이나 좁은 길을 두배나 좁게 만들어 사람들 사이를 잽싸게 빠져 걷지않으면 언제 이거리를 벗어날지 모를 만큼 북세통이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커널가와 인접한 소호 남쪽의 두어 블락은 갤러리보다는 악세사리 가게가 눈에 먼저 들어오고, 이 건물 저 건물에 간간히 중국어로 쓰인 간판이 보인다. 특히 브로드웨이와 커널가 위쪽은, 엘로우 래트 배스타드(Yellow Rat Bastard)나 펄스(Pulse), 액티브 웨어하우스(Active Warehouse)같은 힙합 옷가게들 천국이다. 70-80년대 이후 싹튼 이스트 빌리지의 뉴 웨이브 예술이 소호로 흡수되듯 하위문화가 주류문화로 흡수 통합되는 현장을 이 길목에서 목격한다. 더 이상 힙합이나 펑크가 소수 철없는 아이들의 반항적인 패션이 아닌 것이다. 브루클린 뮤지엄에서는 힙합 네이션(Hip Hop Nation)이라는 주제로 뉴욕 담벼락이나 지하철 차량 등에 스프레이나 에어졸로 떡칠을 한 낙서나 32가 한빛은행 앞 보도에서 흑인 10대들이 관광객 푼 돈이나 노리고 써커스하듯 추던 브레이크 댄스, 클럽 디제이나 랩가수들이 입던 옷이나 신발, 악세사리를 예술품으로 전시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랜드(Grand)가를 지나면 거리의 풍물과 사람들의 피부색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람의 수도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래도 물론 거리는 붐빈다. 이제부터 서서히 갤러리도 보이고 고급 카페와 디자이너 가구점, 옷가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가게들과 갤러리들을 오가노라면 가게들이 갤러리 같고, 갤러리가 이들 가게같이 느껴진다. 특히 헬무트 랭이나 내셔날 코스튬같은 의류매장은 갤러리보다 더욱 갤러리같이 상품을 디스플레이를 하고있고, ‘잘 나가는’ 갤러리는 반대로 상점처럼 장식하고 예술품들을 전시 판매한다. 하이 아트(high art)와 로 아트(low art)의 경계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의 구분도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하기는 유명한 예술가들이 케이 마트(K-mart)에서 전시회를 하고, 뮤지엄은 텔레비젼 브라운관으로 꽉 차있는가 하면, 영화 타이태닉 주제가가 일류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는 세상이니 그런 구분이 없어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랜드가를 지나다 제대로 간판조차 찾기 힘든 소호의 ‘뜨는’ 갤러리, 제프리 다이치 프로젝츠(Jeffery Deitch Projects)의 갤러리 벽면엔 그림이나 설치작품이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싸구려 페인트로 낙서를 해놓은 것이 보이는데 그것이 전시품이란다. 이 낙서를 어떻게 팔아먹을까? 도대체 얼마나 할까? 우리 조상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듯이 이곳 갤러리 주인을 위시한 '예술 상인'들은 길거리 간판이나 낙서, 상품 포장지 등도 갤러리에 가져다 놓고 말도 안되는 비싼 가격에 팔아먹는다지. 몇몇 저가 의류업체들도 소호의 이런 ‘예술 상인’들의 상술을 이어 받아 브랜드 간의 높낮이를 파괴 시키고 있다. 어떻게 감히 올드 내이비(Old Navy)나 제이 크루(J. Crew) 따위가 한국에서 제일로 좋다는 백화점 ‘겔러리아’의 ‘명품관(?)’에만 전시되는 프라다나 돌체엔 가바나, 루이뷔통 같은 ‘명품’들 하고 같은 지역에 공존할 수 있단 말인가! 하기는 몇 블록 밑 커널가에 가면 식별하기 힘들만큼 잘 만들어진 ‘짜가’들도 공공연히 팔리고 있는 판이니. 이제 가격이 제품의 질을 보장해 줄런지 모르지만 스타일은 보장해주지 않는가 보다. 이처럼 이 동네에서는 예술에서 고급과 저급이란 경계가 사라질 뿐만 아니라 상품의 브랜드에 있어서도 고급과 저급의 구분이 사라지고, 엄숙한 뮤지엄(쿠겐하임)에서 오토바이를 전시하는가 하면, 일류 갤러리에서 낙서나 흙더미가 감쪽같이 예술작품으로 둔갑한다.

50년대 말에만 해도 ‘지옥의 100 에이커(hell's 100 acres)’라 불렸던 소호가 30년 만에 뉴욕 관광의 필수적인 코스가 되었을 뿐 아니라 미드 타운의 뮤지엄, 링컨센터, 카네기홀 같은 공연장과 더불어 뉴욕을 세계 예술의 중심지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그 유명한 갤러리 타운을 이루고 있다. 버려진 공장지대가 ‘뽕나무 밭이 바다로 되듯’ 변해버린 셈이다(桑田碧海). 1968년에 레오 가스텔리 화랑 디렉터로 일하던 이반 칼프가 웨스트 브로드웨이에 오케이 해리스 갤러리를 연 이래 폴라 쿠퍼(Paula Cooper), 홀리 솔로몬(Holly Solomon), 리차드 페이근(Richard Feign)등 관록 있는 갤러리들이 미드타운에서 소호로 이전하여 문을 열었다. 그리하여 1978년에 77개의 갤러리가, 그리고 그 이후로 상당 수의 갤러리가 첼시로 옮겨갔지만, 99년 현재에도 아직도 225개의 갤러리가 소호에서 영업중이다.

단순히 갤러리가 많이 몰려있다고, 또 많은 예술가들이 살고 있다고 해서,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이렇게들 몰려드는 것일까? 1996년 기준으로 겨우 6천 5백 여 명의 사람들이 살고있지만, 주민들 중 76%가 예술가이거나 예술과 관련된 일로 먹고 산다고 해서, 시내 중심가의 러시아워처럼 주말이면 사람들이 이리들 몰려 다니는 것일까? 튀는 것에 목숨을 거는 별난 미국사람들 중에서도 더 튄다는 개성 강한 예술가 족속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얌전하게 걸어서 끝에서 끝까지 10분도 안 걸리는 이 지역에 몰려들 살았을까? 20세기초 세계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의 한 귀퉁이 몽마르트가 20세기 중반에 하우스턴 (Houston)(1) 스트리트 남쪽과 커널(Canal) 스트리트 북쪽 사이에 있는 예일곱 블록안으로 훌쩍 옮겨져온 힘은 또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지역을 걸어다닐 때마다 이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곤 했다.

Written by 김정배, 뉴욕 16-O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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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형준이라고 합니다.

우연치 않게 유럽에 10여일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유럽 중심부 5개국(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을 렌트카로 돌아다녔습니다.
아우토반을 씽씽 달려보자....

인원 : 4명(남2, 여2)
차량 : 웨건(1500CC, 디젤)
기간 : 8일간
비용 : 약 55만원 미만(기름값, 톨비등 제반 비용 포함)
- 4명의 유로 패스 비용의 1/4 매우 적은 비용

장점
1) 비용이 매우 적다.
2) 고속도로 휴게실 차안에서 퍼저 자도 된다.
(기차간에서 쭈그리고 잘 필요가 없다)
3) 4명이 모두 운전하면, 야간에도 이동이 가능하다.
4) 아우토반을 시속 200km이상을 쏠 수 있다.
5) 유럽의 모든 도시를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된다.
6) 이동이 신속하다.(주차비 낼때는 버리고 싶다)
7) 음식물을 트렁크에 저장해서 다닐 수 있다.
8) 빤스가 되었던 속고쟁이가 되었건 뒤 창가에 놔두면
다 마른다. 어디서 빠냐고, 화장실, 호텔..등...
9)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닐 이유가 없다.
10) 가방 보관료가 들지 않는다(그돈이면 주차비가 싸다)
11) 고속도로 안내와 시내 안내 표지판이 매우 훌륭

주의점 :
1) 국제 운전 면허증과
2) 국내 운전 면허증(경력확인용)
3) 국내에서 렌트 계약할 것
(sky pass, 아시아나 카드 사용하면 할인)
4) 스위스는 1년치 고속도로비용 내야함(4만원 정도)
5)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는 수시로 톨비냄
(싫지만, 내야함, 독일 아우토반은 공짜)
6) 지도(유럽 서점에 가면 15000원)와
7) 나침반(도시에 들어가면 방향 감각을 자주 잃음)
- 옆사람이 네비게이터 해도 소용 없을 때가 많다.
8) 스위스는 디젤기름값이 휘발유보다 비싸므로
주변나라에서 넣고 들어가서 나와서 다시 넣는다.
9) 베니스(베네치아)는 차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고
베니스 시 입구에 공용 주차장에 주차비 5만원
베니스 외곽에 호텔에서 자고 공짜 주차 시킨다.
버스 타고 간다. 매우 저렴..
10) 느낀대로 말하면 유럽의 운전자들(특히 이탈리아)
우리보다 더 무식하게 운전한다.
따라서 준법, 방어운전만 하면 아무런 사고 나지 않음.

개인적으로 물어볼 사람은 메일 주시와요..^^!




내용
나서 처음으로 해외에 가 보았다.

상당히 고생스런 여정이었지만, 시야를 넓힐 수 있는 보람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여행중에 이런 일들은 참고로 할 수 있겠다 싶은 것이 몇가지 있었다.

1. 런던 지하철의 경우.
- 런던에 도착, 지하철표를 사면서 매표소에서 ticket을 달라고 했더니
요금이 다소 비쌌다. 이상해서 확인을 해 봤더니 one day ticket이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하루동안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one day ticket을 끊는 것이
경제적이나, 당시 우리는 숙소 찾아갈 필요만 있는 경우여서 one day ticket을
반납하고 보다 싼 one way ticket으로 교환하였다.
- one day ticket를 사서 다니게 되면 버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2. 맥도날드의 경우
- 유럽의 경우는 공중 화장실이 거의 유료이다.
처음에는 돈을 내고 다니다가 나중에는 맥도날드의 화장실을 주로 이용하였다.
- 다니다 보면 음식을 뭘 먹을까가 고심되는데 무난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맥도날드 food였고, 간단하게 시원한 맥주 한잔이 생각나는 때도 맥도날드를
이용하는 것이 경제적이었다.

3. 준비물의 경우

- 숙소마다 뜨거운 물 이용은 무난한 편이어서 햇반과 컵라면은 다소 넉넉히 준비해
가는 것이 좋겠다.
- 고추장(튜브2개면 충분), 구운김도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
- 김치의 경우는 부패가 쉬워서 소량만이 바람직한데, 꼭 필요하다면 농협에서
팩으로 나오는 것이 괜찮아 보이고, 기내식에서 제공되는 것을 챙겨둘 수도 있다.
- 휴지는 호텔이나 맥도날드등에서 구할 수 있어 준비해 갈 필요가 크게 없었다.
- 방수되는 잠바는 비올 경우나 스위스 설산 경우를 생각해서 준비해야 겠다.
- 필름은 생각보다 많이 소요되었다. 최소한 24판짜리 기준으로 10통은 필요하다.
현지에서는 필름값이 국내의 2배이상으로 비싼 경우가 많다.

4. 숙소의 경우
- 숙소 위치에 대한 정보가 대단히 미흡해서 여행사가 제공한 위치도를 보고 찾다가
헤매는 경우가 적지 않아 피곤한 가운데서 원성이 잦았다. 여행사가 제공하는 정보중
신뢰할 만한 것은 주소와 전화번호인듯 하니 현지에서 숙소를 물어보게 되는 경우에는
주소를 먼저 제시하는 것이 좋겠다.
- 여행사가 숙소를 정할 시에 역과 가까운 것을 주안점으로 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현지 첫 숙소의 경우는 타당하게 생각되나, 이후 숙소의 경우에는 대형 슈퍼에
가까운 것을 주안점으로 하는 것이 여행자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겠다.
- 배낭 여행을 하다 보면 육체적으로 상당히 피로를 느끼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숙소의 쾌적함이 심리적으로 중요해졌다. 머물렀던 파리 숙소의 경우는 그것이
너무 미흡하여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5. 독일 열차의 경우
- 뮌헨에서 하이델베르그로 가던 열차가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인근 역에 하차해서 택시로 하이델베르그로 이동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경우에는
택시기사에게 돈을 지불하지 말고 그 기사를 데리고 역 Information으로 가서
역무원에게서 지불받도록 해야 한다.
돈을 지불하고 운전사를 보내야 하는 경우는 일단 영수증은 꼭 받아야 겠고,
역 Information으로 가서 역무원으로부터 택시로 이동하게 된 사유서를 꼭 지급받아
여행사에 제출하면 여행사에서 처리해준다.

6. 스위스의 경우
- 툰호의 유람선은 마냥 타고 있으면 원래 장소로 가겠지 하고 있으면 7시간 이상이
소비된다. 중간 정도인 Spiez정도에서 내려서 Spiez역까지 주위 경관을 즐기면서
산보를 하고서, 돌아오는 배를 이용하는 것이 4시간 정도의 코스로서 좋겠다.
- 별도로 툰호를 유람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경우에는 스위스 입국시 종점역으로
곧장 들어가지 말고, Spiez역에서 내려 유람선부두까지 걸어간 후 돌아오는 배를
타고 인터라켄 west역으로 가는 것도 좋겠다.

7. 국제통화의 경우
- 전화카드는 1만원짜리 2장 정도가 무난하다.
- 이태리의 경우는 공중전화에 동전을 투입한 후 전화카드를 이용해야 한다.



30일간의 유럽여행
파리에서 만난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조회수


1.바게뜨 & 과일파이
원래 밥보다 빵을 좋아하는 나는 그동안 거쳐온 도시에서는
주로 샌드위치를 많이 보았고, 그 안에 들어있는 칠면조고기나
연어슬라이스가 입에 맞지 않아 거의 먹지 않았는데,
파리에서 바게뜨와 과일파이를 맛보고선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긴 바게뜨와 과일파이를 즐겼다.
스위스에선 초콜렛을, 독일에선 맥주를, 프랑스에선 바게뜨에
대해 국가적으로 법적 보호를(?)하고 있다는데 역시 그 맛은
일품이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도 바삭바삭한 겉과 부드러운
속, 적당히 짭짤하고 고소한 맛이란!
과일파이는 거리의 작은 케익하우스나 슈퍼마켓 빵집에서
볼 수 있는데, 생과일이 듬뿍 얹어있어 달콤하고 입에 살살
녹는 빵의 촉감이 끝내준다. ^^
가격도 바게뜨는 1000원 이하고 파이는 2000원 정도라 부담없다.

2.에펠탑
에펠탑을 보지 않고 어찌 파리를 논할 수 있겠냐마는,
솔직히 간접적으로 너무 많이 봐오던 것이라 그런지 기대만큼
황홀하진 않았다. 게다가 한낮에 보면 구릿빛이 역력한
철탑이란 느낌밖에 없어서, 반드시 어두워진 후 조명발을 받는
그 모습을 봐야 비로소 감탄이 나온다. 그 거대한 철탑 앞엔
언제나 관광객들이 붐비고, 키가 큰 흑인들이 엽서,열쇠고리
따위의 기념품을 팔며 한국어를 비롯한 각국의 언어로 사람들을
붙잡아 한 번 쯤 돌아보게 만든다는 것도 기억할 만 하다.

3.metro
여행 내내 느낀 것이지만, 어느 도시에 가도 '지하철'은 참
흥미로웠다. 파리에서 제일 오래 지내서 그런지 지하철에 대한
기억도 여러가진데 애석하게도 일단 지저분하다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역에 들어서면 퀴퀴한 냄새와 여기저기 널린
쓰레기, 낙서가 일단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또 지하철 역이 굉장히 많아서 역 간 거리가 아주 짧고
열차도 서울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개찰구는 좁지만 열차의 문은 매우 크고, 역마다 역입구와
플랫폼, 역이름 모양(디자인)이 가지각색이라 그것만 잘
관찰해도 아주 재미있다. 열차 안의 예술가들도 정말 다양하다.
기타,색소폰,아코디언,팬플룻,클라리넷,바이올린...
하루종일 지하철만 타도 심심하진 않을 것 같다.

4.세느강
내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잊을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선 혼자 우두커니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봐도
다정하게 키스를 하는 연인이 옆에 있어도 외로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고독에 빠져 자살충동을 느끼는 게 더 맞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난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하고 싶다.
세느강에선 누구나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 본연의
고독감도 타향에서의 외로움도 한없이 아름답다.

5.몽마르뜨 언덕
물랑루즈를 비롯한 수많은 클럽과 sex shop이 즐비한 그곳에서,
마치 동네 뒷산 약수터에 오르듯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파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몽마르뜨가 있다. 많은 화가들이
거쳐간 그곳엔 아직도 초상화로 밥벌이를 하는 가난한 화가들이
남아있고,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노천까페가 영업중이다.
소매치기때문에 관광객들의 '요주의 명소'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피해갈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오래된 것이 주는 매력과
파리를 통째로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6.인종전시장
미국에 가보지 못한 나는 그곳이 인종전시장이란 말을 실감해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파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흑인이 너무 많아 놀라기도 했고 아시아계통의 사람도 많아
낯설음이 덜 했던 곳. 여행의 묘미는 바로 이런 다양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7.쇼핑
화장품과 향수, 명품 의류와 악세사리가 가득한 파리는
분명 쇼핑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루이비통과 샤넬 매장에 가면 문 밖까지 줄을 서서 가방을
사려는 검은 머리의 한국인과 일본인을 볼 수 있는데,
놓칠 수 없는 기이한 풍경이다.
(한국인 배낭족을 대상으로 루이비통 아르바이트가
성행하는데 정말 국제적인 망신이 아닐 수 없다)

8.미술관과 박물관,서점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셰 미술관은 그 명성답게 정말 웅장하고
볼 것이 많다. 미술과 역사에 문외한이라 해도 한번쯤 들러
감상해볼 만 하다. 세느강가나 소르본 대학 주변, 퐁피두센터
앞의 가게에선 특별한 느낌의 그림 엽서를 많이 볼 수 있다.
현대적인 느낌의 사진을 담은 사진집이나 팝아트 그림, 영화
서적 등, 잠시 서서 조금만 들춰봐도 꽤나 재미있다.

9.세느강 유람선
바토무슈,바토파리지엥 등 여러 종류의 유람선이 있다.
물론 가격대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지지만 어느 것을 타도
어두워진 세느강을 느끼기엔 모자람이 없을 것 같다.
에펠탑 아래에서 출발하여 세느강을 돌아 오는 유람선에서,
'오~샹젤리제~~♬'하는 노래를 들으며 강바람을 맞는 기분은
시원하고도 여유로웠다.


2001-12-16 04


김영호씨의 일본/중국 여행기


김영호씨의 일본여행기
♠지구는 아직 돌고 있는가?
-후쿠오카 나가사키를 다녀보고-


일본! 참으로 멀고도 가까운 나라이다. 나는 오늘 드디어 마음으로부터 한없이 멀기만 했던 일본을 건너간다. 문명의 이기가 물리적 거리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 놓았건만 마음의 거리는 결코 가까워지지 않음이 나만의 감상(感傷)일까.

91년 8월, 5일 간의 일본 배낭여행이다. 한일공동 승차권이라는 저렴한 티켓을 (당시 부산-하카다 왕복과 나가사키 왕복 열차권 포함이 75,000 원이었다. 최근 알아보니 IMF 이후 취급하지 않는다 함) 구입했다. 굳이 배편을 이용한 것은 나름대로의 뜻이 있었다. 불과 50여년 전 우리의 수많은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고국을 등지고 일본으로 강제 연행된 길이 바로 이 바닷길이었기 때문이다. 한(恨)많은 눈물과 피로 통한(痛恨)의 생을 마감한 불쌍한 우리 조상님들의 원혼( 魂)의 숨결을 깊이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다.

수중익선(배가 속력을 내면 날개의 부력으로 선체가 떠 올라 물의 저항을 극소화 시킨 배)을 선택한 것은 시간 절약상 그랬는데 부산에서 하카다까진 불과 2시간 55분의 거리였다. 정말 빨랐다.

그러나 이 지척간(咫尺間)을 우리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는 당시 부관 연락선에 강제 승선되어 온갖 수모를 다 격으면서 하카다로 그리고 시모노세끼로 거의 하루 내내 배멀리에 시달리시며 송출됐고, 일본 각처의 탄광, 금광, 토목공사(군 비행장 공사, 철도 터널 공사, 험난한 산악 요쇄 만들기...)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최악의 작업현장에 투입되어 혹사(酷使)당하고 죽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 정확한 사망자의 숫자조차 확인되지않고 있다. 아니 그 진상조차 확인할 수도 확인 할 힘도 의지도 없는 부끄러운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님들을 위한 진혼곡을 울리면서 그 길을 따라가 본다.

일제 강점기 동안 그들은 갖가지 수단으로(군수공업동원법을 시작으로, 1938년 4월 '국가 총동원법' - 1939년 '국민징용령' - '노무동원계획' - 1942년 '조선인노동자 활용에 관한 방안' - 조선인 일본본토 도입 알선 요강' - 악명 높은 '조선 노무회' 의 조선인 인간 사냥...) 우리 조상님들을 노무자와 징용으로(총 751만 6,234 명) 바로 오늘 내가 부끄럽게도 편안하게 가고 있는 이 뱃길을 따라 강제 송출한 것이다. (김상웅,'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참조)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라는 표어가 있다. 과연 이 표어가 우리
에게도 합당할까. 나는 단호히 아니다라고 말한다. 용서하는 주체는 강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여 부끄러운 과오를 되풀이 하면서 동시에 강자의 입장에 설 수는 없지 않은가.

하카다 항 주변을 둘러 보면서 부끄럽고 가슴아픈 그 시절을 더듬어본다. 선창(船艙)의 하역장엔 버려진 폐기물들이 여기저기 버려져 있었다. 그 가운데 아직 쓸만한 물건이나 쇠부치가 있어면 주어 모았고, 파도에 떠밀려 와 하얀 모래 사장(沙場)둔덕에 ?어져있는 타다남은 나뭇가지나 숫덩이를 주어 모았다. 가난한 삶을 연명하기 위해서였다. 가엾은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고운 손길들이 오늘날은 저렇게 하얀 파도의 잔물결이되어 와 닿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가슴아프고 부끄러운 통사(痛史)를 되뇌어보는 것은 못난 후손으로서 우리 조상님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내에서는 물론 중국 사활린 싱가폴 말레이시아 보르네오를 포함한 남양군도(南洋群島)의 곳곳에는 가슴에 한(恨)을 안고 생(生)을 마친 불쌍한 우리의 조상님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그야말로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에 자행된 반인륜적인 만행에 의한 참상(慘喪)을 생각하면 현재 밝혀진 역사적 진실은 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하다. 진정한 자존심과 힘을 지닌 자랑스런 후손이 될 때만이 우리의 손으로 위령탑을 세우고 위령제를 올리며 조상님들의 원혼( 魂)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그 출발점은 우리 조상님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히 아는데서 시작될 것이다. 알아야 한다. 정확히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떳떳하고 자랑스런 후손이 되기 위해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점은 너무나 크다. 우선 부끄러운 역사의 전철(轉轍)을 밟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다.

최근에(1999년 7월 17일 자의 일간지와 뉴스) 언론매체를 통해 중요한 역사적 자료 하나가 공개되었다. 그것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을 그린 것이다. 일본인들의 조작과 은폐속에 입으로만 전해져오던 끔찍한 사건이 확인된 것이다. 언젠가는 밝혀지는 역사적 진실일 뿐이지만.

***사건 개요***

이 그림은 관동대지진(1923년 9월 1일) 때 약 6,600명의 무고(無告)한 조선인들을 포악(暴惡)한 만행(蠻行)의 광기(狂氣)로 무참(無慘)히 학살하는 참상(慘狀)을 대형 두루마리에 사실적으로 묘사해놓은 것이다.<일본 화가 '가야하라'가 며칠동안 직접 돌아다니며 목격한 장면들을 옮긴 것이라고 한다.> 지진이 계속되자 간교(奸巧)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가옥에 불을 지르고 다닌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려 남녀노소 구분없이 마구 학살을 자행했다. 일본도를 높이 치켜들고 내리치는가 하면 곤봉을 마구 휘둘러댄다. 죽창으로 목을 찌르는 장면 등이 치(齒)를 떨게 한다. 손을 뒤로 묶어 놓고 불가항력(不可抗力)인 상태에서 노약자는 물론 치마 저고리 차림의 여자와 어린이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장면들이다.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간 분들은 다름아닌 바로 우리들의 조상님들이 아닌가. 이 잔인무도(殘忍無道)한 학살자들 가운데는 제복입은 순사(巡査)는 물론 기모노를 착용한 여자들도 합세하여 미친 듯이 아니 신명난 듯이 대학살을 자행하고있다. 아비규환(阿鼻叫喚)아래 잘린 목이 나딩굴고 시신들이 쌓여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위안부 문제도 그러했지만 이번에 밝혀진 두루마리 그림도 바로 가해자 -원폭 맞은 나가사키-

후쿠오카에서 나가사키행 09시 10분 발 기차를 탓다. 약 2시간 후인
11시 21분에 도착했다. 열차안 분위기는 역시 깔끔하고 조용했다. 잠시
후 도심을 벗어나자 마치 우리 나라의 농촌 마을을 지나듯 시골 전원
풍경이 줄곧 이어졌다. 그러나 이곳은 부자 나라의 현대화된 농경마을임
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농가들은 지붕에 태양열 시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전통 가옥인 조그마한 2층 기와집들도 상당수 눈
에 띤다. 누렇게 물든 벼들이 물결을 이룬다. 풍요로움을 뽐내듯이...

역을 나와보니 마치 조그만 지방 도시에 온 기분이었다. 주위의 경관
이 그러했다. 구릉지대에 형성된 도시였다. 좀 갑갑한 느낌을 받으면서
아니 이런 곳에 원폭을 투하했나 하는 의구심을 갖어본다. 큰 길을 건너
기위해 육교위에 올랐더니 아니 왠 젊은이가 소리없이 다가와 마치 나
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내 코 앞에 서서 지그시 눈을 감더니 뭐라
고 중얼중얼 한 뒤 조그만 부적같은 것을 내밀며 그것을 믿느냐는 것이
다. 관심없다고 하자 다시 한 번 주문을 외더니 자기를 따라하란다. 불
쾌감을 표시하자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하며 물러선다. 처음엔 상
당히 당황했다. 그러나 곧 이해하게 된 것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뭐 이상한 종교단체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YH를 찾아 가다 파출소가 보이기에 들어갔다. 과연 이내들은 얼마나
친절한가 확인도 할 겸 부딪쳐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들어서니 딱 한
명의 경찰만이 책상에 엎드려 뭔가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쓰미마
셍" 이라고 했는데 이 경찰 고개도 안들어보고 손을 들어 흔드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나는 또 한 마디 했다. "excuse me" 아니 이번엔 아예
고개까지 흔드네. 흠, 사람을 쳐다보기나하고 저따위 행동을 하면 좀 따
져 볼 심상도 없지 않았으나 뭔가 중요한 업무를 보는듯하여 그냥 나오
고 말았다. 이것 역시 나에겐 배낭여행을 통해 얻는 소중한 체험중 하나
이기에 마다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긴다고 하고 싶다. 직접 부딪쳐봐야
새로움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비교적 쉽게 찾은 YH에 투숙했다. 하루에 1,900엔 시트 200엔 저녁
식사비 700엔 이었다. 상당히 넓고 큰 규모의 YH이었다. 역시 대부분의
배낭족들은 서양 젊은이들이었다. 이 YH의 도미토리는 남녀관으로 구분
되어 있었다. 저녁 매뉴는 우동이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샤워도 했
다. 라운지에 갔더니 서양 친구들 몇몇이 앉아 TV 시청을 하면서 얘기
를 나누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어울렸다. 그 중 한 명은 스웨
덴 친군데 내가 한국인임을 밝히자 많은 질문을 했다.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관심사는 물가다. 나는 이런 기
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한국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충분한 정보를
주면서 안심하고 여행할 것을 은근히 유도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여행객
에게는 기쁨을 주고 우리 나라 살림엔 보탬을 주는 신나는 일이기 때문
이다. 그는 보통 일 년에 한 번 쯤 세계여행을 한단다. 이번 여행이 일
본 열도와 한반도라는 것이다. 그는 홋카이도에서 쭉 내려 온 것이다.
그리고 배편으로 부산엘 갈 계획이다. 역시 나에겐 빼놓을 수 없는 질문
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행경비 규모와 조달방법이다. 총 비용은
3,500$ 이고 물론 자기가 직접 번다고 했다. 사실 이런 질문을 받는 서
양 젊은이들은 오히려 의아해한다. 나이 18세 이상이되면 스스로 성인이
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동한다. 즉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이
다. 그렇게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필요한 돈은 자신이 벌고 가고 싶은
곳도 자신이 선택한다. 나는 세계의 젊은이들 모습에서 그 나라의 미래
를 점쳐본다. 홀로 서기에 강한 나라들이 예나 지금이나 아니 미래에도
이 지구촌을 이끄는 주도국이 되는가하면 항상 어리광이나 부리는 아니
그렇게 키워왔기에 나약할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이 있는 나라는 지금까
지와같이 미래에도 불평이나 늘어놓으면서 끌려 다니는 신세를 면치 못
할 것을 불을 보듯하다.

다음날 나는 역사의 현장 나가사키 원폭 투하 현장을 찾아갔다. 당시
전쟁놀이에 이성을 잃고 혈안이 되어 무고한 인명을 담보로 세계질서를
마구 뒤흔들고 있던 전쟁광 일본인들의 머리위에 1945년 8월 6일 히로
시마에 이어 8월 9일 두 번째의 원폭을 떨어뜨리고 나서야 두 손을 들
게된(소련의 즉각적인 일본에대한 선전포고가 없었다면 제 3의 원폭을
맞았을련지도 모른다.) 실로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환희의 현장이 아닐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인구 27만 가운데 2만 4천이 현장에서 즉사
하고 생사불명자만도 2천 명이고 부상자가 4만을 넘었다.(참고: 히로시
마 원폭 피해는 약 30만 인구 가운데 7만 8천 명이 현장 즉사하고 부상
자포함 행불자가 5만을 넘었다.) 물론 그 회생자들 가운데 수 만의 우리
의 불쌍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포함된다. 무
능한 조국의 후손임이 죄가되어 강제로 끌려와 뼈가 바스라지도록 혹독
한 노동에 시달리고 또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따라서 진정
한 피해자는 우리임에도 불구하고(사실 나는 이 말을 증오한다. 피해자
이기 이전에 스스로 지키지못한 안일하고 무능함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 그들이 말하는 평화공원에서는 그들의 전쟁범 원흉들의 혼령
을 달랜다는 위령제 준비에 한창이다. 이 얼마나 천인공노할 가증스런
위선의 현장인가. 그들의 양심엔 가해자로서의 뉘우침의 공간이 없다.

일제 강점기에(약 800만 명 강제동원) 불쌍한 우리 조상들에게 인권유린
은 물론 존엄한 생명까지 ?밟는 등 그 잔흑상은 필설로 다 할 수 없다.
비분강개(悲憤慷慨)할 짓들을... 학살(虐殺), 척살(刺殺),분살(焚殺),
아살(餓殺)...
-서양 문물을 받아 들인 관문에 서서-

일찍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그들은 오늘날 서방 선진국 G-7그룹
에서 동양에선 유일하게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체권국으로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위력을 실감케하고 급기야는 유엔
안보리 이사국 자리의 문턱까지 다가가 있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일까.
언제까지 부러움의 시선으로만 봐야할까. 거리를 오가는 많은 일본인들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저들의 외모 어느 구석을
뜯어봐도 우리 보다 잘난데가 없는데, 특히 여자들은 완연한 대조를 이
룬다. 은근히 약도 오르고 시셈도 나고 급기야는 우리 조상님 탓도 해
보는 못난이가 되기도 한다.

간략하게나마 그 배경을 추적해보는 것도 일본 여행에 있어 그 의미
를 더 할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소위 선진국 대열에 낀 나라들의 특
징 중 하나는 외부 지향적 태도가 아닌가 싶다. 선진 문물을 받아들임
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젊은이들의 해외 여행이 적극 장려된 점이 그렇
다. 임진왜란 10년 전인 1582년 일본의 오이따(大分) 항에서는 4명의 청
소년들이 유럽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이들은 로마 바티칸 시국의 교황
도 알현하는 등 그야말로 아직까진 폐쇄된 농경 국가에 불과한 섬나라
치곤 파격적이자 폭넓은 해외 견학을 마치고 8년 만에 귀국한다. 그리고
그들의 초등학생 해외 여행 시작은 메이지 유신 3년 후인 1871년 부터다.
오늘날 세계 곳곳을 누비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그 연장선이다.(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유학자는 1881년에 일본으로 간 서유견문의 저자 구당 유
길준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일본의 청소년들이 유럽 선진국
을 돌아 다니며 앞선 학문과 기술 문명을 배울 때 우리 조선은 어떠했
는가. 서방 선진 문명과는 담을 쌓고 있었다. 대신 향촌 사림이 정치, 사
회, 문화를 주도해 가면서 도덕 문화를 크게 성장시켰으나, 상대적으로
국력은 약화되고 사회가 분열되어 결국 왜란과 호란을 초래하고 만다.

일본은 1543년 최초의 서양 총 한 자루를 포루투칼인으로부터 건네
받는다. 우리 조선은 이보다 30여년 후에 서양총을 구입했다. 문제는 이
와같은 실익을 가져다 주는 서양의 최신 무기를 대하는 양국의 입장차
인데 그 결과는 임란에서의 참담한 패배를 가져왔다. 즉, 일본에선 재빨리
모방하여 반 년이 채 못되어 600자루 이상의 총이 만들어지고 10년 후
에는 30만 자루가 넘었다. 우리는 어떠했는가. 화약내나는 흉칙한 무기
를 영의정 유성룡의 지휘로 어전(御前)에서 시험방포(발사)를 했다하여
유생(儒生) 선비 나리들이 연명 상소를 올리는 등 일대 혼란을 일으키
며 명분쌓기 입씨름으로 세월을 보내고 만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나
라꼴도 어쩜 그 때와 크게 다를게 없다고 생각하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건장한 젊은이들의 해외 여행을 용기와 격려는 커녕 매도의 대상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무한 국제경쟁의 시대에 힘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일환으로 핵무기 실험을 앞다투고 있는 마당에 여전히 우물안 개구리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채 티격태격 서로 잘났다고 너죽고 나죽자며 입방아
씨름이나 하고 있는 꼬락서니가 한심하다 못해 비애감을 감출 수가 없다.
우리 후손들에게 국치(國恥)의 전철을 되밟게하는 이 악순환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

나는 일본 성인(聖人) 순교지를 찾아 보면서 자의든 타의든 서양종
교문화를 받아 들임에 있어서도 일본이 우리 보다 훨씬 앞섰기에 당시
서방의 열강인 포루투칼이나 에스파냐 그리고 네델란드같은 나라들과
교역의 활로를 터고 근대화의 지름길을 달릴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
다. 니시자카(西板) 공원엔 서양종교 금지령에 의하여 1597년 처형당한
26명의 스페인 가톨릭 신부와 일본인 신자가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조각상이 대형 대리석에 조각되어 있다. 이곳은 600여명의 일반 신자들
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순교자 26명은 1862년 로마 교황에 의해 시
성(성인 반열에 오름)되고 그 100주년이 되는 1962년에 비로소 성당과
기념관이 세워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의 천주교 박해도 대단하여 최초의 신자 허균(1610년
선조 때 영의정 허엽의 아들, 저서로 홍길동전. 고산집. 비한정록 등 남
김) 이래로 100년 동안 만 여명이 순교하였지만 1839년 기해박해(헌종
5년), 1866년 병인 대박해(고종 3년) 때 순교한 이들 중에서 1925년에
79위, 1968년에 24위 모두 103위가 시복(준성인)되었고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인 1984년 여의도광장에서 기념 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가졌
다. 깊은 종교적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이와같은 역사성을 갖는 주요한
대행사는 대외에 국가 이미지 향상은 물론 국가에 실익을 가져다 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길준은 일본 미국 등에서 유학하고 귀국길에 유럽 각국을 순방하
면서 만 1년 동안 긴 여행을 통해 부강한 선진국들을 직접 보고 듣고
1885년 12월에 귀국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서유견문(西遊見聞)을 남김
으로서 개화(開化)에 눈을 뜨게 한다. 그 책을 출판하기 위해서 그 엄청
난 원고지 보따리를 들고 일본땅을 들어와야 했다. 1880년대부터 동경
에는 이미 한글 활자를 갖고 있는 인쇄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화에
앞선 일본의 한 단면을 설명하는 것이다.

로프웨이(케이블 카)를 타고 이나사산을 올랐다. 해발 332m의 별로
높지않은 산이었지만 그래도 정상에서 내려다 보면 나가사키의 항구와
먼 앞 바다까지 감상하기엔 안성마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500여년 전
에 일본의 근대화에 주역을 담당했던 서양의 큰 상선들이 저 짙푸른 바
다에 하얀 물꼬리를 메달고 오갔을 모습을 상상하고 음미하는 맛도 싫
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망대 주변에는 식당도 있고 선물 판매 코너도 있다.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많은 꼬맹이들을 인솔하고 올라온
-정적속에 거대한 마그마가 움직인다-

아침에 일어나 앞 뜰을 보니 500cc 급 대형 오토바이 4대가 가지런히 서있다. 왠 오토바이일까 싶어 직원에게 물어 보았다. 지난 밤에 투숙한 일본인 여행객들이란다. 저렇게 좋은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친구들일까 궁금했다. 아니 너무 부러웠다. 기껏 소형 오토바이(125cc. 이하)나 몰고 다녀봤지 저런 대형 오토바이는 그림의 떡에 불과 한 것. 평생에 한 번쯤 저런 오토바이를 타고 대륙횡단을 해보겠다는 멋진 꿈을 지니고 있었으니 오즉했겠는가. 그 꿈은 아직 살아 있다.

마침 한 친구가 부시시 눈을 부비며 로비에 나타났다. 20대 초반의 직장인이다. 친구들과 함께 도코에서 왔단다. 일 주일간의 오토바이 여행을 연례 행사처럼 한다니 이거야 참 기가 죽을 수밖에. 그렇다고 흔히 말하는 졸부의 자식들도 아니었다. 인쇄소에 근무한다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들이었다.

내게 정작 부러운 것은 다른데 있었다.
첫째, 일본의 YH은 그 수에 있어서 우리를 압도한다. (95년 12월 현재: 독일-790개, 일본-390개, 영국-268개, 미국-230개, 프랑스-198개.....한국-23개.) YH의 원조인 독일과 더불어 일찍이 여행문화의 발달은 곧 세계로 뻗는 국력임을 강조한 서양 국가들은 그렇다치고, 후발주자인 일본의 여행문화 발전상은 놀람 그 이상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발전된 여행문화(특히 젊은이를 위한)는 곧 선진국들이 지닌 공통점에 일치한다. 그것은 바로 세계 패권주의다. 그들 세계 강대국 그룹은 자유를 표방하면서 세계사를 편집해왔고 팽창주의와 식민주의를 펼쳐 왔다. 그 작업은 경제력을 앞세워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확장 일로에 있다는 사실이다. 무력감을 감추기 어렵다.
둘째, 자국의 젊은이들이 너무나 편하고 자유스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적은 돈으로 마음껏 여행을 즐기고 인생을 배운다. 그리고 강한 일본의 젊은이가 될 수 있도록 거시적 안목의 사회적 국가적 배려가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국가의 미래와 직결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오후에는 버스를 타고 아바에 있는 1959년에 건립된 동양 최대의 수족관으로 개장한 나가사키 수족관을 ?았다. 옆에 앉은 젊은이에게 말을 걸었다. 영어를 썩 잘 했다. 캐나다에서 공부했고 지금은 교토에서 직장 생활을 한다고 했다. 고향에 다니러 가는 중이란다. 그 친구는 나에게 한국어 배우기가 쉬운지 아닌지를 물었다. 간단히 우리 언어 체계를 설명해 주니 영어 배우기보단 쉬울 것 같다는 말을 하여 우리는 같이 웃었다. 한자 문화권에 속한 나라의 언어는 표의문자(表意文字)인 한자를 많이 쓰기 때문에 급할 땐 필담(筆談)으로 다 통한다는 잇점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목적지에 다다르자 이 친구는 굳이 버스에서 내려 내가 수족관에 입장하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주기 까지 한다. 30여분간 나눈 짭은 대화속에 담긴 호의였다. 동양 최대의 수족관이었다는 명성과 함께 아직도 그 위용을 자랑이라도 하듯 전시 어종의 다양함을 선보이고 있었다.

후쿠오카로 다시 돌아 왔다. 나가사키에서 예약해놓은 YH로 가던 중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 예약 취소 전화를 주고 다시 사우나로 갔다. 우선 YH보다 비싸지 않고 일본인들의 또다른 모습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코 적지않은 규모의 사우나에 상당 수의 이용객들이건만 식당에서나 게임룸에서나 탕내에서는 물론 대형 TV 앞에 모여 있어도 그저 조용조용한 분위기가 그렇다. 우리네와 다른 점 중 하나였다.

텐진 백화점과 다니엘 백화점을 둘러 보았다. 관심이 많은 전자제품 코너부터 구경했다. 다양한 최첨단 전자 제품들을 구경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식당 코너에 갔다. 떡이며 주먹밥(김밥)이며 온갖 먹거리들이 자동화된 기계에 의해 잘도 만들어진다. 회전식 초밥 콘베이어에 시선이 멈춘다. 몇 개 주어 먹었다. 개당 200엔. 생각같아선 다 집어 먹어도 부족할 것만 같은데... 에그 참자 참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이제 번잡한 곳을 약간 벗어나보니 이런저런 생필품을 취급하는 상점들이 많이 눈에 띤다. 철물점, 구멍가계, 가전제품 수리센타 등. 자세히 살펴볼 것도 없이 첫 인상으로 와 닿는 것은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일부러 한 초등학교에 들렀다. 화장실 이용겸 청결 상태를 살피고 싶었기 때문이다. 설마, 혹시, 아마...를 염두에 둔 나는 그 청결함을 보는 순간 그들의 공중도덕 교육의 실천 여부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거리에 있는 일반 공중 화장실도 ?아 보았다. 수도 꼭지, 손 씻는 곳, 화장지 걸어 놓은 것 등 어느 면을 봐도 이상하리만큼 깨끗하다. 마치 결백증 환자들, 혹은 강박성 인격장애자들을 보는 듯 했다. 너무 깨끗하니까. 그런데 나는 나카스 강변에서 내 눈을 의심케하는 현장을 목격한다. 헌 자전거 한 대가 강물 가에 반쯤 잠긴 상태로 버려져 있었다. 그곳을 지나는 많은 행인들의 눈에 띠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방치돼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천연기념물을 보는 희귀한 장면? 아니 명경지수(明鏡止水)에 먹물 한 방울 떨어뜨린 꼴? 아무튼 그들의 완벽성에 가까운 청결과, 공중도덕 의식에도 예외(?)가 있음을 보는 아이러니였다.

텐진 주변의 극장가를 ?았다. 말로만 듣던 성인 극장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포스터를 보고 극장에 걸린 대형 광고 그림을 보니 틀림없는 성인 극장인데, 설마 저건 과장된 그림이겠지,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 매표소를 보니 성인 1600엔 학생 1300엔이라고 적혀 있다. 학생이 보는 것이라면 뭐 그렇고 그런거겠지, 약간의, 아니 큰 실망(?)을 하면서도 그림의 유흑(?)에 이끌려 들어 갔다."?????? 헉! 저건 장난이 아니야!" 아니 이렇수가, 주위를 둘러보니 그야말로


일주일간의 짧은 여행,
일본이라는 큰 나라를 다 보기엔 힘들었다. ----------

가까운 나라, 근데 그리 느낌이 좋지 않은 나라로 나에게 찍혀있던 일본.
우연히, 마음맞는 동료가 있어서, 그냥 가까운 곳에 갈까?에서 시작되어 '가보자'라는 결정을 내렸다.
가기전 6개월부터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날짜가 다가오면서 점점 불안해졌다.
처음 외국을 나가는데, 패키지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배낭여행으로 간다는 것,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라는 사실.. "가야한다. 가야한다.."라는 마음을 강하게 먹으면서 불안함을 잠재우려고 많이 노력했었다.

어쨌건, 간다고 했기에 여행은 가게 되었다.
가장 적은 돈으로, 최대한 많이 보고 부딪히고 느끼고 오자라는 결의를 다지고, 첫날 잠은 오사카 칸사이 국제공항에 내려서 공항내에 대기실에서 잠을 잤다.
밤에 칸사이 국제공항은 한가로웠고, 첨에 잠을 들기가 좀 두렵긴 했으나, 잠이 들고선 그런 건 사라졌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다음날 일찍 씻고, 첫날 여행을 시작하였다.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락커에 짐을 넣어두는 것이었고, 여행의 끝은 언제나 락커에 넣어둔 짐을 꺼내어 숙소로 향하는 것이었다.
첫날 역시 오사카에서 락커에 짐을 넣어두면서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사카성, 호류지, 나라 사슴공원, 덴노지에 있는 스파월드를 들렸었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서.. 그곳을 샅샅이 뒤져보기 보다는 jr pass를 맘껏 사용하면서 일본의 여러곳의 유명한 곳을 둘러보는 것을 계획하였기에, 아직도 오사카의 곳곳을 둘러보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하다.

그리고 둘째날을 위해서 짐을 푼 곳은 오사카에서 jr을 타고 한시간 거리에 있는 '교토'
물론 숙소까지는 교토역에서 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했고, 시간을 최대로 활용하자고 하여서 교토역을 밤에 돌아다니다가 숙소로 들어갔다. 교토역에 대한 느낌은.. 신세대역.. 이라는 것..
우리 나라 어느 역과도 비교가 될 수 없이, 멋있게 지어져있었고, 교토역을 보면서.. 참 거대한 나라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역을 구경한 뒤에 교토 내에 겐쥰진자마라는 곳에 위치한 타니하우스에 가서 일박을 하였다. 일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집이어서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주인 아주머니의 영어 발음은 아직도 생생하다. '핫워또..'

둘째날은 교토를 둘러보았다. 교토는 버스가 정말 잘 발달되어 있기에 하루코스에 맞게 나름대로 작성한 곳을 버스 노선도를 보아가면서 계획대로 보아나갔다. 첨 본 것은 우리 나라말로 금각사.. 일본말로는 긴까구찌..
절의 외형에 금박이.. 첨 입구에 들어서면서 눈에 비치는 금박의 강렬함.. 황홀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 뒤에도 들른 교토의 여러 곳에서 느낀 것은 외형에 참으로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 너무 많이 그런 것을 보니, 웬지 외형적으로 볼 것이 없어도 정적이고 우아한 우리나라의 절들이 보고 싶어지기도 하였다.
교토를 다 본 느낌은 우리 나라의 경주와 비슷하다였다.
일본적이 것이 아주 많은 곳.. 특히 일본의 긴자거리는 잊혀지지 않는다. 서울의 인사동과 같은 것 같은나 더 일본적인 것이 많은 거리. 돈이 많았다면.. 일본적인 물품들을 많이 구입하고 싶었으나..워낙 비싼 물가에 택스까지 붙어서.. 일본에서도 아주 오랜 전통의 우동집에서 우동을 먹고, 간단한 선물을 사서.. 교토에서의 마지막을 보내어야 했다.
참, 그런데 교토는 가장 일본적이면서도 교토역 주변을 보아서는 일본적이 것을 엿볼 수 없는.. 두가지 면을 다가지고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기에 지금도 일본하면.. 주변에 가장 추천하고 싶은 곳이 동경도 오사카도 아닌 교토이고.. 교토라면 또 한 번 가서..곳곳을 둘러보고싶다. 특히, 기요미즈테라에서 비를 맞으며 음악을 감상하던 일은 잊을 수가 없다.

교토를 떠나기는 정말 힘들었다.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계속있고 싶었고.. 정말 jr pass가 아니었다면 몇일 쭉 머물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다음날 동경을 가야한다는 또 다른 설레임으로 jr 야간 열차를 타고 떠나야했다.

떠나기 전 야간열차에 대해서 너무 좋은 말을 많이 들어서인지.. 생각보다 좋진 않았고, 그냥.. 그런 버스였다. 하지만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그냥 새마을 밤기차타고 부산가는 느낌이랄까?
다음날 아침.. 느낀 것은..역시 잠은 편히 자는 게 최고다라는 것.. 아침일찍 동경에 도착해서 동경역 내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하루를 여는 준비를 하였다.
역시 어느때와 다름없이 락커에 짐을 맡겼다. (후에 이 짐 찾느라 너무 고생했다. 동경역이 그렇게 큰 지 몰랐고, 똑같은 곳이 반복되어 있는 줄도 몰랐고.. 거의 한 시간동안.. 역 내를 돌아다니다가.. 결국에 락커 열쇠를 매표소에 있는 직원분께 보여드려서 락커의 위치를 찾아 짐을 찾을 수 있었다..) 동경에 도착했지만, 동경을 돌아보자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동경 주변에 위치한 요꼬하마에 먼저 들렀었다. 물론 숙소는 동경에 잡아두었고(요꼬하마에 마땅한 숙박집을 찾지 못했기에) 요꼬하마는 일본의 분위기는 전혀 볼 수 없었고, 서양의 분위기가 너무 넘처흘렀다.
해변가를 끼고.. 자리하고 있는 공원은 정말 사진에서 많이 보던 서양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고.. 신요꼬하마 역 근처에 위치한 건물들.. 정말 크고, 개성있고.. 멋있었다. 내부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리고 태어나서 첨으로 sea bus를 탔는데.. 바다를 가로질러 가는 기분 정말 시원하고 상쾌하였다.

요코하마를 둘러보면서 하루를 정말 신나게 돌아보고 난뒤.. 동경에 와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은 하꼬네를 갔다.
하꼬네는 작게는 2-3일에서 길게는 1주일도 있을 수 있는 거대한 관광체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24시간 뿐이었기에 좀더 빡세게 하꼬네를 둘러보아야했던게 너무나 아쉽다. 자연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멋있는 관광지로 만들 수 있다니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일본을 다녀와서...(부제:우리나라 고칠 점) -전편 작성일 2000-05-19 07:18:26
작성자 김영호 조회수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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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일본을 다녀와서...(부제:우리나라 고칠 점) ◎작성자:김영호

1. 우리도 일본처럼 지하철에 도착하는 시간표를 붙이자. 시간표가 있으니 차가 언제 올 지 몰라 망연히 거지처럼 기다리는 일은 없었다. 도착시간 1~2분전에 차를 타려고 준비하면 되었다. 또, Bus도 시간표가 있어 참 편리했다. 우리나라는 Bus는 여러 노선이 있고, 게다가 교통소통이 안 되는 것이라 그걸 바라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지하철엔 도착시간표를 부착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돈이 없다느니, 언제 그걸 다 조사하느냐니 관계자들이 입으로 얼버무리고 못하는 척 할 것 같아 그게 걱정이다. 조사자료도 없이 무작정 협정에 임해 쫄딱 망한 한일어업협정처럼 말이다. 조사를 못할 수도 있겠다. 지하철노조가 자주 파업을 해 차가 막 다니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2. 일본엔 교통경찰 찾기가 정말 힘들다. 내가 9일 동안 있는 동안 2명을 본 게 다다. 걔들은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양보를 잘 하고, 성질 더럽게 급하지 아니하고, 빵빵거리지 아니하더라. 내가 외사촌 누나의 차를 타고 다닐 때나, 시외Bus를 타고 다닐 때나 마찬가지더라.
양보를 요구할 땐 수신호로 알리고 차를 움직이고, 남이 양보를 요청하며 차를 움직일 때도 가만히 있다가 그 차가 다 움직이면 제 갈 길을 가더라. 우리나라 같았으면 벌써 빵빵거리고, 십원짜리 많이 날렸을텐데 말이다.

3. 우리나라 여자들 당당하게 담배 피워라.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 않나. 일본여자들은 전철을 기다리면서도, しんかんせん(신깐센)내에서도, T.V에서도-연예인 초청대담 Program- 당당하게 담배를 피운다. 뭐라 하는 작자도 없고, 지도 거리낄게 없이 말이다.
근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꼭 숨어서 담배를 피운다. 집(?)에서 그러던지, 늘 보는 가게-Coffee Shop / Restaurant 등-에서만 그렇게 하니 말이다. 왜 그런지 몰라.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그런가? 시작한지 20년도 안되어서 그런가.

4. 망구 내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여자 중?고생들의 교복 치마를 뻣뻣한 Skirt말고 주름치마로 바꾸었으면 좋겠다. 일본에서 여자 중?고생들의 그런 치마를 입고 다니는 걸 보니 참 예뻤다. 우리 애들은 보면 참 투박한 걸 입고 있다는 걸 느꼈다. 장딴지 굵은 애들이 많은데도.
그라고, 중?고등학교를 다 남녀공학으로 했으면 좋겠다. 각종 예방차원에서 말이다. 어차피 담배를 피우는 애들은 담배를 피우고, 동급생이나 후배를 괴롭히는 애들은 그대로 그 짓거리를 한다. 그래도 남녀공학이면 무언가 조심스럽지 않을까 싶다. T.V에서만 남녀공학하지 말고.

5. 수염 기를 남자들 당당하게 기를려면 기르길!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이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경범죄를 범하는 것도 아니고, 범죄행위도 아니기에. 뭐, 수염이 있어 더럽게 보이고, 불결하다고? 무신 소리. 이게 죄도 아닌데 생난리 피지 마. 그냥 길러 그대로 살면 되지. 혹시 사극 보시오? 본다면 왜 그 더럽고, 불결한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보는지 참 한심하군요. 기르면서 다듬으면 되지 뭐.
수염을 기른다고 해서 머리를 기르는 것도 아니고, 뽕 맞고 다니는 것도 아니지, 대마초 피우는 것도 아니지요. 그렇다고 뇌물수수나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지, 안 그래요? 정치자금 받는 것도 아니고 말야.

6. 일어를 생활속에서 바로 썼으면 좋겠습니다. 가서 말을 해 보고, 들어보니 아주 다릅니다.
○먼저 고쳐야 할 발음
?ぐるま(구루마)-걔들 뜻으로 자동차이다. 근데, 우리는 손수레를 기냥 구루마라고 한다. 안 된다.
?후지야마 - 우리가 후지산이라고 발음하는 것이다. 한자발음과 일어발음을 썩어 신조어를 만들지 않겠다면 후지야마라고 정확히 발음해야 한다.
?오라이 - 영어로 'All Right(좋아요)'인데 일어발음으로 쓰고 있는 일제잔재다. 그냥 '됐어,됐어!'하면 됨.
?리모콘 - 바른말고운말에서도 지적했지만 'Remote Control'을 줄인 발음이므로 '리모컨'이 맞다. 고치자.
?에어콘 - 'Air Conditioner'를 줄인 발음으로 '에어컨'이 맞다.
○쓰지 말아야 할 발음
?다마네기 - '양파'인데 괜히 일제잔재로 쓰고 있다. 발음도 길고. 장사치들이 그렇게 하며 선도하고 있다.
?아다리 - '단수'인데 바둑둘 때나, 무슨 일이 맞아 들어갈 때도 쓰고 있다.
?요지 - '이쑤시개'인데 괜히 씰데없이 식당에서 그렇게 사용하고, 달라는 사람도 그러니 그렇다. 안 되요!
?쓰메끼리 - '손톱깍기'인데 일제잔재로 아직도 쓰고 있는 것이다.

작성자 : 김영호
T : 016-552-4418
E-mail : kim-ho@persmail.com

일본을 다녀와서...(부제:우리나라 고칠 점) -후편 작성일 2000-05-19 07:16:56
작성자 김영호 조회수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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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일본을 다녀와서...(부제:우리나라 고칠 점) ◎작성자:김영호

7. 日本은 자판기 세상이다. 일반 캔 음료부터 맥주캔, 1.5l 음료수, 주간지?월간지, 지하철표?JR표?Bus표, 담배, 건전지, 입장권 등 거의 모든 것을 자판기로 판다. 표파는 사람은 없다. 지하철(전철)에는 다만 교통 안내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자판기 즉, 음료수 파는 것은 거의 모든 곳에 있다. 지하철 기다리는 승강장이나, 동네 모퉁이에도 있다. 근데, 커피자판기는 없다. 캔커피만 먹으라는 것이다. 자판기가 많으니 동네구멍가게는 없다. 동네에는 채소 파는 가게는 있다. 다른 산업생산품들은 큰 Supermarket에서 판다.

8. 한자를 일본애들처럼 약자로 쓰자. 같은 한자문화권이라도 한자를 약자로 쓰니 그게 편하다. 젊은이들이 즉, 한글세대에게 한자를 익숙하게 적응시키기 위해서는 그게 낫다. 정부 부처가 시행하려는 국한문혼용차원에서도 말이다. 간판이나 표지판에 한자 약자를 쓰는 게 낫다. 획수가 일단 적고, 익히기에 편하니까.

9. 한국은 왜 기준시간을 정하지 못하고 쪽바리들 서부지역기준시인 동경 153°에 시간을 맞추어서 살까? 30′~1H정도 차이가 나는데 그 정도 전국 시계 고치는 거야, 쉽지 않나. Summer Time제로 시간 바꾸는 것처럼 시간은 바꾸면 된다.
내가 日本 おおさかし(오오사까시)에 도착하여 시간을 쪽바리들 시간에 맞추어 쓴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시간을 맞추려고 확인해 보니 부산과 시간이 똑같았다. 아니 이럴 수가. 아직도 우리나라가 왜정시대란 말인가. 국사책을 다시 써야 할 것 같다. 정말 큰 치욕이다. 빨리 21세기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시간을 맞추어 씁시다!
우리나라가 세계 3번째로 인공Robot을 만들면 뭐 해. 아직도 우유팩은 전량 수입이고, 게다가 볼펜심도 못 만들어서 전량 수입하니 말이야. 쯧쯧!

10. 한국여자와 일본여자는 비교가 팍팍 된다. 한국여자는 키가 크고, 덩치도 크고, 힘도 세게 생겼다. 화장은 쫌 짙게 하고, 머리핀은 왜그리 신경 사납게 많이 하고, Accessories는 왜 그렇게 다는지 원.
일본여자는 키가 원래 작고, 덩치도 작고, 힘도 없어 보인다. 화장을 옅게 한다. 그리고, 머리는 그냥 Straight로 하고 다닌다. 안 그럼, 염색을 하고 다니는 여자도 가끔 있고.
전반적으로 볼 때 한국여자는 본체 즉, 얼굴과 몸매가 되는데도 너무 자질구레하게 꾸밀려고 생난리다. 日本 여자애들은 그냥 단순화하여 하고 다닌다. 괜히 일본에 다녀와서 여자 보는 눈만 높아졌다.

11. 한반대륙 주위의 바다이름을 빨리 제대로 써야 한다. 제일 중요한 동쪽에 있는 바다를 한국해('The Sea Of Korea')라고 빨리 명명하고 지도에도 표기를 해야 한다. 서쪽에 있는 바다는 그대로 '황해'라고 중국과 얘기해서 표기하면 된다. 남쪽에 있는 것은 정부에서 제시하는 대로 그대로 '다도해'라고 해야 한다.
일본은 벌써 'The Sea Of Japan'이라고 표기하면서 영국지도에까지 표기해 놓고 있다. 우리나라는 왜 이러는 거야. 21세기를 똑바로 준비하는 거야, 뭐야.!
일기예보가 제일 문제이다. 동해/서해/남해라 그래 해 싸니 멍청한 국민들은 다 그게 그것인 줄 알고 있다. 우리나라도 한번 잘 살아 보자구요. 빨리 무식한 일기예보관들이 정신 차리고, 한국해/황해/다도해라 발음하고 화면에 표시하면 된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는가. Y2K도 아닌데 말이야.
우리나라 News가 C.N.N하고 日本 방송에 가끔 인용되는 것을 본다. 아직도 우리가 동해/서해/남해라고 하면 뭐하나. 거지같이. 중공이 옛날 백두산(떼놈들은 장백산이라 한다.)에 괴물이 있다고 뻥을 까고는 세계에 정확한 지점을 알려준다면서 지도에 백두산 반까지 선을 그어 내보내지 않았던가. 그리곤, 백두산 반을 땅따먹기 성공했다. 그리곤, 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관광장사를 하고 있다.


작성자 :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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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 kim-ho@persmail.com

일본 배낭여행 다녀와서.. 작성일 2001-01-10 15:18:19
작성자 garlic6 조회수 633
첨부화일

일본배낭여행다니면서 느낀점이 몇가지 있어서 함 적어볼라구 합니다.
전 지난 여름에 다녀왔습니다. 친구랑 둘이서.
비록 7박8일간의 짧은 배낭여행이었지만 유명한 도시는
다 돌아봤습니다. 후쿠오카,오사카,나라,쿄토,도쿄..등등
배낭패키지로 가서 교통, 숙박은 미리 예약을 했고,
관광지와 역등은 주위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지도보면서 다녔는데, 비교적 편하고 진~짜 잼었습니다..

비록 짧은 일정이었지만, 첫 해외여행에서 참 나름대로
많은것을 느끼고 배웠기에 일본배낭여행가시는 분들께
쫌이나마 돔이 될까해서 글을 남깁니다.

1. 일어를 못해도 된다..
그렇다고 영어를 해야할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간단한 영어회화.)
대부분의 일본사람이 영어를 못하기때문에
해도 못알아듣습니다. 버스라구하면 절대 못알아
듣습니다.발음하기 조금 민망하더라도 꼭 빠-스라구
해야합니다. ㅡ.ㅡ
일본다니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길을 물어봤지만,
영어 잘하는 사람은 딱 2명뿐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다녔을까..
그냥 지도보고 다녔습니다.. ㅡ.ㅡv
지도만 봐도 다 압니다..
특히 교토의 지도는 진짜 자세한 설명에 알아보기도 쉽게
되있어, 교툐에서는 길을 물어본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교토는 도시가 좀 작은데, 지도를 보면 교토의 특징있는
건물들의 모양이 똑같이 그려져있습니다. ^^
그래서 그 지도를 보고 좀 가다가 지도에 그려있는
건물을 찾아보면 진짜로 그 그림과 똑같은 건물이 떡하니
있습니다. 정말 잼슴다.^^ 그래서 찾아다니기가 편합니
다. 글구 버스노선이 알아보기 쉽게 나와있어서
버스타기도 편합니다.
이 지도는 교토역에 있는 여행안내소에서 받았습니다.
(아! 이 여행안내소에 있는 사람은 그래도
약간의 영어가 가능합니다. 일단 어느 도시에 도착하면
여행안내소에서 지도를 구하고, 거기있는 사람한테
유명한 곳을 물어봅니다. 그리고 다른 도시로 갈때 탈
기차시간등을 미리 알아둡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 맞게
돌아다니다가 다시 역으로 돌아오면 되죠.
핫.넘 당연한 얘기인가?! ^^;;)

제가 일본에서 한 일어는 딱 세마디 뿐이었습니다.
"쓰미마셍","아리가또 고자이마쓰"," ~에끼"..
(일어로 어떻게 쓰는지도 모릅니다.. ㅡ.ㅡ)
쓰미마셍은 뭐 물어보기전에 예의상..(Excuse me..)
뭐 물어보고 난다음에 아리가또고자이마쓰.(Thank you..)
글구 에끼는 "역"이란 의미입니다.
왜.동경의 지하철이 엄청 복잡하다고 하잖아요.
근데 걱정할거 없습니다. 일단 열차타는데 보면 울나랑
똑같이 지하철 표 넣는데가 있구, 꼭 옆에 사람(직원)이
있습니다. 그럼 거기가서 쓰미마셍. 글구 원하는 역.
만약 내가 도쿄역에 간다면 "도쿄에끼"라구말하면(물론
앞뒤로 영으를 붙여서 "I want to go to ~ Where~ 어쩌구
저쩌구~ 물어보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귀찮고. 또 어차피
그 앞부분은 못알아듣는듯 싶어서 걍 "도쿄에끼"했습니다. ^^;;) 번호를 말해줍니다. 왜 울나라 역에도 1번홈.2번홈. 그런게 있잖아요. 그런게 일본에도 있습니다. 그럼
번호 말해주면 그 번호 찾아서 그쪽으로 나가면 열차시간표
가 있습니다. 거기보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이 몇시에 오는지 나와있습니다. 그렇게
물어보고 타면 어려울거 하나도 없고,
오히려 울나라보다 안복잡합니다..

2. 여름엔 가면 안된다. ㅡ.ㅡ;;
여름에 갔다가 죽을뻔했습니다.
다행히 저희가 갔을때는 비가 안왔지만 원래 일본이 여름
엔 비가 많이오고 습기가 많아서 찐덕찐덕한것이..
정말 짜증난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습기가 안높아도
짜증입니다. 정말 덥거든요. 비는 한번도 안왔지만
정말정말 더웠습니다. 그래서 더워서 고생을 좀 했습니다.
하루종일 목이 말라 음료수를 달고 살았습니다.
자판기만보면 음료수를 뽑아먹었죠.(물통가지구 다니려구
두 했지만 가방이 무거워서 ㅡ.ㅡ 잠도 제대로 못자고
맨날 돌아다니다 보니깐 피곤해서 별로 무겁지 않은 가방도 무겁게 느껴지더라구요..) 음료수를 너무 많이
먹으니깐 배가 불러서 밥도 안먹게 되었습니다. 밥값이
비싸기도 했지만,(그래도 하루동안 마신 음료수값 다
모으면 밥 사먹을정도의 돈이 되긴 했죠.) 정말로 물을
많이 마시고, 글구 더우니까 입맛이 없더라구요.
덕분에 일본에 음료수 자판기에서 파는 음료수 종류는
거진 다 먹어본듯..^^;;(아쿠아리우스인가?!그거 맛있어요
오렌지 주스는 디자인만 이쁘지 맛은 영~ ㅡ.ㅡa)

3. 패스트푸드점에서 음료수 리필이 안된다.
정말 치사하지 않습니까? ㅡ.ㅡ 버거킹이랑 웬디스
갔었는데, 리필이 안된다구 하더군요..

4. 일본사람은 영어를 못한다.. ㅡ.ㅡ
아까도 얘기했지만 버스.. 못알아듣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ㅡ.ㅡ 글구 일본에서 롯데리아에도
갔었는데, 쉬림프 버거라구 했는데 치즈버거 나오더군요.. ㅡ.ㅡ

5. 여자들은 다 치마만 입는다.. ㅡ.ㅡ
일본에서 7박8일있는동안 반바지 입은 여자는 한명도
못봤습니다. 진짜 핫팬츠같은거 말구, 울나라 대학생들이
많이 입는 면 반바지같은거입은사람 보면..다 울나라
관광객or유학생들입니다.. ㅡ.ㅡ 거의다 치마를 입고
다니구, 바지는 9부나 7부바지, 아니면 청바지(디자인이 특
이한거.평범한건 못봤음)를 입지, 면바지종류 입은거
본적이 없습니다. 저랑 제친구는 걍 평범하게(?) 티에
면반바지 입고다녔는데, 여자가 우리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은건 초딩뿐이 없더군요(남자는 잘 몰겠음)
글구 저 앞의 어떤글을 보니 일본 여자들이 수수하다고
하던데 별로 안그렇습니다. 특히 동경에 있는 여자들은
다덜 옷이 화려하구 화장은 펄이 장난 아닙니다.
저는 일본에서 젤 유행한다는 화장품을 1개 사왔는데,
일본에서 볼땐 별로 안그랬는데,
울 나라오니까 넘 튀더군요. ㅡ.ㅡ
제 친구들이 이걸 어케하구 다니냐구 하더라구요.
여기까지가 일본 여행 I편입니다


이상용씨의 일본 동경-하코네-닛코 4일 단체여행

2001년 4월5일(목) 식목일

신공항 인천공항에서 8시 40분 미팅예정이다. 새벽잠을 깨워 안사람과 아이 셋과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서두른 탓에 막히지 않고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다시 탈 때 잊지않게
주차장번호와 버스 승강장 번호를 외워가며.. 장기 주차장은 한달간 무료운영한단다.
공항을 여기 저기 구경하며 시간을 때우다 늦지않게 만남의 장소로 갔는데 9시가 되어도 가이드를 만나질 못했다. 점점불안해졌다. 품격있게 ㅋ여행사로 결정했더니 가이드에게 내 핸드폰전화번호도 가르쳐 주지 않았나 보다. 9시 20분쯤 겨우 가이드 만나고. 우리가 여행사 깃발을 제대로 보지 못한탓이었다. 괜히 가이드에게 짜증내고..
10시 반쯤 UA 항공으로 출발 1시간 50여분 비행. 공항 도착전 30여분전에 지상에서 원추모양으로 비죽이 치솟은 후지산의 모습에 모두 탄성을 질렀다.
일본 동경 나리타 공항에 도착.
3개 여행사 연합이란다, 비행기도 아시아나, KAL.UA 3편. 먼저 온사람들은 1시간30분여를 기다렸다며 짜증을내고 가이드가 정신없이 수습하고.인원도 32명이나 된다.
대형버스에 올라타고 공항을 출발하여 점심식사(일본식 부페)후 동경을 관통하여 가와구치호수근처로 이동했다.
호텔에 들고. 첫날은 관광도 없고 출발과 도착뿐이다.
호텔에서 유카타로 갈아입고 저녁식사후 호텔내의 목욕탕에서 온천욕을 했다. 아이들에게 유카타를 입혀 놓으니 너무 이쁘다. 밤엔 호텔 근처에서 편의점을 찾아 돌아다니고..

4월 6일(금)

아침일찍 출발하여 가와구치호수로 이동했다. 호수에 비친 후지산의 장관을 배경으로 사진 잠깐찍고.
하코네로 이동. 오와꾸다니 계곡. 아직도 화산활동으로 온천유황물이 펑펑 쏟아져나오고 계곡엔 하얀 김이 뭉게뭉게 뿜어져나온다. 건너편에 눈으로 화장한 후지산이 너무도 맑은 날씨속에 솟아 절경을 이루고있다. 후지산을 볼 수 있는 확률은 30%정도란다. 고산지대라 날씨변화가 무상하단다.
오솔길을 따라 계곡으로 올라 부글부글 끓어올라오는 용암천을 바라보니
유황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 물로 삶은 유황계란을 사서 맛보고 이지역에서 나오는 고산우유를 한컵(우유한컵이 200엔이니 2200원이다)사서 5명이 한모금씩 돌아가며 마시고 역시 고산우유로 만든 아이스크림도 먹어봤다.
다시 버스를 타고 후지산을 끼고 돌면서 이시호수(발모양으로 생겨서 이시호수란다)로 내려갔다.
후지산의 분화활동으로 생긴 자연호수엔 해선적모양의 유람선이 다닌다.유람선을 타고 건너 선착장까지 도착하여 다시 버스를 타고 동경으로 돌아왔다.
동경으로 귀환하여 메이지 천황을 모신 명치신궁을 관람하고 시내의 전자상가가 모인 아까하바라를 구경했다.
오늘의 숙소는 도쿄돔호텔이란다. 도쿄돔의 바로 옆에 위치한 특급호텔.
도쿄돔은 Big egg란 애칭답게 햐얀천같은 느낌의 천장으로 돔을 이뤘다.호텔에 여장을 풀고 .
도쿄의 지하철을 타보기로 하였다. 도쿄돔의 야경을 따라 지하철역으로 가서 남들하는것보면서 자동티겟 발매기에 동전을 넣고 티켓을 빼서 이이들과
몇 번이고 되돌아 오는 길을 되집어 보며 전철탑승. 일본인들답게 지하철내에서 책을 보는사람들이 무척많다.
막내 우형이가 곧장 잘 것 같아 6정거장 걸리는 긴자보다는 3정거장으로 가까운 이켄보쿠로 역으로 가기로하였다.
이켄보쿠로는 동경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길목의 번화가이다.세부 백화점을 나와 시내에서 돌아다녔다.
치마 짧은 교복여학생과 무척 긴굽을 신은 젊은 여자들.거리 곳곳에서 꺼리김없이 담배를 피워문 여자들..
100엔 하우스(우리의 천냥하우스)도 구경하고.요즘 일본의 경기가 바닥을 치면서 새로 유행하는 상점이란다
되돌아 오는 길엔 지하철 티켓대신 JR선 티켓을 잘못끊어 지하철 안내창구에서 짧은 영어로 환불받기도하고.
도쿄돔 근처엔 밤 깊은줄 모르고 끼리끼리 모여 춤판을 벌리는 남,여학생들도 많았고 노숙자들도 많았다.
인력시장이 서는지 허름한 차림의 노무자들이 떼지어 줄서있는 모습도 보였다.

4월7일(토)

고속도로가 막힐걸 염려해서 서두르는 가이드에 맞춰 8시 반출발 닛코까진 편도 3시간 걸린단다.
닛코도 산악지대 국립공원이다. 닛코를 보지않고 일본을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단다.
그래서 일정을 택할 때 아이들이 있슴에도 불구하고 자유일정이 있어 디즈니랜드를 가기보다 닛코 관광을 택했다.
동조궁은 도쿠가와이예야스를 모신곳. 그의 무덤도 있단다.삼나무가 곧게 울창히 뻗은 길을지나 입구에 들어서면서 마굿간을 지나자 그곳에 유명한 원숭이 세 마리의 현판이 있다.
눈을 가린, 귀를 막은,입을 막은 원숭이 세 마리."악한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뜻이란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하루를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는 아름다운 문을 감상하고 도쿠가와가 실제 사용한 가마를 보고 안까지 구경하였다.
그곳에서 일본신부와 외국인 신랑이 결혼하는 것도 잠시 지켜보았다.천정에 용을그린 곳에서 막대기를 서로 때려 이상한 울림현상을 용울음소리라고 들려주기도 한다.
동조궁을 나와 남체산을 낀 주젠지호수를 구경하고 이 호수에서 쏟아지는 100m높이의 계곤폭포를 보러 갔다.
폭포아래쪽으로 절벽속에 엘리베이트를 설치하여 이를 타고 내려가 폭포를 올려다 본다. 엘리베이트가 내려가는 동굴은 습기와 한기가 느껴진다.
100여미터를 내리뻗는 계곤폭포는 정말 장관이다.
닛코를 떠나 내려오는 고갯길은 정말 장난이 아닐 정도로 험준하다.대형버스는 커버길에서 수시로 후진을 하여야 턴을 할수있을 정도다.한구비 구비마다 숫자를 적어놓았고 일본 글을 적어놓았다. 합하면 어떤 글이 완성된다한다. 고갯길을 무사히 내려온 버스기사에게 모두들 박수를 쳐줬다.
다시 동경으로 귀환하여 신도청 전망대를 갔다.
48층의 도심의 쌍둥이 건물이 동경도청이다. 이 건물의 제일 꼭대기층에서 해어스럼에 동경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보는 관경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명치신궁도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일본의 핵심부를 유감없이 보라고 도청에서 무료로 개방한 장소라고한다.
신주쿠.동경의 핵심 다운타운.저녁전까지 1시간여의 자유시간.
젊은이들의 약속장소로 유명한 Alt Studio를 잠시 구경했다. 각가지 염색을 한 젊은이들로 붐비는 가운데 스스럼없이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친구를 기다리는 젊은여자들도 많이보인다.
노천에서 파는 과일도 시식했다. 큼직한 딸기3개 또는 메론을 꼬치에 끼워 200엔씩에 판다.
저녁먹고 또 자유시간.. 도쿄의 마지막 밤이 저문다.

4월8일(일)

도쿄돔이 보이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짐을 전부 버스에 실었다.
황거는 현재 일왕이 사는 곳이다. 옛날 성 같이 물이 흐르는 해자에 둘러싸여 요새같은 장소에 있다. 소나무 조경이 잘된 광장을 지나 자갈길을 따라 조금가면 정문이 나온다.
이중교라해서 다리 두 개가 보이고 거기까지이다. 더 이상은 일반인이 들어갈수없단다. 천황도 행사가 있을 때 거기까지만 나와 일반 백성을 맞는다.
2시간여 거리인 나리타공항으로 일찌감치 출발.
아쉬운 여정을 마쳤다.

후기
동경은 서울도 너무도 닮았다.아니 서울이 동경을 닮은것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해외여행을 두가지로 크게 나눈다. 관광과 휴양
지난번 필리핀 세부가 휴양이었다면 이번 일본 동경여행은 오로지 관광이다.
필리핀 세부 여행에서 재미있게 잘 지내주었던 4살(만 3살)짜리 아이가 이번 여행에서는 많이 힘들어했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나라로 치면 대전쯤 내려 하루는 광주가서 구경하고 대전으로 왔다가
다음날은 다시 서울쯤가서 구경하고 다시 귀환하는 코스이니 버스타는 시간이 너무 많아 다들 지쳤다.
하지만 자주 가기힘든 해외단체여행의 일정이니 어쩔수없었다.
만약 우리 같은 가족여행이라면 하루쯤 자유일정이 있는 상품을 골라 디즈니랜드 가기를 추천하고싶다.


김왕기씨의 중국 여행기.
[ 2001-10-17 ] 중국을 다녀와서 ......


◈서론◈
참고적으로 제가 간곳은 이렇습니다.
베이징-상하이-수저우-항저우-시안-러양-내몽고-베이징.
우선 내가 본 중국에 대해 조금 말을 해볼까 한다. 우리 나라가 정말 좁은 땅 덩어리 라는 것을 이번에 중국에 다녀와서 알게 되었다. 정말 지도에서만 크다고 했던 그런 중국을 한 번 경험을 해보니 이게 정말 중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나라의 약 50배가된다는 중국을 직접 경험을 하고 오니 이제는 중국이 얼마나 큰 나라인줄 알았다. 그리고 또 하나 놀랜 것은 중국의 인구였다. 13억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중국의 인구 13억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본 중국인들은 인구 얘기를 하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그 정도로 중국인들도 인구가 많다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걸 느꼈다. 그리고 자녀정책으로는 자녀를 1명 이상을 낳으면 그것에 대해 부과되는 벌금 또한 어마어마하고 또한 처벌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럼 이런 큰 두 가지 내용 속에서 좀더 세세한 중국인들의 문화를 조금 말해볼까 한다.

◈본론◈
중국의 문화는 우리 나라와 조금은 비슷하지만 사뭇 다른 문화들을 볼 수 있었다. 그중 몇 가지만 나열해 보도록 하겠다.

1. 자전거문화
도시나 경제가 발달하여 오토바이가 더 보편화 되어가는 것 같았다. 길이 가파른 일부 도시를 제외하면 중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자전거이다. 자전거는 '중국서민의 발'이 되고 있다. 내가 본 바로는 자전거가 없는 중국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전거가 많이 있고, 자전거를 위한 자전거도로와 자전거 신호등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중국 사람이 자전거를 많이 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대중교통 수단의 낙후성과 중국인들의 경제수준 (차를 구입하기에는 역부족)의 뒤 처짐, 그리고 평탄한 지형 등을 중국인들은 말하고 있다. 그 정도로 중국에는 평평한 지형이 많이 있다.
그러나 북경 같이 좋은 도로기반시설을 갖춘 도시에서도 출퇴근 시간에는 자전거 때문에 거리 질서가 혼란하며, 게다가 교통 질서의식이 부족하여 교통사고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소득수준이 증가하여 차량소유가 날로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머지 않아 주요도시의 거리는 자동차로 교통체증이 심화될 것으로 저는 감히 예감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의 중국은 자전거, 자동차, 그리고 사람이 함께 도로에서 나란히 걷고 달리고 있는데 일부 지방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조금씩 금지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중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교통문화가 올바로 정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차 문화
중국인은 하루도 차 없이는 못 사는 민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벌써 4천년의 역사를 가지며 어느 공공장소에 가더라도 차 잎만 있으면 언제든지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끓는 물이 준비되어 있다. 하다 못해 음식점에 들어가도 물대신 차를 준다.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중국인이 기름기 많은 음식을 많이 먹는데도 살이 찐 사람을 많이 볼 수 없는 것은 차를 마셔 단백질과 지방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우리 나라를 포함하여 동남아에서도 차를 마시는 인구가 계속 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차가 지방을 감소시켜 준다고 해서 살이 찐 사람이 적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차가 물론 지방을 감소시켜준다고는 하지만 중국인의 생활 자체가 자전거문화 그리고 걷는 문화도 살이 찐 인구를 줄이는 것의 한몫을 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중국의 차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 또한 중국지역을 이동하다 보면 기타의 서비스는 수준 이하지만 뜨거운 찻물을 제공하는 서비스만큼은 수준 급이라고 느꼈다. 아무리 작고 후미진 곳을 가도 더운 찻물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는 중국인들의 식생활과 건조한 대륙의 공기나 날씨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겠지만 어쨌든 현대 중국인들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바로 차(茶)라고 볼 수 있겠다.
차의 종류는 綠茶와 紅茶, 靑茶, 白茶, 花茶 등으로 구분되고 북부지방에서는 화차, 남쪽에서는 녹차나 홍차를 많이 마시고 있다. 중국의 차 문화는 일본과 우리 나라의 차 문화(茶道)와는 달리 생활의 일부로서 자리하여 서민들의 삶 속에서는 오히려 수분공급을 위한 음료수 대용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 하다.
녹차(綠茶)는 중국의 차가운데 역사가 가장 길며, 생산량이 많고 품종이 다양하다고 한다. 녹차 중의 명차는 서호 용정차 (西湖龍井茶), 항주 벽라춘차 (杭州碧螺春茶), 우화차 (雨花茶), 太平 候魁茶, 君山 銀針茶, 黃山 毛峯茶, 盧山 雲務茶 등 약 90여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용정차 만이 볼 수 있었다.
홍차 (紅茶)는 중국 국내 총생산의 1/4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수출량은 총 수출량의 1/2를 차지한다고 한다. 홍차 중의 명 차는 기(祁) 홍차, 기(淇) 홍차, 영(英) 홍차이다. 분말형과 엽차형이 있으며, 엽차형은 중국 특산이며 茶 이름이 '紅' 字로 끝나는 것은 모두 紅茶이다.
중국의 차 문화는 식사시, 회의 시,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우리들이 물 마시는 것과 동일하다. 별도의 특별한 예의를 요하지 않으나 상대방의 잔에 물이 빌 경우 계속 따라주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와 함께 식사를 했던 중국인들은 계속해서 내 잔을 확인하고 차를 따라주고 그런 것 같다. 종업원들도 계속 돌아다니며 차를 따라주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3. 의복문화
중국에는 약 50개 이상의 소수민족과 다수민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한족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은 대부분 전통의상을 입고 생활한다. 지역에 따라 또는 경제적 수준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소수 민족 여자들은 대부분 민족의 전통의상을 입고 장식을 단체 생활을 하며 남자들은 평상복을 많이 입는 것이 일반적이다. 운남, 귀주, 내몽고, 등을 가면 다양한 소수 민족의상을 볼 수 있으며 이 때문에 한족과는 더욱 확연히 구분된다. 정말로 내몽고를 갔을 때 사람들이 거의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다. 우리들을 위해서 공연을 하려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우리들을 반겼다. 하지만 너무 추워서 공연시간 외엔 전통의상 위에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지역과 민족의 특성에 따라 의복구조는 천태만상이나 그 중 전통적으로 중국복장을 대변하는 것이 치파오 (旗袍)와 중산푸 (中山服)가 있다. 요즘 들어서는 대도시에 가더라도 전통의상을 시내 한복판에서 보기는 쉽지가 않다. 그저 큰 식당의 종업원들만이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것을 봤다. 이제는 서구사회의 문물들이 들어와서 그런지 서구인들의 생활을 닮아 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4. 중국의 방언
중국의 방언(方言)은 통상 北方方話(官話), 扈方言(上海말이 대표), 湘方言(湖南語), 方言, 客家方言, 方言(福建語), 方言(廣東語)의 7종으로 크게 나눠 七大方言이라 칭하고 있다.

@다음은 내가 느낀 중국의 여러 가지를 말해 볼까 한다.@

1.날씨
우리 나라랑 비슷했다. 북경의 날씨는 우리 나라와 거의 흡사했다. 하지만 중국이 조금 더 더운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상해나 항저우, 수저우 쪽으로 갈수록 바다와 가까워서 습기 때문에 땀은 정말 멈추질 않았다. 하지만 몽고 쪽으로 가면 바다와 멀고 사막과 가까워서 햇빛은 엄청 강했지만 땀은 별로 흐르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 느끼지 못한 그런 더위였다
또한 중국의 공기는 정말 안 좋았다. 나는 기차를 타러 가면서 기차역의 추억은 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중국말로 기차를 화차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까지 석탄을 연료로 기차가 간다. 때문에 기차 안은 엄청 덥고 기차 창문을 열면 석탄냄새가 난다.

2.치안
여자들은 북경이 중국에서 천국이라고 하더군요. 다른 지방은 치안이 너무 안 좋아서 나온 소리다. 그러나 나는 무슨 도둑이나 강도를 본적이 없다. 다만 기차 안에서 한 번 소매치기를 당해서 우리 나라에 다시는 오지 못 할 뻔한 적이 한 번 있었다.
북경은 공안도 많고 치안이 참 잘 되어 있습니다. 중국은 어딜 가도 공안들이 있다. 그들이 치안을 담당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공안들이 군데군데 있어서 그런지 길도 물어보고 조금은 안심하고 여행을 할 수 있었다.

3.주의할점
정말 소매치기는 조심해야할 것 같다. 아무리 공안들이 많다고 해도 주의해야 할 곳은 기차이다. 나도 한 번 경험을 했다. 기차에서 자고 있는데 창 밖에서 소매치가가 내 가방을 들고 달아나려다가 내가 잡은 일이 있었다. 기차 안에서의 치안은 조금 무방비상태였다.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조금 화를 내면 그 사람들이 나중에 원한을 품고 다시 덤빈다는 소리도 들었다. 아무튼 조심하는 게 최고 일 것이다

4.언어
중국에서는 거의 중국말만 쓰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어를 믿고 중국을 가는 사람이 있으면 한 50%는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 정도로 중국인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적다. 심지어 대학 근처에서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호텔이나 젊은 사람들은 영어를 조금씩 할 줄 안다. 하지만 중국인들을 내가 이상하게 여긴 건 외국인들에게는 엄청나게 친절하고 또 관심도 많이 갖는다. 길을 물을 때도 영어로 물어보면 말이 안통해도 지도를 보고 알려주는데 중국말로 하면 그냥 손가락 짓만 하고 만다. 그런 것을 몇 번이나 경험을 했다. 여기서 느낀 건 그래도 중국에 가려면 중국어공부를 많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5.중국 사람들의 특징(내가 느낀)
우리 나라도 불친절하다고 소문이 나있지만, 중국을 가니 .할 말 없게 만든다. 상점에서 물건 살 때 정말 충격 받았다. 돈을 꼬질꼬질 한 것으로 확 던져 버리더군. 정말 충격이었음. 우리 나라에서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정말 공손하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많이 다른 것 같다. 마치 호텔 종업원이 왕인 듯 그렇게 행동한다. 갈 테면 가라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한 것 같다. 우리 나라에서도 똑같지 않은가 외국인들한테 불친절하고 바가지 씌우는 그런 사람들 꼭 있다. 내가 만난 중국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친절한 것 같다. 길을 알려달라고 하면 일부러 자신이 직접 압장을 서서 그곳까지 데려다 주곤 했다. 그리고 중국사람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느긋할 땐 느긋하고 빠를 땐 정말 빠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사람들과 사업을 할 때 느긋한 맘으로 사업을 하라는 말도 있다. 또한 처리 할 일이 많으면 정말 빠르게 한다는 것도 느꼈다.

6.시민질서
정말 재미있는 나라이다. 4차선 도로에서 사람들이 무단횡단을 그냥 하고 다 지나간다. 지하보도 있지만 지하도로 가는 사람들을 지하철 타러 가는 사람 몇몇과 양심 있는 중국인 그리고 외국인이다. 정말 자동차, 사람, 자전거가 무법천지인 도로를 함께 걸어가고 다니고 있다. 나도 몇 일은 적응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한 며칠 있으니까 나도 적응해서 자전거, 자동차 사이를 막 사이사이 지나갔다. 횡단보도는 있다. 하지만 그건 있으나 마나한 것 같다. 그리고 횡단보도도 다 지워져서 보일랑 말랑 한다. 정말 교통의식은 후진국 수준이다.

7.물가
중국의 물가는 수시로 잘 변하는 것 같다. 중국은 모든 지역이 물가가 다르다. 이점은 확실하다고 느꼈다. 또한 같은 중국 안에서도 조금 외곽 쪽으로 나가면 약간 싸다 고 느낄 것이다.
북경은 식당에서만 빼고 모든 물건을 살 때 다 깎으라고 사람들이 얘기들 하던데 그 얘기도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중국을 간다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작년에 갔다온 사람들이 벌써 환율이 그렇게나 되냐고 하면서 놀랜 적이 있었다. 내가 중국에 가서 진짜로 느낀 건 얼마 안 있으면 우리 나라보다도 훨씬 물가가 비싸지리 라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물 값이라든가 옷값 등등은 우리 나라와 같던지 아님 조금 비싼 편이다. 그리고 얼마 전 베이징올림픽이 결정되고 나서는 정말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는 것 같았다. 이제 조금 잘산다고 느꼈을까 정말 1~2년 뒤에는 우리 나라와 물가가 거의 같아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8.음식
음식은 정말 기름기가 철철 넘친다. 모든 음식을 기름으로 튀기고 찌고 비비고 정말 느끼해서 먹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중국인들은 느끼한 음식을 먹는다. 또 거기에다가 넣어서 먹는 식물이 있는데 그걸 '향채' 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사람들의 입맛에 절대 맞지 않는다. 한국인은 절대 먹지 못 할거라고 생각을 아직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잘만 고르면 한국에서의 음식과 거의 비슷한 것이 많이 있다. 중국에서는 네발 달린 건 책상만 빼고 다 먹는다는 말과 바다 속에서 나는 것은 잠수함만 빼고 다 먹는단다. 이 정도로 중국에서의 음식은 엄청나게 다양하다. 나도 그 중의 일부를 먹어봤지만 몇 몇 개만 빼고는 정말로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9. 중국인과 한국인
언어만 다른 언어를 사용할 뿐이지, 생긴 모습이 정말 많이 닮았다. 중국인들이 한국인들 보단 조금 작은 것 같기도 한 것 같다. 그것을 내몽고에서도 느낀 게 내몽고 사람들과 서안사람들은 키가 우리나라사람들보다는 좀 작은 것 같았다. 그래서 한국인을 보면 한눈에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생긴건 비슷해도 중국인과 한국인의 생각은 생활방식 때문인지 그런가 차이가 조금 많이 나는 것 같았다. 우선 교통문화에서 그렇고 茶 문화 그리고 음료문화들이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한국인은 그렇지 않지만 중국인들은 외국사람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관심을 보인다. 혹이나 서양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사진을 찍자는 둥 내가 서양 사람이 아닌 것이 다행일정도로 사진을 찍자고 덤벼든다. 하지만 이런 관심이 지금의 관광 중국을 만든 하나의 디딤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10. 여성의 위치
중국에서는 여자들의 파워가 좀 있다고들 한다. 택시기사, 버스기사(거의 50%여자), 버스안내양, 점원, 기타 등등. 우리 나라에서 남자들이 하는 직업들을 중국에선 여자들이 많이 하고 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여자가 남자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할 것 같은 분위기를 읽었다.

11. 중국사람들의 성격
중국은 국토가 워낙 넓어 지역마다 중국인의 특징이 다르다. 중국의 남방과 북방이 틀리고 내륙과 해안지역이 틀리다. 북방 사람은 보통 무예에 능하고, 성격이 거칠고, 소탈하며 의협심이 강하다. 그러나 남방 사람은 영리하고 섬세하며 부드럽고 재치가 있다. 무엇보다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국사람들은 항상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단 버스 탈 때나 기차 탈 때를 제외하곤 말이다.

12. 의생활
중국은 지역과 민족의 특성에 따라 의복구조가 천태만상이나 그 중 전통적으로 중국복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치파오와 중산복이 있다.
치파오는 원래 만주족의 전통복장이었는데 청나라 때 전국적으로 유행되기 시작하여 현재 중국 전통복장으로 되어 있다. 원통형으로 다리 옆부분이 갈라지고 앞에는 단추가 달려 있으며, 칼라가 목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실용성이 없어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입고 있는 중국인을 보기가 어려우며, 다만 고급식당의 복무원, 쇼장의 안내원들은 많이 착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3. 식생활
중국에는 '백성이란 먹는 것을 하늘처럼 섬긴다(民以食爲天)'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역대 천자의 최대 과제는 백성을 어떻게 먹이느냐에 있었다. 적어도 먹게만 해주면 태평성대라고 칭송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식구를 거느렸으니 먹이는 것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역사상 중국 대륙에서 식을 완전히 해결한 적은 없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의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은 대단히 강하다. 흔히들 한국 사람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의·식·주 세 가지를 든다. 그 어느 하나도 빠져서는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중에서 중국인들은 식을 가장 우선적으로 꼽는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먹는 것 외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외관에 치중하지 않는다. 그래서 옷이나 집의 화려함을 가지고 그들의 빈부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도 없다. 한 번은 중국에서 벤츠를 본적이 있는데 운전사가 거의 우리 나라 평상복을 입고 운전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운전사가 단지 대리운전이나 기사일 수 도 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중국 사람들의 결혼을 보면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진다. 한국처럼 엄숙하고 긴장되는 의식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니 예식장은 아예 없고 대신 음식점만 있을 뿐이다. 그런 것쯤이야 공증을 통해 순식간에 해결하고 손님에게는 음식점의 약도와 전화번호가 적힌 청첩장만 보내는 것으로 끝낸다.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결혼식이 아니라 먹기 위해 모인 구경꾼처럼 느껴질 수 있다. 정말 결혼식은 피로연만이 붐빌 뿐이었다.
중국에서는 요리가 한국처럼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서대로 하나씩 나오는데 그야말로 세숫대야 만한 접시에 요리를 내놓는다. 이것을 탁자 가운데 올려놓으면 탁자의 중앙은 회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자기 앞으로 돌려놓은 다음 적당한 양을 덜어 먹는다. 이것은 요즘 우리 나라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광경인데 중국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맨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 탕(국)과 과일(디저트)이다.

14. 중국인과숫자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는 8입니다. 그 이유는 팔의 중국어 발음이 'pa(빠)'인데 '發'의 'fa(화)'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發'자에는 '發財', 즉 돈을 번다, 재산을 모은다는 뜻이 있습니다. 중국인의 8 선호 경향은 우리의 7 선호보다 훨씬 앞선 정도입니다. 8자로 계속되는 전화번호, 차 번호 등이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는 것은 물론, 8,888원 등 8원으로 끝나는 가격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가격을 이렇게 붙여 놓으면 흥정도 않고 그냥 사가는 예가 많기 때문이다. 가격을 깍을때도 15원정도 하는 물건이 있으면 우리 나라 같으면 10원으로 깍을 텐데 중국에서는 8원 이라고 하면 잠시 생각을 하곤 그냥 8원에 물건을 넘겨 준 적도 있다.


◈결론◈

국민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만만디 (慢慢地)에서 콰이콰이디 (快快地).
2. 실질적인 것을 좋아한다 (실용성)
3. 외관상 만민평등이다 (평등성)
4. 준법정신, 질서의식이 희박. (교통문화에서 볼수 있음)
5. 중국인은 참을 줄 안다. (인내성)
6. 중국인은 포기를 잘한다. (일부)
7. 철저한 개인주의다
8. 배타성
9. 체면 (面子)을 중요시한다.(의복만은 제외)

정말 중국을 가기 전에는 이렇게 알고 갔다. 그러나 가기 전에는 이것을 많이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을 정말 갔다 오고 나서는 '아하' 하고 무릎을 칠정도로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우선 중국과 중국인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기다리라는 말이 최고인 것 같다. 중국인은 기다리는 것이 생활에 배어있는 것 같았다. 항상 느긋하고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한가지 요즘 들어서는 외국사람들이 관광으로 중국에 많이 오는 이유에서인지 요즘은 외국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은 없었다. 오히려 배타성보다는 조금 참견하기 좋아하고, 또 한가지를 하면 물, 불을 안 가리는 편이다. 이번 중국여행에서 가장 느낀 건 중국인은 자신이 중국인이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중국을 가기 전에는 우리 나라를 별 볼일 없는 나라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중국인과 함께 부딪히면서 한국인으로써 매우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우리는 땅덩어리가 크진 않지만 그들보다도 더 발전된 나라에 살고 또 그들보다도 시민의식과 질서의식을 갖추지 않았는가. 또한 중국인들의 생각을 많이 아는 계기를 이번 여행을 통해서 얻었다. 이번 중국여행을 통해서 좀더 시야가 세계에 한발 더 다가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내가 지금까지 우물안 개구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을 깨닫게 만든 이번 여행이 내 인생에서 조그만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다.

자료출처: 한남대학교 경상대학 홈페이지 방명록에서 (김왕기님의 글)

3/29-5/10 한달간 운남성 배낭여행을

운남성 곤명 30일-2

3/29-5/10 한달간 운남성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북경-곤명-대리-려강-호도협-루구호-중전-북경
내가 탄 비행기는 CA130으로 승무원이 전부 중국인이다. 그에 반해 승객들은 거의가 노인 단체

교원반점에 짐을 풀고 (셋이 한방에 자기 위해 욕실딸린 2인실을 얻었다. 작년엔 120원이더니 올해는 132원이다), 현미언니에겐 메모만 달랑 남긴채 왕푸징으로 향했다. 20번 버스를 타고 왕푸징에 내려서 일단 눈요기를 했다. 너무 익숙해져버린 북경. 남의 나라라는 느낌이 없다. 일단 파파이스에 들어가서 닭한마리와 커피 한잔을 1인당 18원을 내고 셋이서 먹었다.

서역에 도착했다. 2층에서 볶음밥과 탕, 반찬 한가지를 그리고 미영이는 자장면을 시켰다. 1인당 11원씩.
오후 8시 곤명행 열차는 정확하게 북경서역을 떴다

곤명이 가까워오니 승무원이 곤명 지도를 판다. 3원을 주고 한 장 샀다.

곤명역에 내려서는 자린고비에서 출력해간 자료대로 곤호반점을 찾아나섰다. 근데 실지로 걸어보니 조금 먼 것 같다. 북경남역에서 교원반점 찾는 것 정도로...
잘못왔나? 하는 생각이 들어도 그냥 계속 대로의 왼편으로만 걸으면 나오긴 한다. 3인실이 26원이고, 4인실이 25원이다. 우리는 4인실에 묵기로 했다. 이틀을 있어보고 더 있을지 결정하려는데 방값은 하루하루 계산하는거란다.

야진 20원을 합해 1인당 45원씩을 주고 방을 배정 받았다. 527호..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갑자기 협객 안색이 창백해 지면서 하늘이 빙빙돌고.. 주위가 까맣게 변한 것이다. 샤워실 안에서도 서지를 못하고 앉아서 한참을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씻고 나왔는지 기억도 잘 안난다. 결국 빨래는 포기하고 방으로 돌아와 머리도 말리지 않고 그냥 누었다. 30분쯤 있다가 저녁 식사를 위해 밖으로 나갔는데 중간에 몇번을 주저앉았는지 모르겠다. 현미언니랑 나는 '아~ 이것이 고상병인가보다'하고 생각했었다.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를 몇번이나 쉬면서 갔다.

4월2일 월요일
오늘은 원통사와 취호공원을 가기로 했다. 지도를 펴고 차편을 확인한 다음 숙소를 나왔다. 나오기 전에 오늘 숙박비 25원을 계산했다. 킹월드호텔 옆으로 난 거리에는 아침·저녁으로 장이 선다.

어제는 너무 아파서 제대로 구경도 못해서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시장 초입에서 아침으로 나는 과교미선을 5원에 먹고, 현미언니는 녹두죽과 기름에 튀긴 밀가루 과자(요우티아오)로 아침을 때웠다. 둘 다 맛있었다.
과교미선은 처음에 그냥 면과 달걀하나 생것으로, 고기랑 채소 한접시 이렇게 주길래 잠시 황당해서 가만있다가... 달걀 푼 것을 얼른 면속에 넣었다. 그러고도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라 가만있으니... 갑자기 펄펄 끓는 닭고기 육수를 갖다준다.
그제서야 눈치를 챈 협객~ 닭고기 육수에 면과 달걀, 채소와 고기를 다 집어넣었다. 힛~
맛은~~ 좀 짜기는 했어도 아주 괜찮았다. 현미언니의 녹두죽과 요우티아오도 괜찮다고 좋아했다. 식사를 끝낸 뒤 시장을 끝까지 구경했다.

다시 북경로로 돌아와서 23번 버스를 타고 穿心鼓樓에서 내렸다. 내린 곳에서 왼편으로 길을 건너 다리가 보이는 길로 쭉 걸었다. 다리를 건너면 원통동물원 입구가 보인다. 가던길로
계속 쭉 가다보면 향을 파는 가게들이 좀 보이이는 바로 원통사 입구다.

원통사 문표는 4원이다. 이 표로 원통사의 구석구석을 볼 수 있다. 입구로 들어오면 연못과 팔각정, 원통보전등이 보인다. 팔각정은 지금 단청을 새로 칠하는 중이다.
원통보전 뒤쪽으로 가면 태국식의 불상이 있는 동불전이 있다. 이곳은 한국이나 중국의 여느 절과는 확실히 다른 뭔가를 느낄 수 있다.

나도 다른 중국인들처럼 향피우고, 절하고 싶었으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관뒀다. 원통사에서 나와 다시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걸었더니 취호공원이 나왔다. 처음엔 101번 버스를 탈려고 했으나 시간도 많고해서 그냥 걸었다.

취호공원은 그냥 걷던 길로 조금만 걸으면 나온다. 문표는 3원인데 얼마전에 올랐는지 2원짜리 문표에 그냥 3원이라는 도장이 찍혀있다. 취호공원에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많이 피어있었다. 취호공원은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적당히 바람불고, 그늘 있어 시원하고, 앉을 자리도 많이 만들어져 있고...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모여서 마작을 하거나, 카드놀이를 하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

원래 오늘 계획했던 곳은 이 두곳이었으나 시간이 많이 남아서 대관루까지 가기로 했다. 대관루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서문으로 나와서 취호서로를 걸어가야 했으나 북문으로 나와서 다시 서로를 찾느라 길을 조금 헤매었다. 중간에 모자 가게에 들어가서 18원 주고 모자도 하나 샀다. 걷다가 배가 고파서 볶음밥을 먹고, 파인애플도 사 먹었다. 식사후 육교를 건너서 인민서로에서 54번 버스를 1원주고 탔다. 이 버스 종점이 대관루이다.

대관공원은 입장료가 6원이고, 공원내의 대관루에 올라가려면 또 1원이 든다. 1원을 주고 대관루 3층에 올라가서 곤명호를 바라보니... 이건 호수가 아니라 바다다....
저 멀리 펼져친 호수의 겨우 끝자락에 내가 서 있다니...
대관루 안에 보면 손판(pan)옹 이라는 사람이 쓴 현판에 대해 많은 설명이 되어있다. 모택동도 이 글들에 대해 評点 해놓은 글이 있었다. 중국 여행단의 가이드들도 이것에 대해 많은 설명을 했었으나 협객은 중국어를 잘 못하므로 십중팔구는 알아듣지 못했다. ^^;

대관원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52번 버스를 1원 주고 타서 북경로 건너편에 내려서 저녁 식사를 위해 또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끝에 있는 가게에서 채소반찬, 고기반찬, 생선반찬등 7가지와 밥 2공기를 시켰더니 8원이 나왔다. 중간에 반찬이 좀 모자라서 채소를 좀 더 달라고 했더니 더 줬다!!!

4월 3일 화요일
저~ 앞에 석림가는 미니버스가 보이는데 얼른 오라고 난리다. 얼마냐고 물으니 30원 이란다. 몇시에 출발하냐니깐 말을 안한다. 밥 먹고 오겠다니깐 법먹는 곳까지 따라가 준단다. 아침으로 녹두죽 한그릇과 요우티아오 하나를 먹었다. 다시 차타는 곳으로 오니 그새 손님이 늘었다. 그중에 외국인이 4명 있었는데 미니버스의 가격을 깎느라 난리다.
20원하자~~ 계속 말해도 절대 안.된.단.다. 훗~

이사람들 결국에 그냥 30원에 다 탔다. 근데.. 굉장히 시끄럽다... 왕복차비로 30원을 주고 영수증을 받으니 영수증에는 50원이 적혀있다. 할인인지 쇼맨십인지 모르겠다.

8시 23분 버스가 출발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고 사람들이 내린다. 얼른 따라 내리니 다른 버스로 (조금 더 큰) 갈아탄다. 자리가 없어서 외국인들 바로 앞에 앉았다. 요것들 엄청 시끄럽다. 일행중에 일본인이 하나 있는데, 같은 동양이라는 기쁜 때문인지 말이 많다. ^^;

출발 후 2곳의 옥가게를 들렀다. 내리는 곳마다 티켓을 주었는데 나중에 차에 타니 가이드 (미니버스마다 1명의 가이드가 동승한다)가 그 티켓을 다시 달란다. 나중에 한중에 2원씩 받는다고 한다.

최종으로 11시쯤 어느 식당 앞에서 차를 세운다. 식사를 하고, 석림 구경을 한다음 2시 반까지 돌아오라고 한다. 졸다가 깨기도 하고, 중국말도 잘 못하는 협객휘파람은 석림에 도착 안할줄 알고 안 내릴려고 했더니 가이드가 얼른 내리란다. 훗~

석림은 입장료가 성인은 80원, 학생은 55원이다. 현미언니는 운전면허증으로 학생 할인을 받을려다가 실패했다. 왠만하면 봐줄만도 하건만 매표원 아줌마 절대 용서가 없다. 겁많고 소심한 협객은 그냥 자진납세 했다.

석림 구경은 대석림을 먼저 구경했다. 이곳 저곳 부지런히 구경하고 望峰亭까지 올랐는데도 1시간 남짓 밖에 안걸렸다. 다시 조금 더 구경하고 아래로 내려와서 어제 산 오이랑 자유시간, 그리고 이틀전에 샀던 닭으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 식사후에 소석림으로 발길을 돌렸다. 소석림은 열대지방의 자연을 생각나게 했다. 바닥에 잔디를 깔아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띄었다. 소석림의 마지막 부분에 오면 샤니족의 의상을 빌려주고 사진 찍는 곳이 있다. 10원이라 한다. 이곳에 아스마의 전설이 깃든 망부석과 연못이 있다. 아스마라는 미인이 아흑(아헤이)라는 사람을 사랑했는데 그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돌로 변했다는 내용이 안내판에 쓰여 있었다. 소석림에서 나오니 기념품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조그만 가방을 하나 사고 싶은데 나중에 다른 곳에서 사야겠다.

기념품 가게에 들러 가방 가격을 물으니 20원이란다. 싸게 해줄 수 있냐니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된단다. 현미 언니가 아주 사고 싶어하길래 얼마면 사겠냐니까 10원을 불러보란다. 10원을 부르니 또 된단다. 난 현미 언니가 살 줄 알았는데 그냥 가격 알아본다고 물어봤단다. 괜히 내가 부끄럽고 미안해서 혼났다.

2시 30분을 좀 넘어서 미니버스는 석림을 출발해 곤명으로 향했다. 순순히 곤명으로 돌아갈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어느 절에 내려 구경을 하라고한다. 대충 절 구경을 하고 일찌감치 아래로 내려왔다. 파인애플을 2개에 1원해서 사먹었는데 내가 실수로 하나를 떨어뜨렸다. 새걸로 바꿔먹었는데 하루종일 땡볕에서 고생하시는 할머니께 도움은커녕 손해를 끼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에 "對不起" 라고 하니 괜찮다고 하신다.

미니버스는 또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 구경하다가, 졸다가... 도착한 곳은 「황가의원」
대를 이어 하는 병원인데 이곳에서 설명을 듣고, 진맥을 받고 약 등을 사는 곳이다.
나는 설명듣는 곳에 가서 차만 한잔 얻어마시고 나왔다. 예전에 패키지 간 경험도 있고, 또 작년에 소림사 갈 때 당하기도 해서 나는 여유로왔는데 현미 언니는 처음이라 그런지 좀 짜증스러워했다.

이런것도 경험인지 나는 '역시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군' 하면서 상황을 즐겼다. 숙소로 돌아온 후 내일 대리에 가기 위해 기차표를 사러갔다.
그런데! 표가 없단다. 잉쭈어, 잉워 모두 없고 루안워가 있단다. 가격을 물어보니 151원. 놀라서 그냥 나왔다.

역 주변에 버스 정류장이 있길래 가격을 보니 70원이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물어보니 65원이라고 한다. 내일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
방으로 돌아오니 이번엔 캐나다 여자가 들어와 있다. 방에서 고추장을 꺼내들고 식사를 하러갔다. 현미언니가 집 떠난 지 10일만에 고추장 냄새를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불안하다.

시장 안쪽의 어제 그 집에 가서 몇가지 반찬을 시켰다. 오늘은 좀 시장해서 그 큰 그릇의 밥을 다 비워버렸다. 힛~
가격은 둘이 합해 6원이 나왔다. 밥 먹고 나오는 길에 1kg에 2원 한다는 바나나를 1원어치만 샀다. 슈퍼에 들러서 내일 먹을 생수 와하하 큰 것을 사서 방으로 들어왔다

4월4일 수요일


오늘은 대리에 가기로 한 날이다.

9시가 넘어서야 일어나 준비를 했다. 오늘은 대리에 가기만 하기 때문에 최대한 늑장을 부렸다. 체크아웃 시간이 가까워서야 숙소를 나섰다. 카운터에서 야진 20원을 돌려받고 호텔에 짐을 맡기고 (하루 보관료 2원. 돈은 짐 찾을 때 낸다) 어제 실패한 기차표 사기에 도전했다. 결과는 오늘도 실패. 루안워 뿐이란다.

이곳 저곳 버스 가격을 알아보니 곤명역 부근은 70원, 조금 더 내려온 (곤호 반점 쪽으로) 곳은 69원, 숙소내 여행사는 65원이란다.
결국 나중에 막차 시간되면 어슬렁 거리기로 하고 금전으로 향했다.

먼저 곤명역에서 68번을 타고(1원) 신봉황촌이라는 곳에 내려서 71번(1원)으로 갈아타고 금전으로 갔다. 금전을 71번의 종점이다.

참! 이곳의 버스는 안내양이 없다. 앞으로 타면서 돈통에 1원을 넣고 내릴때는 뒷문으로 내린다. 금전은 도교사원이다. 무당산의 도교 사원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은 종루와 다화원이 볼만하독 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산전체가 산책로처럼 꾸며진 것이 어디한곳 버릴곳이 없다.

산위로 난 돌계단을 오르는 것도 재밌고, 들려오는 새소리도 너무 좋고, 주변에 조성해 놓은 꽃도 너무 좋았다. 시 외곽에 있어 그런지 사람들도 북적이지 않고 참 좋은 곳이었다.
이 한정거장 앞에서 99년 원예박람회 열렸었는데 그곳과도 연결되게 되어 있었다. 평소 별로 꽃에 관심없던 협객휘파람도 절로 감탄이 나왔다.

돌아올때는 과교미선 전문점에 가기로 했기 때문에 71번을 타고 북경로의 어느 곳인가에 내려 다시 23번 버스(1원)를 동풍동로의 앵화가일 호텔을 찾아갔다. 23번 버스를 타기전에 버스비 1원을 바꾸기 위해 10원짜리를 내고 2원짜리 아이스바를 사먹었다. 겉봉엔 초코렛에 땅콩이 묻어 있는데 실상은 해바라기씨가 붙어있다.

앵화가일호텔은 곤명반점 바로 앞에 있다. 현미언니가 어디선가 보고 적어온 메모에는 영화가일 맞은편의 근흥음식점의 과교미선이 괜찮다고 되어있는데 확인한 바에 의하면 앵화가일 맞은편의 진흥반점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저녁 먹기엔 조금 빠른 시간이라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pc방을 발견하였다. 한국어가 되냐니깐 된다고 한다. 얼마냐니깐 한시간에 6원이란다. 기쁜 마음에 얼른 들어가 앉았다. 메일을 확인했다. 친구들의 메일이 얼마나 반갑던지 눈물이 다 날라고 하더라~~~~

그런데... 이것이 한글을 읽을수는 있으나 쓸 수가 없다. 이런~~
하는수 없이 암호 편지를 썼다. 영문자판에다 그냥 한글로 글을 치는거다. 한글 자판을 외워야 가능한데 협객은 다행스럽게도 다 외우고 있당... 대충 메일을 확인하고 답장쓰고 하니 3원이 나왔다.

다시 진흥반점으로 갔다. 들어가니... 이런~~ 종업원들이 아는척도 안한다. 에구 부끄러...
조금 기다리니 그래도 손님이라고 메뉴판을 갖다준다.
과교미선 10원짜리를 시켰다. 시장에서 5원주고 사먹던것과 다른점은 고기 종류가 좀 더 많다는 것이다. 달걀종지 하나, 고기 접시가 5개나 된다. 거기다 야채 접시가 하나 더 있다.

시장에서 먹은건 좀 짰는데 이곳은 구수한 맛이 있다. 음식이 육수의 기름기 때문에 식지 않아서 좀 힘들었다. 식사 후 그냥 숙소까지 걷기로 했다. 꽤 먼 거리였지만 시간도 많고 해서 그냥 걷기로 했다. 걷다가 차 가게에 들러서 차도 한잔 얻어먹고, 차 구경도 했다

평소에는 항상 곤명역 방향으로 다녀서 몰랐는데 이 방향이 더 재미있다. 마치 야시장 같다. 참! 4월 10일에 야시장쳇?출발을 한다.

인터넷에서 뽑아간 자료에 의하면 차가 많다고 했는데 우리의 경우에는 곤명 역전에 한 대, 그 위쪽 버스역에 각각 한 대씩 뿐이었다.
가격은 위쪽이 조금 더 싼데 8시 30분경에 가면 40원 이하로 흥정 가능하고, 그 이후엔 50원으로 타야한다. 곤명역에서는 60원 이하로 절대 안내려간다.

버스는 출발한지 얼마안돼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는다. 이곳에서 화장실을 다녀오는게 좋은데 협개휘파람은 참았다가 다음에 차가 설 때까지 잠도 못 잤다. ^^;
새벽 3시에 차가 섰다. 화장실을 갈려고 내렸는데 이곳에서는 차가 아주 많다. 대리·하관·려강·방면의 차들은 이시간에 전부 이곳에 선다. 우리나라 심야 고속버스 같다.

처음 타 본 침대버스는 소문처럼 악명높지는 않은 것 같다. 약간 좁긴 하지만 두명이 무리없이 누울 수 있고 머리 부분이 약간 높게 되어있다.
일렬로 되어있어서 누우면 내 발이 앞사람 머리쪽에 가게 되고, 내 뒷사람의 발은 또 내 머리께에 오게 된다. 냄새는 좀 난다. -_-; 그래도 모~~

우리 버스는 정원이 33~3명이다. 옆차는 42명인 것 같다. 침대차를 탄 경험은 그리 나쁘지 않다. 그리 불편하지도 않고....
3시 35분경 다시 출발한다.. 싶더니 또 섰다. 어딘가 정비하나 보다. 10분쯤 후 드디어 출발~
잠시후 톨게이트를 통과한다. 톨게이트 직원이 몇 명이냐고 물으니 39명 이란다. 우~~와~~

또 버스는 달린다. 근데 속도가 장난아니다. 흡사 자전거를 탄 듯 주위 풍경이 느리게 지나간다. 안·전·운·행·
4월5일 목요일

아침 7시 40분경에 하관에 도착했다. 여느 도시와 같이 이곳도 우리를 향해 아줌마들이 달려든다. 여행에 참가하란다. 이곳이 하관인지 대리인지 물으니 대리는 4번 버스를 타고 가야한단다. 정류장은 버스가 들어온 곳에서 그 방향으로 조금 나가면 있다. 4번 버스를 탔는데 좌석이 양쪽으로 2인용 좌석이고 안내양이 표를 받는데 1.2원이다.

어디서 내려야할지 몰라서 눈을 부릅뜨고 있다가 MCA가 보이길래 얼른 내렸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지는 No.4 게스트하우스였기 때문에 한참 걸어야 했다. 도착하고 보니 바로 앞으로 4번 버스가 지나간다. 만약 양인가나 No.3, No.4로 갈려면 호국로나 홍룡정에서 내려야 할 것이다.

No.4 게스트하우스는 3인실이 15원, 5~6인실이 10원이다. 샤워실·화장실 공용이고, 화장실은 도량형이다. 우리는 10원방에 묵기로 했다. 야진까지 20원을 주고 방에 들어가니 서양인이 하나 자고 있고, 일본인이 도라에몽 만화책을 보고 있다. 나도 좋아하는뎅~~
둘 다 남자다. 대충 정리하고 거리로 나왔다.

박승철로 알려진 분이 한다는 '나그네의 쉼터'라는 카페에 왔다. 낯익은 한글들이 보이고, 자신의 기사를 스크랩 해 두었다. 읽어보니 이 분의 성함은 박상철씨란다.
그리고.. 카페 이름은 한일옥이고, 영어로는 korea cafe, 현관쪽에 나그네의 쉼터라고 적혀있다. 가게 앞길로 4번 버스가 지나간다. 버스 가는 방향의 왼쪽이다.

들어가서 사장님 계시냐니깐 안계시단다. 한국에 간지 한달째란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단다. 식사를 하려고 신라면(10원) 하나와 김치볶음밥(10원)을 시켰다. 차를 주는데 차가 아주 맛있다. 벌써 두주전자째다.

앗! 그런데 갑자기 김치찌개가 나왔다. 이런~~ 김치 볶음밥인데 왜 이거냐니깐 새로 해준단다. 그럼 김치째개는? 우리 먹으란다. 야호!!
김치 볶음밥 양이 장난이 아니다. 둘이 먹어도 되겠다. 게다가 서비스로 한국노래도 틀어준다. 나는 중국내로 좋아하는뎅~~~ 들어올 때 장우 CD 보이더만~~ 바꿔 틀어달라고 고개를 내밀어 보니 고새 어디로 없어졌다

배부르게 밥도 먹고 해서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다. 이곳 대리의 분위기는 굉장히 조용하다. 곤명처럼 차나 자전거들이 경적을 울리며 시끄럽게 지나다니지도 않는다. 거리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좀 전에 거리에서 한국 식당 하시는 사장님을 만났는데 8일날 이곳에서 축제가 있는데 규모가 크단다.
이곳의 小姐가 또 차를 한 주전자 갖다준다. 히~ 좀 미안하다...

한일옥에서 12시가 넘어서 나왔다. 그리고는 대리의 거리 파악에 들어갔다.
남문밖에서 북문까지 일자로 걷고... 또 되돌아와서 다른 골목길로 걸어보고...... 거의 3시간을 거리 파악에 소요했다. 덕분에 피자로 유명한 위난카페, 음료를 시키면 30분간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티벳탄 카페도 찾았고, 우체국도 찾았다. 친구들에게 엽서 쓸려고 서점에서 8원주고 엽서 묶음을 샀다. 근데 주소를 하나도 모른다. 주소를 알려달라고 또 메일을 날려야겠다.

티베탄카페를 찾기 위해 북문에서 다시 우체국을 돌아왔다. 우체국에서 가로길은 복흥로이고 세로길은 호국로이다. 티베탄카페는 호국로의 홍산차빈관 옆에 있다. 우체국에서 호국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오면 왼편이 티베탄카페다.

5원짜리 커피를 시켰는데 커피가 너무 진해서 빈잔을 하나 더 달래서 두잔으로 나눈다음 가지고 있던 생수를 타고 마시고 있는 중이다.

곤명에서 이틀밤을 같이 잤던 스코틀랜드 사람을 이곳에서 만났다. 말을 타고 창산 관광을 했다며 우리에 괜찮다고 권한다. 가격은 50원 이라고 한다. 그리고 윈난카페의 피자를 먹었는데 최고라고 엄지 손가락을 세운다. 힛~~ 요런 것을 두고 바로 인연이라고 하나보다.

인터넷을 하고 싶은데 자리가 안 빈다. 이곳은 컴이 3대 뿐이다. 그래서 먼저 손님이 비켜줘야 쓸 수가 있다. 자리가 비었길래 달려갔더니 한글을 읽을수가 없다. 다시 기다려야 겠다. 힝~~~
한참만에 겨우 메일 읽기를 마치고 암호문 답장을 보냈다.
계산하면서 총액이 10원인데 50원을 냈더니 훗~ 1원과 2원으로만 40원을 만들어준다. 주인 아저씨가 메일에 좋은 소식 있냔다... 그래서 읽을수만 있고 쓸수는 없다고 하니깐 다음에 바꿔준단다. 내일 또 오겠다니까 웃으며 그러란다.

그곳에서 나와서 또 시내를 한바퀴 돌고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에서 나오며 들어가며 여러번 서울식당을 찾아갔는데 계속 주무신단다. 이런~~ 창산관광을 좀 부탁할랬더니....
샤워를 하고, 빨래를 맡겼다. 이곳은 세탁비가 공짜다. 내일 빨아주겠다고 한다.

밥 먹으러 나왔는데 마땅히 갈곳이 없어서 양인가의 한 카페에 들어왔다. 손님이 테이블에 앉으면 빨간초에 불을 붙여준다. 이쁘다...
나는 쑤안라탕면을 시키고, 현미언니는 마른 쇠고기와 채소 볶음밥을 시켰다. 협객의 요리는 실패다. 기대했던 쑤안라면의 모습이 아니다. 아까운 5원---

식당을 나와서 숙소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박상철님의 나그네의 쉼터에 손님이 있나 궁금해졌다. 그래서 가 봤는데..... 종업원 2명만 있고 손님은 없다.
순간 드는 생각--- 혹시 대리에 우리 둘만 있는거 아냐? 다시 발길을 돌려 돌아오는데 갑자기 pc방이 보인다. 어설픈 한글로 인터넷 가능 이라는 종이가 보인다. 한글 읽을 수 있냐니깐 있단다. 쓸 수는 있냐니깐 당연하단다. 이곳에서 그동안 한쌓인 한글 이메일에 대한 회포를 풀었다. 친구들에게 암호문 대신 정식 이메일을 보낸 것이다.

근데.. 시간을 재는 시계가 사람을 잡는다.
분을 세는게 있고, 초를 세는게 있으며, 초 아래의 단위를 세는것까지 세가지 숫자가 동시에 올라간다.

서울식당의 문 사장님이시다. 차라도 한잔 하고 가란다. 좋~다 하고 들어갔다. 먼저 커피를 한잔씩 하면서 이얘기 저얘기 시작했다. 여행정보도 주시고....

그러다가 맥주 2병을 가지고 오란다. 종업원이 안주까지 준비해서 내놓는다. 2명의 맥주중 한잔을 협객이 처리하고 나머지는 현미언니랑 문사장님께서 처리하셨다. 두사람 다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10시 좀 넘은 시간에 시작된 얘기가 12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문사장님께서는 한국 사람과 한국말로 얘기하는게 즐겁다고 하셨다. 내일 창산 관광을 사장님께서 주선하기로 해서 내일 아침 10시 반경에 다시 식당으로 찾아뵙기로 했다.

7일에는 배낭을 No.3로 옮기고 8일에서 10일까지 대리에 머물기로 했다.

4월6일 금요일

10시쯤 서울 식당으로 갔더니 어? 어제 양인가에서 만난 조선족 아저씨가 있네... 인사를 하고 여기서 일하냐니깐 친구가 여기서 일한다. 아침을 시킬려고 하는데 문사장님께서 부른다. 어제 한참 공사중이던 집이었는데 오늘 개업한다고 할아버지들이 연주를 하고 있다. 사진 찍으면서 구경하고 있으니 밀가루 빵과 차를 한잔씩 준다. 장사가 번창하길 바란다고 말하고 싶은데 주인이 보통화를 못알듣는단다. 아쉽당~

계속 구경하고 있으려니 또 문사장님께서 부르신다. 시장 가시는데 그 전에 오늘 창산에 데려다 줄 마부 아저씨께 부탁말씀 하신단다. 마부 아저씨는 아래위로 때절은 군인복을 입고 계셨다. 우린 처음에 북한 사람이 아닐까 했었는데 알고보니 마부 아저씨당~~ ^^;

아침으로 김치찌개 1개(20원)와 밥을 한공기(3원)씩 먹고 창산으로 출발했다. 예전에 제주도에서 말 타본 경험이 전부인 협객 휘파람은 아주 엉성하게 말을 탔고, 계속 고함을 지르고... 아저씨는 '두려워 하지마(不用 )'를 계속 외친다.
조금 지나니 말 타는게 재밌다. 노래도 절로 나온다. 유덕화, 왕력굉, 민요... 닥치는대로 막 불러제꼈다. 마부 아저씨도 노래를 부른다.

우린 거의 1시간 40분간 말을 타고 산을 올랐는데... 우리가 말타고 오른 길을 아저씨는 걸어서 오르신다. 말한테도 미안하고, 아저씨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편한 길로 접어들어 폭포소리가 들리길래 내가 "有山有水, 有人有馬" 했더니.. 막~~ 웃으신다.

말이 더 이상 오를수 없는곳에 와서는 말을 메어놓고 걸어서 올라갔다. 칠룡녀지 인데 옛날에 7선녀가 내려와서 목욕한 곳이란다. 내가 아주 옛날에 이곳에서 목욕한 기억이 난다니깐 또 막~ 웃으신다.

칠룡녀지 조금 아래에 매점이 있는데 이곳에 오면 차는 공짜로 준다. 아저씨가 이곳에서 식사를 하신다기에 지금 우리는 의자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다. 친국에게 보낼 엽서도 썼다.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온다.

다시 말을 메어둔 곳으로 가서 말으 탔다. 더 깊은 곳으로 말을 몬다. 한참가다 케이블카 있는곳으로 내려가서 옆으로 빠지니 또 예쁜 계곡이 보인다. 저 위에 돌에 穴 라고 적혔는데 뭔 뜻인지 모르겠다. 물에 돌던지기 놀이도 하고, 물에 손도 담그고.. 놀다가 다시 올라왔다. 이때 내려온 길로 가지 않고 산길을 따라 올라가기로 했다. 물론 협객이...

그러나!!
5분도 지나지 않아서 그 결정을 후회했다. 길지도 않은 거리를 올라오면서 얼마나 힘들든지.. 계속 헥헥거리고... 죽는줄 알았다. 마부 아저씨는 그정도 걷고 그러면 등산했으면 죽었을꺼라고 놀린다. 힝~~

다시 말을 타고 온 길로 되돌아 가다가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로 내려간단다. 협객은 안된다고 난리를 쳤는데 아저씨가 몇발자국 인도했다. ~
정말 그 자리서 죽는줄 알았다. 내려가서 다시 타겠다고 울며불며 애원해서 겨우 내렸다. 현미언니는 의외로 잘 견딘다. 간도 크지~~~

결국 조금 가다가 말한테 미안하다는 이유를 대며 말에서 내렸지만...
언니랑 아저씨랑 협객 그리고 말 2마리가 사이좋게 산 아래로 걸어내려왔다. 산 아래서 다시 말을 타고 서울 식당에 도착한 것이 6시경.
장장 7시간을 말과 함게 놀았다. 식당에서 마부 아저씨게 30원씩 말탄 값을 드렸다. 이 아저씨 정말 좋다. 노래도 불러주고, 풀피리도 불어주고.... 무거운 나를 말에 올려주고, 내려주고... 바위 탈때는 손도 잡아주고.....
덕분에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다.

식당에 오니 한국분들이 계신다. 한가족은 곤명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는 선교사시고, 다른 가족은 태국에서 오셨단다. 곤명 사시는 분이 곤명에 들르면 꼭 자기집에 묵고 가라고 전화번호를 알려주신다. 고맙게도.... 역시 대한민국 국민은 훌륭하다!!!

거의 반나절을 말등에서 보내서 그런지 굉장히 피곤하다. 그래서 사장님께 내일 짐을 옮기겠다고 말씀드리고 숙소로 돌아왔다. 온 몸에 말냄새가 나고 말털이 붙어있어서 얼른 샤워를 했다. 세탁은 내일 No.3로 옮기고 나서 할려고 그냥 말아뒀다.

저녁을 먹으러 윈난카페에 왔다. 가게에 컴이 있길래 공짜냐니깐 아니란다. 1~30분은 5원이고, 30~60분은 10원이다. 20분 조금 넘게 메일을 확인했다. 피자를 시켰는데 맛은? 평범하다. 소문만큼 맛있지는 않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먹을것에 스트레스를 받던 사람들이었나보다 하고 우리 스스로 위안을 했다. 피자만 먹는게 허전해서 콜라도 시켰다. 피자는 16원이고 콜라는 5원이었다.

식사후 숙소로 돌아왔다.

4월7일 토요일
오늘은 숙소를 No.3로 옮기기로 해서 씻고, 짐을 쌌다
희주 가는 차를 찾아나섰다. 얼하이 가자고 꼬시는 삐끼 아줌마한테 희주 간다니까 버스 타는곳을 가르쳐준다. 버스를 찾아 올라오니 어떤 아줌마가 막 손짓으로 부른다. 호접천 가냐고 묻길래 희주 간다니깐 무조건 타란다. 차비는 3원이란다.

이 미니버스는 정해진 정류장이 없다. 가다가 사람 있으면 세우고, 내린다고 하면 내려준다. 한참 농촌 들녁 중간에 난 길을 달려 희주 주유소에 도착해보니 희주 본 마을과 상당히 멀다. 마차를 둘이서 3원에 흥정해 탔다.
지도를 들고 광장을 찾았다. 이 광장에는 할아버지들이 많이 계신다. 볕을 쬐기도 하고, 얘기를 나누기도 하신다.
이곳에서 백족의 전통가옥 양식을 볼 수 있다. 현미언니랑 들어가서 이곳 저곳 둘러봤다. 1층은 손님을 맞이하는 청이고 2층은 주로 숙박을 하는 곳이다. 둘이서 이곳 저곳 보고 있으니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들어온다. 백족 가옥에는 마당 한켠에 큰 벽이 있는데 양쪽과 위아래는 그림과 글이 있는데 가운데는 그냥 흰벽으로 되어있다. 이것이 백족의 전통적인 정원양식이라고 한다.

나갈려니까 어디서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들어가보니 무대가 마련되어 있고, 백족의 가무 공연이 있다. 우리도 앉아서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조금 있으니 차를 한잔씩 준다. 근데 단체관광객들은 손에 뭘 쥐고 있다가 점원에게 준다. 가만보니 입장권이다. 입장권이 없는 우리는 얼른 뒷문으로 도망나왔다.

오늘 생각도 못한걸 건졌다. 이런 공연을 보게 되다니....
지금은 광장에 앉아서 희주의 전통호떡(2원)을 먹으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이곳 희주의 아이들은 낯선 사람과도 참 잘 친해진다. 우리에게도 2명의 꼬마가 접근했다. 하나는 5살이고, 하나는 3살인데 5살짜리는 이름이 jiti란다. 눈이 너무 이쁘다. 말하는것도 너무 귀엽다. 글 쓸줄 아냐니깐 쓸 줄 안다고 해서 공책과 펜을 주니 이름은 못쓴단다. 그러면서 숫자를 1~17까지 쓰고, 알파벳도 몇 개 쓴다. 현미 언니는 얘의 사진을 찍었다. 처음엔 사진기만 갖다대면 긴장하더니 나중에 자연스러워 진다.

이곳에 고가가 있냐니깐 그림까지 그려주면서 '동가대원'의 위치를 알려준다.

이곳은 대문을 2개나 지나야 들어갈 수 있는 아주 큰 규모였다. 중국 해방전의 대거부 였는데 지금은 이곳을 호텔로 이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구경하고 있는중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전거를 타고 대규모로 숙박하러 왔었다. 그곳에서 나와 다시 희주의 마을 깊숙히 들어갔다. 흙길을

4월8일 일요일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모르겠다. 꼭 우리 진해의 군항제 같은 분위기다. 물론 규모는 그보다 훨씬 크지만~~~

아침에 현미언니가 봐두고 온 쌀국수집엘 갔다. 한그릇에 2원하는 '삼선미선'을 한그릇씩 해치우고 본격적인 축제 탐험에 들어갔다. 구석구석에 노점이 벌어지고, 호객 행위가 한창이며, 그 넓은 길을 사람들이 꽉 채우고 있다. 이리저리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전통 복장을 한 백족들이 한곳으로 몰려간다. 얼른 따라갔더니... 대리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가 진행중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나와서 여러 전통 춤들을 보여주었다. 누군가 유명한 사람인듯한 사람이 나와서 연설도 하고... 커팅식도 했다.
저녁은 박상철님의 나그네의 쉼터에서 해결했다.

4월9일 월요일
아침식사를 서울식당에서 해결했다. 현미언니는 김치찌개 나는 오징어 덮밥... 김치찌개는 15원으로 할인이

한국인 둘이 우리를 찾아왔다. MCA에 묵고 있다고 했다. 일부러 한국인 찾아서 이곳에 왔단다. 리장에서 돌아와서 오늘 곤명으로 갈꺼라고 했다. 서로 창산 얘기를 하며 그 귀여웠던 마부아저씨 얘기를 했다. 그 아저씨 진짜 귀엽당!!
대학생인데 휴학하고 여행을 왔단다. 곤명가는 표를 끊으러 간다길래 우리도 따라가서 내일 아침 8시 50분에 출발하는 리장행 미니버스표를 35원에 끊었다.

아저씨가 아저씨댁에 종을 달러 간단다. 우리들도 집 구경을 하러 쫄래쫄래 따라갔더니 의외로 가깝다. 티베탄카페 바로 앞이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나그네의 쉼터를 했는데 올 1월에 지금의 장소로 옮겼단다. 근데 요새 적자에 허덕이고 계신단다.

서울식당과 달리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좀 뜸한 곳이다. 우리라도 매상을 좀 올려드려야 할텐데... 리장에서 돌아오면 아저씨의 게스트하우스에 묵어야겠다.
나그네의 쉼터에서 책읽고, 차마시다가 책을 빌려서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에 6시까지 한일옥으로 오란다. 오늘 저녁은 백숙을 준비하셨단다.
아저씨 후배는 산에 올라가서 아직 안내려오셨고, 서울에서 약대를 졸업하고 자격증 시험결과를 기다리는 남자 한분이 계셨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나랑 동갑이다.
아저씨가 만들어주신 백숙으로 저녁을 먹는중에 아저시 후배도 산에서 돌아오셨다.

4월10일 화요일
7시 조금 넘어서 일어나서는 서둘러 씻고, 짐을 챙겼다.
8시 20분쯤에나 한일옥에 갔다. 어제 후배 아저씨를 호도협 같이 가자고 꼬셨더랬다... ^^;
한일옥에서 아침을 죽으로 때우고.. 차를 한잔 하고 있으려니 어떤 아저씨가 오늘 리장가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얼른 가잖다. 일행이 더 있다니깐 자리가 없단다. 이론~~

하는수 없이 우리가 먼저 오고.. 후배 아저씨는 뒤에 오기로 했다. 리장으로 오는 미니버스에서는 계속적으로 졸았기 때문에 길의 풍경이라던가... 하는 것은 모르겠다. 다만 3시간이 걸린다는 표 파는 아줌마 말과는 달리 3시간하고도 30여분이 더 걸렸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가며 사쿠라카페를 찾았다. 사방가를 먼저 찾아야 했는데 거리상 좀 멀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사코 마사타카를 만났다. 어제 리장에 도착했단다. 얘가 사방가를 가르쳐줘서 그나마 조금 쉽게 왔다.

마지막으로 어느 서양인에게 물으니 조그만 다리 건너 오른편이란다. 드디어 찾았다!!! 이곳은 좀 북적인다고 들었는데 의외로 조용하다. 4인1실에 묵기로 했는데 우리 둘 외에는 없고, 가끔 외국인이 몇 명 보인다. 주인도 자리를 비워서 지금 방값도 계산 못하고 있다. 후배 아저씨도 기다려야하고....

기다림에 지쳐 먼저 밥을 먹기로 했다. 김치볶음밥과 된장찌개를 시켜서 먹고 있는데.. 드디어 아저씨가 오셨다. 그리고 주인이신 명애 언니도 오셨다. 김치볶음밥이 8원이고, 숙소비는 하루 10원이다. 식사후 리장 고성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좁은 골목골목을 누비며 다니는 기쁨이란--- 게다가 골목마다 수로가 있어서 기분이 새로웠다.

사쿠라카페에 가서 냉커피 한잔을 6원에 시키고 호도협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누구신지 모르겠으나 이 자료를 써 놓으신분은 정말 대단하다. 호도협 트레킹이 끝나면 나도 그 노트에 소감문을 적어야지....

이틀만에 집에 전화도 했다. 혼자 계신 엄마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산에 가므로 이삼일으 s전화 못한다고 했더니 좀 서운해 하는 눈치다.
다시 고성을 이리저리 누비고 내일 호도협 트레킹을 위해 버스표도 23.5원에 끊어뒀다. 저녁도 사쿠라카페에서 먹었는데 주인아저씨가 2원을 깍아줬다.

4월11일 수요일

오늘은 호도협 가는날.
일찍 일어나서 씻고, 배낭을 숙소에 맡기고 7:30 차를 타러 왔다. 차는 7시 30분이 넘어 출발하더니 갑자기 고성쪽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몇 사람을 더 태운 뒤 8시경에 大具를 향해서 떠났다.

차는 산중턱에 난 비포장 도로를 3시간이 조금 넘게 달린다. 산 밑으로 보이는 마을들이 평화로워 보인다. 사쿠라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大具에서 내려서 기사 아저씨랑 흥정을 하라고 했는데 왠걸~~ 아저씨가 먼저 흥정을 걸어온다.

뉴보트 타는 곳까지 8Km라고 1인당 10원이란다. ok 하고 지금은 大具의 식당에서 볶음밥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 오니 외국인이 참 많다. 이 사람들은 모두 old 보트를 타러 가는 듯 보인다.

이곳 식당에서 돼지고기 볶음밥(7원)을 먹고 생수 큰것(4원) 한병을 사고 계산하려니 뉴 보트장까지 가는 차표도 이곳에서 산단다. 그래서 1인당 10원씩 30원을 더 줬다. 다시 타고 온 버스를 타고 뉴보트 타는 곳으로 가기 위해 차를 타니 우리 일행 3명과 외국인 2명이 전부다.
매표소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표를 들고 기다린다. 한사람에 30원.
매표소에서 티나 게스트하우스까지 오는데는 2가지의 길이 있다. 찻길따라 쭉-- 걸어오는 방법이 있고, 아래 흐르는 폭포를 구경하며 오는 방법이 있는데 매표소에서 어떤 사람이 아랫길을 가이드 해 주겠다고 했다. 근데 우리가 너무 피곤해서 그냥 윗길로 쭉 걸어왔다.

무디 게스트하우스를 지나 55분 정도를 걸어 티나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1박 하기로 해서 3인실을 예약했다. 조금 쉬고 있으려니 차를 한잔 준다. 저녁으로는 삼계탕을 하기로 했다. 원래 이곳 메뉴에는 삼계탕이 없는데 효수 아저씨가 바디랭귀지로 닭잡고, 만드는 법까지 전수했다. 1마리에 4斤으로 쳐서 55원에 하기로 했다.

아저씨가 바쁘게 뛰어다녀서 뭔가 요리가 하나 나왔다. 일명 닭볶음. 닭이 너무 커서 반은 탕으로 끓이고 반은 볶았단다. 닭껍질이 새까만게 오골곈가 보다. 일단 닭볶음과 맥주로 입가심을 했다.

참! 닭요리가 한참일 때 이곳의 주인 티나는 곤명으로 떠났다

내일 계획은 오전에 중하도협 관광, 오후엔 이곳에서 하프웨이(Half way) 게스트하우스에 가서 그곳에 숙박하는 것이다.
이곳 티나 게스트하우스는 3인실 침대 하나가 10원이다. 자기전에 샤워는 힘들 것 같아 먼지에 뒤덮인 머리를 감았다. 그런데.. 이곳의 샤워시스템은 누군가 뜨거운물을 계속적으로 무어주어야 한다. 참 고달플텐데도 이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4월12일 목요일

아침에 8시경에 일어나 씻고 중호도협을 구경하러 갔다. 어제 외국인들이 그냥 구경하고 오길래 우리들도 그냥 갔는데 내려가니 길을 막는다. 가이드비가 1인당 10원이란다. 왠 얄궂은 젊은 사람이 그러길래 어쩔까 하고 있는데 아줌마 한분이 내려오셔서 자신들이 직접 만든 길이란다. 알고보니 티나 게스트하우스에서 가이드를 해 주시는 장선생님의 부인이시란다. 1인당 10원씩을 드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역쉬~~ 사람들의 말처럼 멋진 곳이었다. 만약 이곳을 안보고 그냥 갔더라면 분명히 후회했을 것이다.

특히나 일일이 바위를 쪼아서 길을 만드신 그분들의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산에 들어올 때 산 입국에서 산 입장권에 나온 호도협의 절경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도 입장권처럼 구도를 잡고 한장 찍었다. 힛~

내려갈때는 좋았는데 올라올때는 좀 힘들었다. 내려갈때는 10분 정도였는데 올라올때는 30분도 넘게 걸렸다. 일행들은 나만 버리고 먼저 가버렸다. 입장권에 쓰여 있던 말처럼 어쨌거나 내가 중호도협을 다녀왔으니 나도 眞正的男子漢이다.
근데... 감기 걸렸다. 열나고 으슬으슬 춥다. 아직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점심으로 효수 아저씨는 어제의 그 삼계탕과 채소볶음요리, 현미언니는 달걀볶음밥 그리고 나는 돼지고기 볶음밥을 먹었다. 식사후 쉬다가 12시 30분쯤 길을 나섰다. 티나 게스트하우스 앞으로 난 길을 올랐다. 굽이굽이 산길로 걸어가는 기분은 참 좋았다.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는 티나 게스트하우스... 눈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들이 어찌나 한가로운지 자꾸만 카메라 셔트를 눌렀다. 1시간쯤 굽이굽이 산길을 돌며 올라가니 좀 완만한 산길이 보인다.

오는동안 길 표시가 너무 잘되어 있어서 길을 잃어 헤매었다는 사람들의 메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2박 3일 일정으로 티나 게스트하우스에서 1박, 오전에 중호도협 관광하고 오후에 천천히 하프웨이로 와서 또 1박 한다면 진짜 멋진 호도협 관광을 하게 될 것이다.

완만한 산길을 20분 조금 넘게 걸으니 폭포가 하나 나온다. 사쿠라에 정보 적어놓으신 분이 이곳 경치가 최고라고 하더니 역시나 멋지다. 이 폭포 사진을 몇장을 찍었는지 모르겠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어 하프웨이 게스트하우스로 옮겼다. 이 폭포에서 한 30분쯤 걸러온 것 같다.

오늘길에 민가도 몇 채 보이고, 계단식 밭도 보이고, 말이며 개·닭들이 보이는데 너무 한가롭다. 이 한가로움에 취해 아주 느릿느릿 길을 걸었고, 사진기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쉬엄쉬엄 와도 3시쯤에 하프웨이에 도착해 버렸다.

효수 아저씨는 계속 길을 나서 치아오토우로 빠지기로 하고 나랑 현미언니는 이곳에서 1박 하고 내일 움직이기로 했다.
꼭 우리네 산골마을과 비슷한 이곳이 너무 마음에 든다. 이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돼지고기 볶음과 밥 한그릇.. 그리고 차 2잔.. 총 13원이 나왔다. 밥은 2원이고 차는 1잔에 1.5원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나무로 만든 간이의자가 있다. 이곳에 앉으면 앞으로는 옥룡설산이 보이고 뒤로는 Haba 설산을 볼 수 있다. 화장실은 이 간이의자 아래쪽인데 여자 화장실쪽에서는 일(?)을 보면서도 옥룡설산을 감상할 수 있다.

우리는 4인1실에 들었다. 가격은 10원. 일단 좀 쉬자고 마음먹은 것이 낮잠으로 이어졌다. 깨어나니 6시경. 아직도 주위가 어두워지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 사진을 몇장 찍고 또 간이전망대에 앉았다. 애플파이(9원)와 커피(4원), 핫초코(6원)을 시키고 한참을 산과 구름 그리고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제 서서히 주위에 어둠이 내린다.
4월13일 금요일

오전 7시. 또 오늘 하루가 시작되었다.
화장실 갔다가 씻고 정리하니 7시 30분이 넘었다. 이 산엔 일본인과 한국인이 꽤나 오는걸로 알고 있는데 지난 이틀간 한명도 못 봤다.
오늘은 산행 마지막날... 좀 볼 수 있을래나 모르겠다.

아침에 보니 어제 저녁에 왁자지껄 떠들던 서양애들이 하나도 안 보인다. 다들 일찍 떠났나보다. 아침으로 밥 한그릇과 계란탕, 탕수돼지고기를 먹었다. 1인당 9원씩 18원.

8시 20분쯤 하프웨이 게스트하우스를 떠나 한시간 반쯤 오니 돌무덤이 몇 개 있는 마을이다. 밭에서는 말인지 소인지를 모는 소리가 들리고, 산에서 새소리가 들려오고... 지리산 자락의 어느 마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중간중간 보리밭도 보이고... 설산도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한적한 시골길이라 노래도 절로 나온다.
내가 아는 노래는 다 부른 것 같다. 힛~

아! 산길 중간에서 아주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대리에서 봤던 프랑스 아저씨였는데 그곳에서 헤어진지 일주일만에 이 산중간에서 만났다. 너무 반가워서 길 중간에 가방을 내려놓고 서로 얘기를 했다.

이 아저씨는 엔지니어이신데 지난해 6월에 회사를 관두시고 여행중이시란다. 한국 여행을 끝내고 지금은 중국 여행중이며 다시 러시아 쪽으로 넘어가실꺼란다. 집에는 언제 가냐니깐 아마도 크리스마스 전에는 갈 것 같단다. 우~와~..

아저씨랑 헤어지고도 몇 시간을 걸었다. 중간에 나시족 가게에 들러 물과 콜라를 10원에 샀다. 나중에 치아오토우에 도착해서 시간 계산을 하니 꼬박 6시간을 걸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해서 그런가... 호도협이 그리워 질려고 한다.

리지앙행 버스가 오길래 얼릉 탔다. 1인당 15원이란다. 근데 이 버스.... 탈 때 좀 꾸지다 했더니 영락없이 그 값을 한다. 한동안 가다서다를 반ㄴ복한다.... 2시간이면 도착한다던 리지앙에 2시간은커녕... 3시간 정도 걸린다.
사쿠라에 돌아와서 샤워부터 했다. 그동안 샤워가 얼마나 그립던지.... 오늘 저녁은 거하게 먹기로 현미언니와 약속을 했다.

참! 숙소에 돌아오니 남자 2명이 있다. 1명은 중국인이고 1명은 한국인이다. 한국인은 대학생인데 대리에서 이곳으로 왔단다. 그는 대리가 별로라고 한다.
중국인은 상해에서 일하던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번에 직장을 잃게 되어서 여행을 왔단다.

오늘 저녁은 거하게 먹자는 약속대로 이것저것 막 먹어서 무려 53원이나 나왔다. 내일부터는 손가락 빨아야겠다. 벌써 10시다. 오늘 집에 전화해야 하는 날인데... 전화를 못했다.
우리 엄마가 전화 기다릴텐데... 힛~

4월 14일 토

오늘은 너무 일찍 일어났다. 7시 30분.
이곳에서도 희주 호떡같은 걸 판다. 하나에 3.5원인데 3원에 사서 나눠먹었다. 고성안을 이곳저곳 떠돌다가 길을 잃었다. 원체 길치인 협객휘파람.. 아예 포기하고 앞으로만 걸었고, 그래도 길눈이 밝은 현미언니가 이곳 저곳 기웃거려 길을 찾았다. ^.^;

미로속을 헤매느라 허기져서 아침으로 삼선미선을 먹었다. 한그릇 3원인데 맛이 좋아서 내일 또 가야겠다. 식사후 이곳 저곳 어슬렁거리다가 쇼핑을 하러 나섰다. 오늘의 쇼핑항목은 바지와 가방~

길거리에서 파인애플을 0.5원에 사먹었다.

다시 발길을 옮겨 버스표 파는곳으로 갔다. 내일은 루구호로 떠나기로 했다. 이곳 리지앙에서 10시간쯤 걸린단다. 한 4일정도의 여정이 될 것 같다. 차비는 보험료 3원을 포함해서 1인당 57원이 필요하다. 표는 이곳에서 사도 차는 내일아침 버스터미널에 가서 타야한다며 위치를 지도에서 짚어준다.


조금 쉬다가 점심 먹으러 사쿠라 카페엘 갔더니 우리방의 한국대학생이 그곳에서 정보수집에 여념이 없다. 우리도 중띠엔과 루구호에 대한 정보수집 겸 식사를 함게 했다.
김치볶음밥과 토마토달걀탕 그리고 커피한잔....
식후에 마시는 커피 한잔의 여유.... 너무 좋다. 점심값으로 16.5원이 나갔다. 오늘 지출이 너무 크다. 앞으로는 진짜 손가락 빨아야겠다.

숙소에서 조금 쉬다가 또 나왔다. 또다시 고성탐험에 나섰는데... 아침과 마찬가지로 길을 잃었다. 구석구석 헤매다 보니 전혀 낯선곳까지 와버렸다. 결국 물어물어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광장에서는 오늘 저녁 있을 춤 공연을 위해 장작을 갖다놨다. 이 공연은 화·목·토에 열리는데 현지인과 관광객이 하나될 수 있는 공연이다.

친구들에게 메일을 보내야겠기에 pc방을 찾았으나 한글되는 곳이 없다. 이런--- 꼭 확인해야하고 보내야 할 메일이 있는데...

저녁을 먹으로 MAMAFU's 레스토랑에 왔다. 중문명은   付餐廳이다. 이곳은 론리플래닛에 소개된 곳으로 역시 서양인들이 아주 많다. 리지앙에서의 마지막 저녁은 이곳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닭요리와 채소탕 그리고 밥 2공기.
참! 이곳은 차도 돈을 받는다. 녹차는 1잔에 1원, 모리화차는 2원이다.

리지앙 스타일의 채소탕이 너무너무 맛있었다. 의외의 소득이다. 다음에 기회되면 또 먹어야겠다. 식사비는 총 29원이 나왔다. 오늘 저녁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그냥 밖에서 구경하면서도 신이 났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배낭을 챙겼다. 내일 일찍 루구호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또 리지앙에 돌아오게 될지는 모르겠다.

곤명여행기(1)
2001년 4월5일
신공항으로 출발했다. 김포공항에 비해 규모가 굉장히 크고 깨끗했다
미국의 lAX와 유사해 보이는 느낌을 받았다. 어째든 곤명행 2시25분발
비행기를 타기위해 입국심사를 마치고 BOARDING장소까지 갔다. 비행기가
보였는데 보잉737-700으로 우리나라 아시아나의 국내선 운항비행기와 거의
같은 크기와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저 비행기로 5시간이나 비행을
해야 하다니!! 중국 운남항공은 작년 7월부터 서울과 곤명간의 운항을
시작했다고 한다.
비행기에 오르니 사람이 50명정도가 타고 80좌석정도는 자리가 남는것
같았다. 비행기가 이륙후 황사때문인지 비행기가 많이 흔들려 가슴을
많이 졸이게 했다. 그래도 4시간 50분여간의 비행을 마치고 곤명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그때의 긴장감도 잊어버리고 곤명의 아름다운 모습에
빠져들기 시작했답니다.
곤명의 평균2000미터 가량인 운남성의 성도로 1890미터의 고도이며 이름은
태양이 잘 비친다는 뜻에서 곤명이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또한 옆의 5000미터에 달하는 티벳의 동생이라고도 중국인들은 말하고 있었다
또한 56여족의 소수민족들로 구성된 중국의 반정도인 26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 운남성이기도 하다. 어째든 공항에 도착한 첫 모습은 중국의 여느
지방공항과 유사한 (청도공항과유사)모습이었고, 밖에 나오면 다른도시와 달리
매연냄새가 없이 깔끔한 느낌을 받을수 있었다.
나오면 조그마한 광장이 있고 정면에 관광지우디엔, 우측으로 돌고 다시 우측으로
돌면 지창초대소가 있고 공항 우측으로 5분정도 걸으면 지창빈관이 있다. 후에 저녁
늦게 묵을 곳이 없으면 참조하기 바랍니다. 지창빈관과 관광빈관은 1~2성급 정도
되어 보였고 지창빈관은 물어보니 180원이라고 하니 깍으면 120원 정도까지는
묵을수 있을 것이다.
곧바로 나는 어머니와 형과 나란히 버스에 앉아 시내를 달려 하버프라자 호텔로
갔다. 중국으로는 메이완판디엔으로 기억된다.가는 도중에 본 시내모습은 굉장히
아늑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청도 남쪽이나 상해 정도로 버금가는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호텔로 가는 도중에 한 사람이 고도가 높기 때문에 첫날은 물을 많이
마시고 일찍 잠을 자라고 했다. 아니면 고산증세로 고생한다고..
어째든 호텔에 도착해서 여느때와 같이 일층 매점으로 가서 지도를 한장사고(5원)
밖의 매점으로 가서 청도맥주(5원)4개와 호워성미(땅콩)을 사가지고 형에게 갔다주고
나는 작업을 위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1층의 매점아가씨가 밖에 나와있길레 몇마디
걸어봤더니 엄청나게 싹싹하다. 그리고 자기는 2달전에 베이징에서 왔는데 같이 북경
말을 쓰는사람을 보니 반갑다고 한다. 그리고 중간에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쓰는데
발음이 괜찮아 보였다. 나는 북경처럼 추알(꼬치)을 먹을수 있냐고 물어보니까 여기도
근처에 있다고 해서 먹으러 갔더니 문을 닫아 다시 호텔로 오니 그 아가씨가 같이
가준다고 기다리란다. 퇴근 시간이 10시30분이니까 10분만 기다리란다 그러더니 10시
20분에 나오더니 빨리 꼬치먹으러 가잔다. 자기네 라오반(가게짱)이 빨리 퇴근해도
된다고 했다나..? 그러더니 자기 라오빤의 칭찬을 한다 나이가 34살인데 저렇게
예쁘며, 일본에서 7년간 살았고 , 현재는 이 가게를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그러는 도중에 우리는 중국서민의 한 시장거리로 들어가게 되었고 한 꼬치집으로
들어가게 됬다. 그 여자는 카오위(구운생선)과 꼬치 두개 와 콜라를 시키고 나는
청도맥주와 꼬치 2개를 시켰다. 값은 합이 22원 이었고 내가 지불했다. 앉으니까
여자애가 따발총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보통 중국사람들은 700~800원 버는데 자기는
외국어를 잘해서 취직하기가 쉽고 2800원 정도 번단다. 또한 서우티(핸드폰)이
자기께 3000원 짜리라고 자랑도 하고 내 월급이 얼마냐는둥,, 또한 자기가 가이드하면
선물사는데 수수료 안받고 싸게 사준다는 등등 그리고 꼭 미국에 가보고 싶다고 말이다
나는 중간에 요리가 짜고 매워서 사천성에서 가까워서 그런가봐? 역시 백문이 불여
일견이야(바이원뿌루이지엔) 이라고 했더니 정말 중국어 잘한다고 다정하게 쳐다본다.
사실은 과외시간에 가기전날 배운건데...
어째든 이런저런 애기 후에 11시30분 쯤에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그여자는 호텔
바로앞의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곤명의 첫날이 흘러가버렸답니다

4월6일
어제저녁에 중국아가씨와 늦게까지 애기하고 나서 곧바로 방에와 잠이 들었는데
중국에서의 첫날밤인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새벽6시쯤에 일어나 가볍게 세수를
하고 7시쯤에 밖으로 나왔다. 다른도시와 같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고
나이드신 분들은 산책을 가볍게 하고 있었다. 면세점에서 사간 담배를 하나피고
방으로 올라왔다. 형은 이제서야 일어나 세수를 하려하고 착실한 카도릭 신자이신
어머님은 기도를 하시고 계셨다. 조금후에 1층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8시에 단체로
관광에 들어가기 때문에 차 앞에서 가족들과 애기를 나눴다. 그때 가이드 누나가
오길래 중국책을 한권 살게 있어서 관광중에 서점에 가거나 백화점 같은곳에 가냐고
물어보니까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어제 만난 아가씨(이름은 양쫑리)에게 가서 책좀 사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흔쾌히 승낙을 한다. 중국여행중에 중국사람과 애기를 나눈것도 처음이고 부탁을
해서 상대방이 들어준것도 처음이라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어째든 우리는 8시5분에 관광차를 타고 여행을 시작했다.우리가 있는 하버프라자가
곤명시내의 중심부이기 때문에 차를 타고 가면서 보니까 거리가 깔끔하고
고층빌딩도 많았다.그러나 역시 조금씩 중심부에서 떨어지니까 분위기가 다소
삭막해지는듯 하다 처음으로 간곳은 대관루인데 가는 도중에 개천이 하나 옆에 흐르
는데 이름은 대관하이고 청나라 시대때 시내중심부로 운송을 위해서 만든 수로라고
한다. 대관루의 입구에 도착하니 사람도 별로 없고 특이한것도 별로 없다.가격은
변함없이 여전히 6원이었다.
안에는 풀 나무들이 무성하고 조금 걸어가면 대관루가 있는데 중국 4대 누각중에 하나
라고 하는데 별로 볼품은 없었다. 중국의 사대누각은 황훠루와 악양루 대관루 그리고??
이렇게 4개가 있다. 누각의 양옆으로 현판에 글이 쓰여 있는데 우측은 풍경을,좌측은
중국에서 있었던 큰 사건들을 써 놓았다고 한다. 바로 앞에 큰 호수가 하나 있는데
이화원이나 제남의 대명호 등과 비교할바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배낭여행을 가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촉박할경우 권하고 싶지 않다
정원의 규모는 그리크지 않고 1시간이면 충분히 쉬엄쉬엄 거닐수 있는 크기였다.
대관루를 보고나서 우리는 원통사로 곧바로 향했다. 입장료는 4원이고 곤명시내 속의
도로옆에 있었다. 들어가니 입구가 제남의 천불산 입구나 태산의 일천문 입구 또는
태산 꼭대기에 있는 티엔지에 처럼 약간 멋있게 되어있었다. 풀과 나무도 무성하여
여기서 사진을 한방찍고 들어가니 향에 불 붙이는 곳이 크게 만들어져있고 원통대전이
있는데 건물이 굉장히 멋있는 편이었다. 일본의 금각사나 은각사와 비슷하다.
사람들이 전부다 감탄의 소리를 낸다. 또한 신기한 것은 여기 자린고비에 있는 어느
여행기에서도 본것 같은데 여기 저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마이크
에서 불경소리가 울리면 사람들이 따라서 소리를 내어 불경을 읇고 있었다.
어째든 규모는 대관루보다도 훨씬 작지만 개인적으로는 한번 가보라고 권해보고 싶은
곳이었다. 건물도 아름답고 여행하다가 들르면 사람들의 염불소리에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도 받을수 있고... 1시간이면 충분히 볼수 있을것 같다

다음으로 우리는 차를타고 구향동굴로 향했다. 어느 여행기에서도 본적이 없고 가이드
책들에서도 볼수 없었던 곳이었다. 곤명에 도착해서도 여러 중국인들에게
꾸시향퉁쿠라고 물어보면 전부 모른다고 했는데 과연 어떤 곳인지 매우 궁금했다.
지도를 보니 석림으로 가는 도중에 구향풍경구 라고 운남의 여러 풍경구들중의 하나가
있던데 혹시 이곳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구향동굴은 석림으로 가는 도중에 나오는데 이름은 꾸시향펑징취에 있는 동굴이 맞다
가는 도중에 여러가지를 볼수 있는데 곤명의 흙이 빨간색이라는 것을 알수있다. 하늘
에서도 보면 곤명이 빨간색으로 보인다. 철이 많이 들어서 그렇다는데 그와중에서도
식물이 잘자라고 해서 차와 담배가 특이 유명한 곳이 곤명이다. 곤명의 보이차와 구감차
가 유명한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죠? 구감차는 한번 먹어봤는데 정말 신기하다.
처음에는 엄청 씁쓸한데 조금지나면 엄청단맛이 난다. 한번 중국에 들르실때 맛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길가의 나무들의 밑둥에 하얀 페인트칠을 해 놓았는데 이것은 해충방지 및 저녁에
앞이 잘 안보이기 때문에 칠해 논것이라고 한다. 또한 물소를 많이 볼수 있는데 그것은
장강 이남에서는 흔히 볼수 있는 일일 것이다.
또한 구향동굴로 가는 도중에 여러 촌(CUN)들을 볼수 있고 또한 중간에 양중해라고
엄청나게 큰 호수가 있다. 또한 칠색운남이라는 곳도 나오고, 양중해는 이곳의 곤명
사람들이 바다를 볼수가 없어 해자를 붙였다고 한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게 멋있었다
또한 양중해를 조금 지나면 대규모의 화력발전소를 볼수있다. 장강삼협에 있는 중국
최대의 발전소보다는 작지만...
구향동굴로 가는 길은 석림으로 가는 도중에 석림을 30킬로 정도 남겨놓고 사잇길로
빠진다. 그래서 석림으로 버스를 이용해서 갈경우는 위에 말한 장면들을 볼수 있을
것이다. 어째든 사잇길로 빠지면 계속 산속으로 들어가는데 가는도중에 시멘트 공장
들이 처음에는 보이더니 조금 지나면 끊임없는 산속이다. 그러다가 1시간 조금 지나면
구향풍경구에 도착한다. 구향풍경구는 시골로 그렇게 들어갔는데도 깔끔하게 잘 만들어
놓았다. 개발한지 5년정도 밖에 안됬다나?
들어가면 입장료가 50원인가 그렇고 리프트가 15원인가 그렇다. 입구로 들어가면
엘레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간다. 그럼 잔잔한 협곡에서 레프팅 하는 곳이 나오고
간단히 레프팅을 하고 나서는 동굴로 들어가면 된다. 레프팅은 시원하고 전혀 위험한
것도 아니니까 전부 해보시길. 노 저어주는 사람도 있으니까.. 아마도 10인승 보트를
타고 간다. 동굴에 들어가면 정말 기분이 좋다 시원하고,멋있는 종유석과 석순들을
많이 불수있다. 그러다가 선녀동인가로 들어가면 하이라이트 이다 정말 말로 표현
못한다. 또한 계속가다보년 동굴속에 엄청난 폭포도 있고 조금 더가면 희한하게 생긴
것들이 많이 있다. 계단식 논밭처럼 구멍이 파이고 거기에 물이 차서 벌집처럼 생긴
희한한 풍경과 밖으로 나오기 진전에는 석림과 비슷한 종유석들이 ...... 또한 마지막
으로 계단이 300여개 있는데 가마로 태워주는 사람들이 있다 가격은 30원으로 합의보면
된다.
나오면 리프트가 있어서 스키장에서 처럼 타고 출구로 나오면 된다. 리프트도 재미있다
타고 밖으로 나오면 입구가 보인다.
가볍게 관광을 마치고 다시 석림으로 향했다. 석림까지는 차로 2시간 30여분 걸렸다
석림속으로 가지는 않고 석림에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도시로 갔다. 아주 조그마한
도시로 중앙에는 석림대주점이라고 석림에서 제일 큰 호텔로 갔다. 14층 정도로 4성급
이라고 하는데 다른 도시의 1~2성급이다. 가격도 230원 정도로 나와있는데 충분히 150
원까지는 깎을수 있을 것이다. 도시가 너무 작아 볼것도 없고 바로 앞의 꼬치집에서
혼자 소고기 꼬치를 몇개 먹고 역시 맥주와 땅콩등을 사서 형과 어머니에게 들이고 이
날은 빨리 잠에 들어갔다. 곤명에서는 죽통주라고 대나무 속에 든 술이 많이 파는데
미주라는 것도 죽통속에 넣어서 팔고 백주도 죽통에 넣어서 판다. 미주는 물어보니까
운남의 특산이라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빼갈은 아니고 중국의 막걸이라고 생각하면
될것 같다. 또한 정지우라고 황지우라 비슷한것도 있는데 사려다가 말았다. 어째든
곤명에서는 맥주가 전부 5원인데 내가 바가지를 쓴 것일까??? 다른 도시는 2원인데..
그럼.. 다음날은 석림을 보러 가는구나 빨리 취침에 들어 갑시다.


# 곤명(昆明 : 운남성) 여행 계획
ㅇ 북경과 서안에 이어 3대 관광지
ㅇ 1900m의 고원에 위치 2월경이 최적
ㅇ 공항에서 뻐스 1원, 택시 10원
ㅇ 도착하면 지도부터 구함
ㅇ 먹거리---소권분(표고버섯이나 미나리속으로 만든 쌀방)
양우빵, 포곡빵, 스낵 1-2원
돌가마미선 20원 정도면 실컨 먹는다
ㅇ 꼭가봐야 할 곳
- 석림 : 돌의 숲으로 화려하고 아름답다
- 세박원 : 90여개 국의 원예 박람원
- 구향 :
- 대관루 :
- 서산
- 곤명서산
- 전지(서산 삼림공원)
- 원통사 : 1200여년의 역사 고대건축물로 남불교 협회 소재지
- 구랑풍경구 : 90km 떨어져 있고 1급 명승지
ㅇ 시장 : 과일 풍부(깍아야 한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음식 10가지

① 장우육(醬牛肉/jiang niu rou) 장조림과 비슷하다.

② 어향육사(魚香肉絲/yu xiang rou si)
주재료는 돼지고기이고, 이것을 실처럼 가늘게 썰어서 각종 야채와 양념을 넣고 볶다가 전분과 육수로 걸쭉하게 마무리하는 요리

③ 고노육(古老肉/gu lao rou) 탕수육과 비슷

④ 경장육사(京醬肉絲/jing jiang rou si)
쇠고기를 실처럼 잘게 썰어 간장과 식초로 간을 하여 볶은 요리

⑤ 궁보계정(宮保鷄丁/gong bao ji ding)
닭고기, 땅콩, 오이와 각종 양념을 넣어서 볶은 요리

⑥ 향고유채(香 油菜/xiang gu you cai)
표고버섯과 유채를 볶아서 만든 요리.

⑦ 마파두부(麻婆豆腐/ma po dou fu)
깍두기 모양으로 썬 두부와 각종 양념을 볶아서 만든 요리이다

⑧ 팔진두부(八珍豆腐/ba zhen dou fu)
새우, 해삼, 표고버섯과 각종 양념에다가 살짝 튀긴 두부를 넣어서 만든 요리이다.

⑨ 발사(拔絲/ba si) 우리나라 맛탕과 비슷하다. 바나나로 만들 경우 拔絲香蕉(ba si xiang jiao)라고 하고, 사과로 만들 경우 拔絲 果(ba si ping guo)라고 한다.

⑩ 계용옥미갱(鷄茸玉米羹/ji rong yu mi geng) 달걀을 부드럽게 푼 옥수수스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