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12일 목요일

호주/브라질/뉴질랜드/인니/인도 여행기


배용훈씨의 호주 배낭여행


98년5월말 무작정 호주로 떠났다. 집엔 어학연수 간다는 핑계를 대고...
난 초등학교 때부터 정말 호주라는 곳을 한번 가보고 싶었다.
(중간생략)
막상 여행사에서 티켓을 구입하고 비자를 받을때 까진 내가 정말 외국에 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비행기가 김해공항을 이륙할 때에는 아하 내가 드디어 고아가 된다는 생각에 걱정부터 몰려왔다.
난 금전적인 문제때문에 일본을 경유해서 가는 비행기를 탔다. 12시간의 긴 비행 끝에 호주라는 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날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동양인 이라고는 나를 제외하곤 일본인 밖엔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사서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제일 첫 번째로 날 반기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이민성이라는 일종의 세관 비슷한 곳이었다.
날 처다 보면서 뭐라고 하는지 한 마디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아!! 힘 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난 공항의 어느 조사실로 끌려갔다.
그기서 난 한국인 통역사를 통해 진술을 몇번이나 해야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비행기 안에서 작성한 서류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였다.(혹시 외국으로 가실 분이 있으면 서류를 꼼꼼히 작성하는 것이 좋을 듯 ...)
어째던 공항을 나왔다. 하지만 어디로 갈지 도저히...
하느님 부처님 나에게 힘을 주소서..
나의 눈물 겨운 여행이 시작되었다.
말로는 다 못할 힘던 생활이었고,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나의 인생에 한 획을 그을 만큼 소중한 시간이었다.
혹시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메일을 보내주세요...


호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은 자유여행자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저는 패키지에 의뢰하여 작년 크리스마스 부터 밀레니엄 축제를 보고 돌아왔는데.. 가이드 없이 숙소만 여행사에서 대해으로 예약했을뿐 나머진 각자 자유행동이라 그다지 제약없이 하고싶은것을 했습니다.

브리스베인은 아주 깨끗하고 조용한 도시입니다.
해가 길어서 저녁 늦게 돌아다녀도 위험하지 않구요.. 한국적인 유흥과 오락에 익숙한 분들은 심심하겠지만,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준비하고 도시 구석구석 돌아보면 시간이 금방지나갑니다.

브리스베인- 써퍼스파라다이스-콥스하버-남부카헤드-시드니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이동했는데 열차도 권합니다. 버스는 장시간을 타고 가는것은 좀 불편합니다.

시중에 나온 여행 정보지는 변화된 현지 사정을 제대로 쫓아가지 못하므로 현지 도착 즉시 숙소 주인이나 먼저 와 있는 여행객을 통해 얻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였습니다

제 경우는 호주인에게 정보를 듣고 가서 비싼 가겨에 비해 현지인들은 별로 가지않는 곳은 제외했고 시드니의 유명한다리 하버브리지 위를 걷는 코스가 있는데 가격이 비싸고 고소공포증이 없다면 예약하고 가세요, 저는 돌아오기 2일전에 갔다가 주말까지 예약이 끝나 다른 사람들만 부러워하다 왔습니다.

날씨가 덥기는 하지만 습하지 않아서 한국의 더운 가을같습니다. 저도 더워를 타는 편이지만 호주는 뚜버이 여행하기엔 최적의 날씨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태어난 이 땅 이외의 나라를 가보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 소풍가기 며칠 전부터 설레이는 것처럼 출국 보름 전부터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여행 첫째날(2월 24일 토요일)
첫째날은 비행기에서의 1박이다. 왜냐면 서울서 호주까지는 약 10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먼저 브리스베인이라는 시드니에서 약 비행기로 1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로 날아갔다. 말이 10시간이지 비좁은 비즈니스 class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10시간을 비행한다는 것이 여행 중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비행기 엔진 소리는 왜 그리도 큰지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옆에 있는 일본 애들은 중앙의 4개짜리 의자를 독차지하고 있더니 밥 먹자마자 팔걸이를 훌렁 올리고 자기 시작한다. 저런 방법이 있다니... 여행을 많이 해본 애들이 틀림없다. 돌아 올 때는 나도 체면 안가리고 저렇게 해서 자면서 오리라 다짐했다. 고도 적응이 잘되지 않아 가는 도중 내내 귀가 먹먹해서 고생했다.
비몽사몽 앉아 있는데 새벽같이 아침밥 먹으라고 승무원들이 돌아다닌다. 소리도 잘 안들리고 컨디션도 별로고 해서 승무원들의 질문에 별 대답도 안하고 있었는데 신참으로 보이는, 군기가 한눈에 확 들어있는 여승무원 하나가 다가와 뭐라고 물어 보기에 (실은 귀가 먹먹해서..) 잘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지으니까 바로 Are you speak english?한다. 잉? 왠 영어. 그래서 저 한국사람인데요? 라고 하자 무지하게 창피해하는 것 같았다.

여행 둘째날(2월 25일 일요일)
브리스베인에 거의 다와 갈 때 쯤 밖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이 눈 아래에 펼쳐진다. 야.. 이곳이 호주로구나 하는 생각이 첨 들었던 때이다.
브리스베인에 7시쯤 도착해서 시간을 1시간 앞으로 해놨다. 서울과 1시간의 시차가 난단다.
입국장으로 들어서는데 온통 벽이 푸른색이고 바닥에 카펫이 깔려있어 더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30여분 길게 한줄로 서 있다가 저쪽이 비었으니 저리 가라는 직원의 말에 순전히 눈치로 알아차리고 얼른 여권을 가서 내밀었는데 무슨 질문을 할까봐 조마조마했다. 푸른 눈의 여직원 아줌마가 나의 여권을 보더니 이 남자가 니 남편이냐고 묻는다. 이 말은 잽싸게 알아듣고 큰 소리로 yes라고 답한다. 남편도 거들어서 yes! this is my wife. 라고 했다. 아.. 뿌듯해. 내가 영어로 대화가 되다니... 영어로 대화가 되는 것을 실감하고 이곳이 외국이라는 것을 다시 느꼈다. 둘이 입국장을 나오면서 영어 별거 아니네? 라며 자신감을 가졌다. 둘이 그러고 나오는데 뒤에 섰던 아주머니 한분이 아까 그 직원하고 유창하게 대화를 나눈다. 혀를 사정없이 굴려 감서.. (움메 기죽어.)

국제공항이라고는 하지만 브리스베인은 좀 작아 보였다. 대도시는 아니고 약간은 시골로 보면 된다고 가이드가 그런다. 한국은 겨울인데 이곳은 완전히 여름이었다. 화장실서 옷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니 가이드와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첨 놀란 건 여기 차는 다 수입차라는 것이다. 버스도 볼보라는 수입차 였다. 뒤에는 변소까지 달린 차였다. 또 놀란 건 버스 시트와 바닥이 전부 양털로 덮혀있는것 이었다. 대게 우리나라는 겨울에 보온 목적으로 양털을 까는데 이곳에서는 여름에도 사용한단다. 통풍이 잘되 시원하고 땀을 잘 배출 시킨대나? 그래도 여름엔 대방석이 최곤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나라는 양들이 넘쳐 주체를 못하는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 호주 전체 인구보다 양들 수가 더 많다나? 농장 주인도 자기 양이 몇마린지 알지 못한다니....

시내가 바라다 보이는 산에 올라 브리스벤 시내를 내려다 보았다. 말이 산이지 조그만 언덕이였다. 이곳 브리스베인은 호주에 처음 정착한 영국 죄수들 중에 가장 악질 범죄자들만 이곳에 옮겨 수용했다고 한다. 이곳의 역사가 짧아 3-4대만 걸치면 자신의 첫 조상을 알 수가 있다고 한다. 그래도 현지인들에게 니 조상이 누구냐고 물으면 100이면 100이 간수였다고하지 죄수였다는 말은 안 한다고 한다. 조상이 죄수면 뭐하고 간수면 뭐 하겠는가 이 축복받은 땅에서 후손들이 다 잘 살고있는데...
브리스베인에서 차로 약 30여분 떨어진 골드코스트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휴양지로 가기로 했다. 고속도로 주행도중 역시 눈에 보이는 건 세계 각국의 자동차들 이였다. 세계 명차들의 전시장 같았다. 너무 부럽기도 했지만 우리의 소형차 액셀이 풀 옵션해서 약 2000만원 정도에 판매가 된다나? 우리나라 가격의 3배정도이다. 집에있는 레간자의 엔진이 호주 홀덴사의 기술합작이라고 선전하는걸 들었는데 실제 호주에 유일하게 있는 자동차 회사인 홀덴사는 그리 유명해 보이는 회사 같진 않았다.

골드코스트는 호주의 휴가철이면 인근 뉴질랜드 사람들까지 모이는 해변이라고 한다. 해변의 모래가 마치 밀가루를 밟는 듯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백사장도 인상적이었다. 약 41km의 백사장 길이를 자랑한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에는 이곳에서 마라톤을 한 대나? 아무튼 엄청 긴 해변이었다. 그 앞으로 펼쳐진 남태평양 그리고 섬 한 점 보이지 않고 펼쳐진 수평선은 나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였다. 오늘의 일정은 sea world라는 놀이공원 비슷한 곳의 관람이여서 그곳으로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관람전에 중국식 식당에서 만찬을 들고 난 뒤 배를 두드리며 돌아다녔는데 기대보다는 별로 볼거리가 없는것에 실망이였다. 물개랑 돌고래랑 곰들이랑 나와 쇼를 벌리는 건데 호주인들은 다들 좋다고 아우성이다. 이곳에서 한국 사람들이 반응이 젤로 무디다고 한다. 호주인들은 조그만 것에도 크게 반응을 보이고 즐거워하는 것이 역시 마음의 여유가 있는 민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전통적인 유교사상이 베어 있는 코리아의 양반이 아닌가 그것도 왕족의 후손인.... 역시 영어가 안되니 쇼를 해도 무슨 내용인지를 알 수 가 없어 재미가 덜하였다. 수상 스키등을 관람하 면서 관람석 의자말고 옆의 잔디에 우리 부부도 호주인들 처럼 로마식 와상을 한체 구경을 하였다.

호주인들은 철저히 가족주의, 개인주의라고 한다. 오후 6시만 넘으면 그렇지 않아도 땅이 넓어 사람 구경하기 힘든 곳에 다들 집에만 있어 거리가 텅 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같이 일요일 인 경우는 가족들을 데리고 휴양지나 공원을 찾아 쉰다고 한다. 옆에서 뒹굴고있는 한 가족을 보면서 개인주의를 실감했다. 아빠가 아들거 엄마가 자기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하나씩 빨다가 아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다 땅에 떨어뜨리자 엄마가 아들 손 닦아 주고 돌아와 아들은 손가락 빨고 지들만 아이스크림을 먹는게 아닌가.
우리네 부모 같으면 하나 다시 사주던지 부모가 먹던 거 최소한 한입이라도 베게해 주는게 인지상정인데 여기 사람들은 죄수의 후손들이라 저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덥고 피곤하여 빨리 호텔에 들어가 쉬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호텔에 들어가기 전에 또 한가지 해야할 일 밥먹는 일이다. 여기서는 먹는것도 중요한 일정중의 하나이다. 으... 점심 먹은 것도 아직 소화를 못시켰는데.... 저녁 식사는 또 뷔페 일명 sea food라는 중국식당인데 열대 과일 몇가지와 내가 좋아하는 닭고기 몇점으로 끝내야만 했다. 두툼하게 칼질하는 스테이크 같은 메뉴는 안나오나 하며....아쉬움을 남겼다.
어제는 비행기 안에서 잠 못자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인지 목이 점점 아파오기 시작한다. 저녁에 병원에를 가볼까 했는데 의사 얼굴 한번 보는데 보험이 되 있지 않아 20여만원 정도가 든다고 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보헙이 들어있으면 거의가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다고 한다.

여행 셋째날(2월 26일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목이 잠겨 침 삼키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또 중요한 아침 일과를 시작해야 했다. 아침밥 먹는 일... 미리 받은 쿠폰을 들고 호텔 식당을 향했다. 이곳은 식당 마다 신기한게 식당 앞에 종업원이 자리를 안내할 때까지 입구에서 서있으라고 쓰여있다. 잠깐 서있자 젊은 아가씨가 둘이냐고 물으면서 자리로 안내해준다. 앉자 마자 커피 먹을래 차 먹으래 하며 묻는다. 무슨 빈속에 커피는.... 우유나 한잔 했으면 했지만 다른 추가 질문 할까 무서워 커피라고 외쳤다. 아무튼 여기서 먹은 음료는 커피하고 콜라밖에 없다. 아는게 그거 밖에 없어서... 식사는 또 뷔페다. 이놈의 뷔페 이젠 질리기 시작한다.
뒷자리에 우리와 일행인 모녀가 식사중이다. 엄마가 종업원에게 “물 좀 주세요.”라고 하니 종업원이 What? 해가며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겠다고 하는 것 같았다. 옆에 있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딸이 더 가관이다. please water 하면 될텐데 “물주시라고요.” 물! 물! 그 모녀는 결국은 못 얻어 먹었다. 바보들... 나는 속으로 “넘일이 아녀” 라고 생각하며 한국에 가면 영어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호주 농장 견학전에 이곳 호주의 국가 보석이라는 오팔 구경을 가기로했다. 물론 쇼핑 투어 코스이긴 하지만.... 처음 보는 오팔이여 무척 신기하였다.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빛을 발산하였다. 내친김에 한국에서 우리 애들 보며 고생하시는 어머님 생각해서 오팔중에 가장 값이 나간다는 Black Opal하나를 구입했다. 첨으로 나의 마법 카드를 주욱 긁었다.
쇼핑 투어로 기둥 뿌리 하나 뽑고 오늘 일정으로 잡혀있는 호주 농장 관광에 나섰다. 실제 호주의 전통적인 농장은 대도시에서 5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야한단다. 그래서 관광용으로, 예전에 노인들 복지시설로 만들어 놓은 조그마한 농장에 호주의 전통을 보여줄 수 있는 농장을 꾸며 놓았다고 한다. 호주의 전통이라고 해봐야 부메랑 던지고 양몰이나 하고 양털 깎으며 좋아라하는 호주인들을 보고 우리의 그것에 비해 보잘 것 없는 그들의 전통 놀이에 측은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영화에서나 보던 것을 실제 보니 색다르기도 했다. 그들이 우리의 5000년 역사를 본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점심으로 제공되는 현지식, 내가 제일 기다리는 식사가 나왔다. 호주에서의 1등급 소로 만든 커다란 접시 크기의 두툼한 스테이크, 잔뜩 기대를 하고 큼직하게 미리 잘라 놓고 한점 입에 넣었는데... 기대와는 정 반대였다. 느끼하고 이상한 향신료. 에이 뭐 이래... 콜라 하나 사놓고 콜라로 배채웠다. 오후에는 호주를 대표하는 코알라, 캥거루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처음 보긴 했지만 T.V 동물의 왕국서 하도 봐서 크게 신기하지는 않았다. 다시 골드코스트 숙소로 돌아가 그곳에서 좀 떨어진 point danger라는 곳에 다녀왔다. 골드코스트와 비슷한 해변인데 모래사장 뒤로 요새처럼 암벽이 둘러져 초기 개척자들이 상륙을 포기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위험한 지점이라고 명명했나? 골드코스트에서 느낀건 대낮부터 노는 ?은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물론 휴양도시라서 그러기도 하겠지만 호텔 옆의 아파트에서는 월요일 아침부터 수영장에서 식구들끼리 수영하고 있는점도 이채롭다. 일하러 나가지 않나? 이곳 호주에서는 복지정책이 너무 잘되 있어 젊은이들이 꿈이 없다는 것이 문제란다. 치열한 경쟁속에 생존해 있는 한국의 대학생들을 데려다 놓으면 좋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업 걱정도 안하고..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러는건 아니지만 대다수가 그러하고 10%의 깨어있는 소수가 이 나라를 이끌어 간다고 한다. 실업수당이 우리 돈으로 70여만원씩 지급된다고 한다. 복지국가가 다 좋은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은 손재주가 좀 무딘 것 같다. 1차 산업 이외에 2차 산업이라고는 도무지 제데로 된게 없어 보이고 모든 것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가이드의 머리가 밤송이여서 보기 민망했는데 시간이 없어 호주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면 이렇게 된다고 한다. 한국인이 하는 미장원이 인기인데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를 수 없을 정도 이다고 한다. 이곳은 다 알다시피 다민족 국가이다. 물론 한때는 백호주의를 표방했던 적도 있었지만 죄수의 후손들이 별 수 있겠는가... 간호사들은 아직도 한국인이 많고 이민을 환영한다고 한다. 기술이 있으면 이방인도 환영이라고 한다.
저녁에는 베트남식 쌈밥인 월남쌈을 맛 볼 수 있었다. 처음에 쌀로 만든 얇은 피와 야채등이 돼지고기 약간하고 나와 실망이였다. 채소만 배불리 먹고 이게 왕족이 먹던 식사인가 하고 있는데 그 뒤로 온갖 고기며 산해진미가 줄줄이 나오는 것 아닌가 이런... 촌놈 마라톤 하다 또 망쳤다.


여행 넷째날(2월 27일 화요일)
오늘은 이곳 브리스베인을 떠나 시드니로 가야한다. 새벽부터 일어나 호텔에서 제공해준 도시락을 하나씩 들고 버스에 올랐다. 지도상에는 남쪽 바로 아래 있어 가까울 것 같았는데 비행기로 1시간 거리의 시차가 1시간이나 나는 거리에 있었다. 호주의 콴타스 항공을 이용해 시드니에 도착했다. 콴타스의 기내 서비스를 받아보고 느낀건데 우리나라 대한 항공이 훨씬 나아 보였다. 여자 승무원들 얼굴 쳐진건 둘째고 기내 서비스 음식을 테이블에다 거의 휙휙 던지는 수준이다. 역시 죄수의 딸들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드니는 브리스베인에 비해 대도시다운 면모를 갖추었고, 거리의 사람들도 많았다.

호주는 특이한게 학교 건물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건물들이 기껏해야 1, 2층으로 되어있고 운동장도 잔디밭으로 되어있고 그나마 커다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어 쉽게 학교라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
오늘의 일정은 시드니의 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져있는 블루 마운틴이라는 산에 오르는 일정이다. 호주의 동과 서를 가르는 거대한 산인데 산에 온통 유칼립투스 나무가 덮여 그 나뭇잎에서 나오는 알콜 성분이 증발하면서 태양빛에 반사되어 산전체가 블루 color를 보여 블루마운틴이라는 이름을 갖게되었다고 한다. 산 전체를 샅샅이 둘러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보고 감탄했다는 세자매봉이나 산정상서 밑까지 놓여있는 경사 50도의 궤도열차, 케이블카는 산의 일부분이나마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예전에는

이곳이 모험가들에 의해 서쪽으로 가는 길을 찾는 미개척지였다고 한다. 그 후로 석탄을 캐기 위한 탄광으로 이용되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고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중이라고 한다.


산을 둘러 보고 버스로 이동하는 데만 해도 왕복 3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이곳 호주는 땅이 넓어 한번씩 이동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새벽에 일찍 일어난 탓에 오는 길에는 내내 잠만 잔 것 같다.
시드니 시내로 다시 들어와 일찌감치 저녁 식사를 하였다. 카지노 호텔에 있는 뷔페에서 다양한 외국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여러 뷔페 중 그래도 다양한 세계음식을 맛볼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여전히 외국음식의 독특한 향신료와 조미료는 입에 맞지 않았다.

* 블루 마운틴의 케이블카 일정 마지막 밤이 돼서야 condition이 조금 낳아졌다. 남편이랑 배도 출출하고 해서 호텔밖을 나가보기로 했는데 해변가여서 인지 늦은 밤에도 많은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호텔 옆에 무슨 club이라고 씌여진 곳이 있었는데 연신 젊은이들이 들락거렸다.
노천 카페에서 가볍게 음료수 한잔 마시고 싶은 맘이 간절했지만 이방인이라고는 우리 뿐이라 선뜻 가게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자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여행 마지막날(2월 28일 수요일)

오늘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시드니 시내를 두루두루 돌아본 뒤에 저녁 8시 비행기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것이 그렇듯 집 생각도 나고 애들도 보고 싶고 아쉽기도하고 만감이 교차한다. 아침 일찍 이곳 시드니에서는 가장 유명하다는 본다이 해변가로 향했다. 특히 이곳은 남태평양으로부터 밀려오는 높은 파도로 유명해 서퍼의 천국이라고 한다. Bondi 라는 말은 원주민어로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라고 한다. 날씨 아름다운 시드니항의 야경 가 좋으면 발가벗고 햇빛에 걸신들린 여자들이 지천이라는데 오늘은 구름이 끼어 그런 여자들은 보지 못해 아쉬었다. 남녀불문하고 아랫배는 한짐씩 나와 내 배는 그 사람들과 비할바가 못됐다. 저토록 비만이 심하니 사망률 1위가 심장병이지 않나 생각이 든다. 깨끗하고 정돈이 잘된 시드니 주택가를 돌아보며 선택받은 사람들이란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본다.
시드니 외각서 시내를 내려다보니 사진에서만 보아왔던 오페라 하우스며 하버브릿지가 눈 앞에 실물로 펼쳐졌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세계최대의 수족관중의 하나라는 시드니 수족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달링하버 항구의 오른쪽에 위치해 바다 밑으로 설계가 되어 약 5000종의 해양 생물이 대형 수족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길이 3m가 넘는 대형 상어를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큰 몸집의 상어가 유유히 바다밑 터널 위를 지나갈 때는 등골이 오싹해지기도 한다. 과거 이 터널이 무너져 난리였다고 한다. 수족관 곳곳에 비꺽거리는 음향 시설이 마치 바다 밑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게 했다.

점심 식사 겸 허버크루즈 탑승을 위해 시드니항으로 향했다. 선상뷔페가 한정되어 있어 선착순으로 탑승 및 식사순서가 배정되기 때문에 일찍 도착해야 한다고 한다. 가이드 말로는 중국인이 한번 지나가면 음식이 남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식사 도중 제일 소란스럽고 예절을 지키지 않는 민족은 우리 한국인이 아닐까 싶다. 특히 그이름 자랑스러운 아줌마들... 한줄로 서있는 식사 줄에 끼여들기 예사이고 음식은 왜 그리 많이도 집어 가는지 도대체가 뒤에 서 있으면 남는 음식이 없을 정도이다. 하도 내 앞으로 끼여들기에 한줄로 서라고 영어로(one-line)이라고 말했더니 앞에 있는 아주머니가 쪽 팔렸는지 미안합니다 라며 뒤에 있는 일행에게 “한줄로 서래“ 라고 한다. 아마 나를 중국인이나 일본인쯤으로 봤나 싶다.


이런데서 나라 망신을 시키다니... 이런 상황에서는 스미마셍...(일어로 미안하다라는 뜻)이라고 해야지...

세계 3대 미항 이라는 시드니 항만을 배로 둘러 본 뒤에 그 유명한 오페라 하우스를 보러 발길을 향했다. 오페라 하우스 옆에 있는 하버브릿지도 시드니의 명물중의 하나인데 시드니를 마치 서울 강,남을 잇는 다리처럼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길이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다리라고 한다. 높이가 무려 134msk 되어 그 다리를 등반하는 것이 3시간 짜리 투어로 있다니 별걸다 관광으로 삼는다 싶었다. 다리의 외관상 다리색과 동일한 복장을 착용하고 안전 장치를 한뒤 다리 난간을 오르면서 시드니항과 시내를 구경한다고 한다.

오페라 하우스의 가까이서 본 모습은 멀리서 사진으로 보던 모습 보다는 덜했다. 이곳의 독툭한 지붕은 컷팅된 오렌지의 조각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무려 14년의 공사기간을 거쳐1973년에 완공이 되었다고 한다. 내부 모습을 보았으면 했지만 많은 관광객이 내부에 들어 올 경우 특별히 고안된 음향시설에 손상을 줄 수 있어 철저히 내부통제를 하고있었다. 사진으로만 봤던 오페라하우스의 하얀 지붕 타일도 만져 보고 시드니가 이거 하나로 관광수입을 버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오후에는 시드니 타워를 둘러 본 뒤 마지막 일정을 접어야 했다. 시내 중심가의 centre point building을 통해 올라 갈 수 있는데 높이 305m로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잇는 곳이였다. 오랜만에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시드니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저녁 9시 비행기를 타고 또다시 장장 10시간의 비행을 기대하며 서울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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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yun씨의 브라질 남부 여행기....
1.10. - 1.15. Porto Alegre & Serras Gauchas


1.11. Sun A1:58
남쪽으로 떠나는 2번째 여행은 Belo Horizonte의 Pampulha 공항에서 시작했는데, 문제는 아침 6시까지 집합이라는 것이었지. 차량 처분 문제로 시간 여유가 거의 없었기는 해도 기분좋게 브라질에서의 마지막 여행을 즐기려 했지. 그렇지만 밤을 거의 꼬박 새우고 아침을 맞이해야 했어. 잠도 안오는데다가, 일찍 일어나는 것에 자신이 없으니까 잠깐씩도 마음 편히 잘 수가 없더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깜깜한 A5:35에 호텔을 나섰어. 하지만 그 시간에 택시는 정말 거의 없더라구. 겨우 하나 잡아타고는 "Rapido!"(라피도가 아니고 하삐두야. 빨리 가자는 얘기지) 수속을 편히 끝내고 비행기 출발시간을 기다렸어. 막상 공항 대기실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지난 주 동안에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더라구. 끔찍했어. 비행기는 브라질 답게 역시 30분이나 늦은 A7:00에야 움직이기 시작했어. 직행이 아니고 일단 Sao Paulo의 국내선 공항인 Congonhas에 들르더군. 여기서 Rio와 Sao Paulo에서 출발했던 사람들을 태우니까 좌석이 비로소 꽉 차더라구. 여름휴가(여긴 여름이니까)때 남부전통문화를 보러가는 사람들이라... 12월의 북동부지방 방문 때하고는 역시 구성원들이 완연히 다르더군. 색깔이 하얀 백인들이 많다는 것은 같았지만, 장소가 장소니 만큼 평균나이가 약 20세는 위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 50대 부부들이 가장 많았고, 가족동반은 별로 없었어. 노부모를 모시고 온 사람들도 꽤 있었고, 젊은 커플들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겠더군. 이래서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피곤했던데다, 야밤에도 술 먹을 일이 없이 조용하게 지나가리라는 것은 분명해 진 셈이지.

남부지방에서 Curitiba와 Florianopolis와 함께 가장 큰 도시인 Porto Alegle(한국말로는 "신나는 항구"가 되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A10:00. Congonhas AP에서 1시간20분이 걸리더군. 공항은 아주 깨끗하고 세련된 외관이었어. 특히 실내가 금연인 거야. 놀랍더군. 내가 알기로는 중남미에서 거의 유일한 금연공항이 될 거야. 중남미는 가히 흡연자들의 천국이라고 할 수가 있을 정도거든. 그런데 그런 곳에 금연공항이 있다니... 공항의 이미지는 참 중요해. 잘만 관찰하면 처음 도착한 도시의 분위기를 한 눈에 알아 볼 수도 있거든. 넓은 강의 下口 평야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Porto Alegre는 당초 내가 처음 올 때부터 먼저 가보려고 했던 도시일 정도로 특별히 관심이 많았었어. 이번에 여기에 온 이상, 이젠 지난 7개월 동안의 선택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를 금방 알 수가 있게 될 것이니 말야. 궁금하지? 지금 생각으로는 내가 큰 선택의 실수를 한 것이 분명하더군.

날씨는 화창하게 개어 있었는데, 땀이 날 정도로 덥지가 않더라구. 그래서 새삼스럽게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았지. 여기 여름날씨가 보통 이렇느냐고. 그랬더니 그렇다는 거야. 갑자기 지난 겨울에도 반팔 티셔츠만 입고 살았던 Belo Horizontr의 요새 날씨가 떠오르더군. 비가 오지 않는 날의 밤은 차라리 밖에 나가 밤새도록 맥주나 마시는 게 밤을 지새우는데 훨씬 쾌적하거든. Sao Paulo는 오히려 더 찌는 것 같고. 버스 앞 그늘에 서서 담배를 피우면서 물끄러미 사람들을 모고 있으려니 운전기사(Gustavo라는 이름의 이 친구는 벌써 나의 열렬한 팬(?)이 되어있을 정도. 나중에 쓸께.) 말고는 99%가 백인들이더군. 더구나 주변에 지나다니는 이 곳 주민들을 보니까, 택시기사며, 공항직원이며, 놀러나온(?) 아이들 등등 하여튼 아주아주 하얀 사람들 밖에 없는 거야. 다소 눈에 익질 않아 처음에는 여기는 브라질이 맞는데 하고 생각을 다시 할 정도였으니까.

이탈리아系 이민인 가이드는 40대의 뚱뚱한 여자였어. 걷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숨이 찬, 이 푸른 눈의 금발이긴 해도 뚱뚱해서 못생긴 아줌마는 말소리가 워낙 작은데다, 자금까지 만났던 가이드중 가장 빠른 언어실력을 구사
해서 예전 북동부지방의 Helen이 그리워질 정도더군. 더군다나 유머감각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이 사무적인데다 우리 버스안에 탄 일행들이 모두 점잖아서 더욱 실내가 썰렁하게 느껴졌어. 버스는 Porto Alegre의 외곽을 빠져
나가 첫번째 도착지인 이 Rio Grande do Sul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Caxias do Sul로 향하고 있었지. 간밤을 잠을 거의 못잔 상태였으니까 비행기에서도 내내 졸았지만, 버스에 타자마자 귀에 이어폰을 끼고 아예 뻗어버렸어. 날씨도 마침 좋았으니 아주 잠자기에는 최적이었지. 밖을 구경을 하긴 해야하는데, 돌아오는 날을 기약하고는 2시간쯤 잤을까. 1:20에는 버스가 서더군. Caxias Do Sul의 Alfred Palace Hotel. 이름부터 유럽式 느낌을
물씬 풍기는 이 Hotel은 시내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실내가 아주 넓고 쾌적해서 대단히 흡족했어. 점심은 각자 해결하고 8시까지 모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급한대로 샤워를 하고는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어. 이 도시에는 하루만 묶을 예정이니까 일단 시장조사가 급했던 거야. 다시 들를 일도 없고.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는데, 거리의 깨끗함이 일단 놀라울 정도더군.

물론 주민들은 대부분 백인들이었어. 어디 나가면 브라질사람이라고 하겠지만 도시가 이탈리아系인 만큼 언듯언듯 유럽에 와 있나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하여간 믿을 수 없을 정도였어. 막판에는 지쳐서 옆에 붙어있는 Carrefour는 겨우 조사를 마치고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어. 하지만 샤워를 다시 할 필요는 없더군. 정말 좋은 동네지. 좀 쉬다가 8시에 로비로 내려갔어. 그리고 간 곳이 시 서북쪽에 있는 유명한 포도전시장이었어.

1998.1.13. Tue A1:58

이름이 Pavilhoes da Festa Nacional da Uva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가장 유명한 곳중 하나라고 하더라구. 도착을 해서 가만히 보니 주차장 하나 만큼은 정말 엄청나게 넓더군. 날씨가 어두워져서 제법 쌀쌀했는데, 야외에 가
설한 관람석에 가서 앉아있으면, 곧 이 곳에 처음 정착한 이탈리아 이민의 얘기를 재구성한 쇼를 보여준다는 것이었지. 하지만 30분도 더 기다리고 앉아있자니 은근히 배도 고프고, 춥고...(관광버스들이 모두 도착한 후에야
시작을 하는건데, 우리가 탄 버스가 1착이었거든.) 그래도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이탈리아, 독일의 전통무곡들이 분위기는 흥겹게 만들어 주고 있었어. 드디어 쇼가 시작이 되었는데, 관람석 바로 앞 야산에 지어 놓은 옛날
집들과 주변의 나무 숲 사이사이에 온통 조명장치과 라디오 드라마式의 대화구성 뿐이라 저으기 실망스럽더군. 손녀가 할머니에게 그 때(이민 올 때) 이탈리아가 어땠는데요 하고 물으면, 갑자기 번쩍번쩍 조명이 들어오면서 스피커에서는 온통 총소리, 대포소리에 나무 숲 사이로 폭탄효과를 내느라 연막탄이 터지는, 뭐 이런 정도니까 내 수준에는 맞질 않잖아. 그래서 과감히 무대를 벗어나 입구 주변에 모여있던 여행사 직원들하고 친분을 두텁게 하기로 한 거지. 드디어 쇼가 끝나고 기다리던 저녁식사를 하러 움직이기 시작했어. 간 곳은 아주 넓은 전통적인 남부 불고기집(Churrascaria)이었는데, Gianella라고 하더군. 아직 일행들과 인사도 제대로 나누질 못한데다 여러 팀이 동시에 섞이니까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 지를 모르겠더군. 더구나 무대에서는 신나는(나는 전혀 신나질 못했지만) 삼바음악을 아주 시끄럽게 연주를 하고 있어서 더욱 불만스러웠어. 시간도 많이 늦은데다, 컨디션이 좋지를 않으니 입맛도 없더군. 그래서 적당히 감자만으로 때우고는 먼저 Hotel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장소가 교외에 있다 보니까 택시가 없는 거야. 이 때 나타난 구세주는 바로 엄청 부지런하게 돌아다녀 말 붙이기도 어려웠던 식당 지배인이었어. 몇 마디 부탁을 하며 피곤한 표정을 강조(?)하고 있었더니 글쎄 5분 뒤에 자기가 직접 태워다 주겠다는 거야. 그래서 일단 안면이 있는 일행중 하나인 어느 모녀(40대 중반의 백인여자와 나중에 알았지만 12살치고는 나보다도 덩치가 더 큰 외동딸, 님편은 건설회사에 다니는데 하도 바빠 둘이서만 왔다고 했음.(Rio de Janeiro 거주)에게 나중에 가이드를 보면 나 먼저 갔다고 얘기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자기들도 마침 일어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더군. 그렇게 해서 아주 편안히 Hotel로 돌아왔어. 덕분에 이 모녀와 친하게 되는 계기도 생겼고. 나중에 쓰자면 잊어버릴지도 모르니깐 일단 소개를 조금 하자면, 하여튼 이 모녀는 Rio에 거주하는 중산층인데, 전형적인 인종차별주의자였어. 그렇다고 노예를 보듯이 Moreno(혼혈)나 Mulato(흑인)을 보는 것은 아니고, 단지 같이 생활하고 어울리기에는 전체적으로 좀 위험하고 지저분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경제력을 가진 동종의 백인들과만 어울려 사는 편이 자기들에게도 편하고, 또 그렇게 해야지만 브라질 중상류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다고 믿고 있는 거야. 한 예로 Viviane라는 딸이 다니는 사립학교엔 Moreno가 전교에 3명 밖에 없다더군. 소개할 때 이런 얘기를 먼저 쓰는 이유는 바로 이 브라질의 구조적인 모순을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 이미 전에도 겉과 속이 다른 정치권의 정책과 사회적인 인종차별금지법과 대단히 심각한 부의 편중 현상 등에 대해서 얘기를 했었잖니. 실제로 소수의 백인들이 느끼는 체제내에서의 우월감과 집권욕은 나와 같은 외국인들이 겉에서 흘낏 쳐다만 보더라도 아주 확연하게 드러나 있어. 그런데 이상하게시리 까만 애들은 왜 이 점을 간과하고 있을까. 브라질이 거센 사회적 동요에 휩쓸리기를 바라는 것 같은 발언이지만, 하여튼 이 나라의 전반적으로 낙후된 교육수준(북쪽으로 가면 갈수록 Moreno와 Mulato들이 많아지고, 그에 비례해서 교육수준이나 사회적/경제적 수준들이 낮아지지.)부터 시작해서 축구나 삼바, 휴일 즐기기 등에만 온통 신경을 쓰는 국민적 취향이 "인지"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거지. 브라질 사람들이 화나면, 원래 국민성이 열정적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단히 폭발적이거든. 하여간 내 생각으로는 언젠가는 한번 크게 터지기는 할 거야. 브라질의 내재된 구조적 위기임에는 틀림없으니까. - 하여튼 이 모녀하고는 다음부터 식사시간 만큼은 내내 같은 테이블에서 앉아서 지낼 만큼 잘 지내고 있어.(혹시 속으로는 동양인도 Moreno와 동급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의심도 들지만... 내가 그리 돈이 없게 보이지는 않을테니 그럴리는 없겠지.) 얘기도 아주 잘하고, 보험회사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는 것도 많아서 하여튼 재미는 있는 사람들이지.

Hotel에 돌아온 시간은 밤 11:20. 무지무지 피곤해서 거의 기절 직전이었어. 이틀째인 1.11.(日)의 집합시간은 아침 08:30이었는데, 점심전까지는 시내를 빙빙 돌더군. 일단 어제 시장조사를 하면서 대강 본 탓에 별로 흥미도 없는데다, 잠이 덜 깨서는 내내 구석에서 졸기에 바빴어. 특별히 기억할 만한 장소로는 이탈리아 이민이 처음 와서 정착한 낡은 집(Museu Casa de Pedra, 돌집박물관이 되는군.)하고 프레스코畵로 온통 벽들을 장식한 Igreja Sao Pelegrino가 있었지. 그러니까 이 도시는 이탈리아 이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백인들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보면 될 것 같네. 관광객들을 데리고 가는 곳들은 거의 이민기념탑, 이민박물관, 이민 초기 교회... 그 외에는 주요 산업인 포도밭이었으니까 말야. 그래도 역시 백인들이 주로 사는 곳인 탓에 거리도 아주 깨끗하고, 집들도 깔끔한 것이 조금씩 여기는 전혀 브라질같지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더군. 다만 이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축구팀(작년에 국내리그에서 우승했던) Gremio에 대한 열정 하나는 브라질답더라구. - 하지만, 뭐 이탈리아도 축구에 온통 미쳐있긴 하잖아.

점심은 악몽이었어. 역시 이탈리아식당인 Pao e Vinho(빵과 포도주)란 이름이 있는 곳이었는데, 주메뉴로 나온 음식이 닭고기였거든. 빵 2조각에 냄새나는 치즈만 먹고 돈을 내고 나오자니 참 억울하더군. 일행들이 전에 없이
많은 위로(?)를 해주기 시작했는데, 이 때부터 이 번 여행이 재미있게 바뀌게 되었던 거야. 대부분 40대 후반의 중장년 부부들이었지만, 모두들 나한테 많은 관심과 호기심을 느끼고 있더군. 더구나 유일한 개인에다가 닭고기
와 돼지고기조차 먹지 않는 이상한 습성의 동양인이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한 가지 더 얘기하자면 일행중 Sao Paulo, Rio de Janeiro에 비해 소수인 Belo Horizonte에서 살고 있는 Minas 출신(?)이거든. 우리 Minas 출신끼리는 전에 없이 많은 동질감을 느낀다니깐... 허기가 진 채 1시간을 차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새삼 이 남부는 풍광이 참 뛰어나다는 생각을 했어. Minas州는 광석이 땅 속에 많이 묻혀 있어서 그런지 산들이 온통 밋밋하고 나무도 별로 없어 아주 멋이 없거든. 그런데 여기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더군. 갑자기 작은 도시가 나타났는데, 여기서 부터 이 남부의 매력에 한껏 끌리기 시작하게 되지. 이름은 Nova Petropolis. Petropolis는 RJ 북쪽에 있는 휴양도시잖니. 이 도시에는 Nova(=New)가 붙은 것을 보니 나중에 구분을 하기 위해 그런 것 같아. 흰 회벽에 나무를 격자로 장식해 놓은 집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는데, 이 건 영락없이 전형적인 독일의 가옥형태잖아. 눈에 띄는 사람들도 눈썹까지 노란 게르만족들이 대부분이고, 이 사람들이 포르투갈어를 쓰는 것이 너무도 이상하게 보일 정도더군. 농업, 과실재배, 관광산업이 주산업인 이 작은 독일도시는 가이드 얘기에 의하면 이민 초기 통합과정에서 대다수인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아주 큰 골칫거리였다고 하더군.(가이드가 이탈리아系라고 했지.) 민족이 다른데다, 종교도 달랐거든.(改新敎!) 그래서 좀 박해를 하긴 했나 봐. Centro라고 얘기는 들었지만, 전혀 Centro답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공원을 둘러 보고는 유명한 가내수공업인 직물의류가게들을 구경했어. 이 번에 오픈했다는 아주 큰(이 곳 기준) 쇼핑센터 정문에선 마음씨 좋게 생긴 4사람의 독일 이민 후손들이 신나게 독일민속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아코디온을 연주하던 할아버지의 흥겨운 몸짓이 참 보기만 해도 즐겁더군. 지나가는 차마다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이 그렇게 유럽的일 수가 없더군. 그리고 나서 방문한 곳이 이 도시에서 최고 명소라는 Parque Aldeia do Imigrante였어. 자그만 호수 주변에 모여 살던 독일 이민들 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을 빙 둘러 공원을 만든 거지.

Caxias do Sul에서 조금씩 느끼던 "여긴 브라질같지가 않군."이 이 Nova Petropolis에서는 "여기가 브라질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하여튼 케사르시대엔 그 무지막지했던 야만족들이 어쩌면 이리도 오밀조밀 예쁜 전통문화를 가꾸어 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길가 주변의 전통 흰 회벽을 칠한 집들이나, 상점의 아기자기한 진열장들, 독일 특유의 글씨체로 써놓은 포르투갈어 단어들, 노랗다 못해 하얗게 보이기까지 하는 사람들 머리색깔들이며 너무도 깨끗하게 잘 정리된 거리 풍경들에 계속 감탄을 하기 바빴어. 더구나 공원 안은 100% 독일이더군. 예전에 독일에 몇 번 출장을 갔을때 남은 기억들이 이런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해 주었지. "아, 처음부터 여기와서 지낼 것을..." 후회가 막급하더군. - 난 2주 후에는 서울로 떠나는데 말이야...

그리고 이 공원에서 드디어 그 유명한 카우보이들의 茶인 Chimarron(쉬마헝)을 맛을 보았지. 나무 통으로 만든 머그컵만한 큰 잔에 茶잎을 가득 쑤셔넣고는 거기에다 뜨거운 물을 붇는 거야. 그러면 위에 떠있는 茶잎때문에
茶를 마실 수가 없잖아. 그래서 금속으로 된 담배 파이프같은 것을 꽂아 茶를 마시는데, 큰 잔에 계속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아주 오랫동안 마시는 거지.(뜨거운데다, 보온이 잘 되니 여간해서는 빨리 마실 수도 없지.) 하여튼
좀 웃기는 방식이지만, 그런대로 멋은 있더군. 茶맛은 별로였지만 말야. 가능하면 여기서 Chimarron Set를 사가지고 가고 싶어. 남부의 상징이거든. 남부사람들은 Gaucho라고 해. Gaucho들은 카우보이로 대표되는데, 거칠
고 남성적이지. Gaucho 문화는 Churrascaria와 카우보이들이 즐겨 마시던 Chimarron으로 특징지워지는 것이 일반적이야.

한 참 독일式 분위기에 젖어서는 다시 버스를 타고 출발을 했는데, 깊은 계곡을 따라 갈수록 풍경이 아름다워졌어. 산 속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집들의 색깔들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어. 그러다 깜박 잠이 또 들었는데, 버스가
정차를 하더군. 이제 7일 밤을 묶게 될 Gramado의 입구에 도착을 한 거지. 아직 이름을 잘 모르겠지만, 입구엔 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화사한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어. Cidade de Cor - 色의 도시라고 입구 안내문에 써
있었는데, 흐흐흐... 기대가 되더라구. 일단 시간이 늦어서 먼저 예약된 Hotel로 들어왔지. Billa Vella라고 하는 이 Hotel은 계곡 밑으로 세워진(입구가 가장 높이 있는) 6층짜리 멋진 건물이었어. 시내 중심에 위치한 가장 좋은 Hotel "Serra Azul"에 묶는 일행들은 먼저 내렸었고, Villa Bella는 약간 외곽에 위치하고 있지. 그래도 여긴 좋은 Hotel임에는 분명해. 방을 배정받고 들어와 창문을 여니 밑으로 깊고 넓은 골짜기가 펼쳐져 있는데, 거의 환상적이더군. 그러니까 여긴 내가 브라질에 와서 처음 다녀 온 SP 근교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Campos do Jordao하고 거의 풍경이나 도시구조가 비슷하더군. 일행중에 그 곳에 다녀온 적이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얘기를 하면서 내 생각에 동의를 해 주었지. 정말 비슷해. 하지만, 중요한 것. 여기가 훨씬 낫다는 거야. 하여튼 모르면 Campos do Jordao의 그 비싼 Hotel에서 묶으면서 거기가 최고라고 흐뭇해 하는 수 밖에 더 있겠니.




도미니카는 우리나라에서 가려면 뉴욕가지 가서 그곳에서 3-4시간 비행기로 가면 도착할수 있습니다... 무지 멀죠?
중미의 섬나라 이구여... 스페인어를 쓰고....종교는 카톨릭이 90%정도 됩니다....
산토도밍고(수도)공항에 도착해서 차로 2-3시간거리에 있는 산디아고라는 제2의 도시에 머물렀습니다.....산토도밍고는 바닷가라 습하지만, 산디아고는 산으로 둘어쌓인 분지라 건조한 날씨였습니다....

우선 도미니카의 과일에 대해 이야기해 볼려구 합니다.....
산토도밍고에서 산디아고로 가는 사이 길에서 파는 과일맛을 봤거든여....
과일은 열대지방에 있는 대부분의 과일이 있는데....

우선 코코넛입니다.. 태국 가서 먹은 코코넛....정말 먹기 힘들었습니다.... 약간 비위가 상하죠....
여긴 태국에 비해 코코넛 맛이 괜찮습니다..... 단맛이 더 강하고, 비릿함이 적어여.

그리고, 둘째로 아보카도 입니다. 하하... 아보카도도 아픈 기억이 있죠....
미국에서 첨 아보카도 사서 먹었을때...
이렇게 맛이 없는 과일이 있나 싶어서 씨가 하도 크길래
씨를 먹는 과일인가 했었죠....
여기 아보카도는 미국의 아보카도의 한 3-4배쯤 큰것 같아여.....
자르는 방법도 있답니다....
4등분해서 씨를 제고하고 껍질을 손으로 까서 칼로 조각 조각 내더군여... 그 위에 약간의 소금을 뿌리고 그냥 먹습니다....
마치 맛이 버터나 유제품으로 음식을 한것 같은 맛이 나더군여.....
왜 이런걸 먹나 싶었는데... 저도 이젠 그 맛을 좀 알듯 합니다....

망고와 파파야도 먹었는데.... 망고 무지 크고 맛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망고를 좋아합니다....)
파파야는 수박만한 크긴데여...
몇년을 그곳에서 살아도 못 드시는 분이 계시데여....
약간 뭐라그럴까.... 표현하기 힘든 맛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첨 먹어보는 과일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건 치놀라와 뿔라따노입니다.
치놀라는 레몬보다 좀 큰 크기이구여...
레몬 색갈이 겉 표면이 정말 정말 쭈글쭈글 합니다....
반을 잘르면 두꺼운 흰 과육이 나오는데.... 그건 먹는거 아니구여...
안에 씨와 씨를 덥고 있는 물컹한 것을 먹는 거에여...
보기엔 그리 맛있어 보이지 않는데여...맛은 상큼한 레몬 맛이에여...
이것도 먹기에 괜찮았어여....

그리구, 또 하난 뿔라따노 인데여.... 바나나 사촌이에여....
여기선 밥 대신 먹는거래여.... 잘라서 기름에 튀겨서 먹는데여....
하나에 1페소 우리나라 돈으로 80원임다...
초록색은 고소한 맛이구여... 노란색은 단맛이 많이 나는데...
이것두 참 맛있구여... 밥 대용이 될듯 하더라구여....

그리고, 한국에도 많이 있는 바나나, 파인애플을 먹었습니다.....
바나나는 한국에 있는것처럼 약품처리 한게 아니구여...
파인애플도 많이 먹었는데 정말 달고 맛있더군여...
음식점에선 대부분 후식으로 겉이 초록색인 오렌지가 나오는데...
그건 미국산 오렌지가 더 맛이 괜찮은것 같구여...(껍질이 두껍더라구여..)
여긴 대체적으로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과일이 맛이 있어 보이진 않아여...
쭈글 쭈글 하기도 하고 오래되 보이기도 하고....
그러나 맛은 모양에 비해 끝내줍니다도착한 첫날은 산디아고에서 1박을 하구여....
그 다음날은 그 유명한 카리브해를 갔습니다.
산디아고에서 차로 2시간거리에 있더군여.....
카리브해는 대체로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이 여행오는 휴양지입니다....
쁘에레또 뿔라따라고 하는 도시에 해안가를 따라 호텔촌이 있는데여.....
호텔촌 안에는 호텔과 골프장, 승마, 해수욕, 레포츠 등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요즘 시즌(10월경)은 유럽 사람들이 거의 90%(독일인이 많아 보이데여..),
그리고 미국인, 도미니카인 등 기타가 10%정도 된다고 합니다....
호텔에 투숙하게 되면 아침, 점심, 저녁 식사와 무제한의 음료와 술이
제공됩니다....
식사는 뷔페형식으로 먹는데여, 특히, 저녁엔 랍스터가 무지 맛있더라구여....그리고 거기에 가면 꼭 먹어야 하는 음료가 있습니다.
바로 '피나 콜라다' 라는 음료 입니다.
열대과일로 만든건데...이것두 맛이 괜찮더군여....

바다 색갈.... 멋진 코발트 색갈 이더군여...
사진으로 보셔야 그 색갈을 느낄 수 있을듯 싶습니다.
도저히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군여..... ^^
풀장은 두 곳이 있습니다. 호텔 안쪽에 하나, 해변 바로 앞에 하나,
해변 앞에 풀장은 거품이 나오는 탕과 물속에 앉아서 음료를 먹을 수 있는 바가 있습니다. 물론 거기서 먹는 음료도 모두 공짜 입니다...
저녁에 되니까 각종 공연을 하고, 공연후엔 공연장이 거의 디스코텍이 되더군여..... 그 나라 전통음악에 맞춰 뚱뚱한 아줌마들이 무지막지 흔들더군여....
세계 어디를 가든 저녁엔 카지노에 들리게 되죠? 쬐금 당겼습니다....
루울렛을 구경했는데.... 생각보다 재미 있더군여...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하하....

저희 일행이 그 호텔에 유일한 동양인었습니다...
그래서 그 호텔에서 우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이 우릴 두고 일본인지, 한국인인지 내기를 했다고 하더군여.... 분명하게 한국인이라구 말해줬습니다.
유일한 동양인 여자였던 전 도착서부터 다닐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쫓아다녀 아주 곤란 했습니다... 하하...
도미니카에 중국인들이 대략 만명정도 산다고 하는데, 하나도 보이지 않더군여...
세계 어디를 마찬가지 듯이 돈 버느라 바쁜가 봅니다... ^^

(tip : 도미니카 사람들이 동양 남자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데....
여자들은 매우 신비롭게 느껴서 인기가 좋다고 하네여....
결혼 안 한 한국의 여성분들 신. 비. 랍니다!!)

거긴 원피스 수영복은 아주 어린아이거나, 할머니들만 입습니다.
(물론, 어린아이나 할머니도 비키니 입습니다.)
다들 아시듯이 햇빛만 나면 여자들이 훌렁덩 훌러덩 비키니의 웃옷을 벗어대서리....
첨에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참 난감했습니다....
좀 시간이 지나니까 그냥 그려려니 했습니다.....
사진 몇 장과 캠코더로 다니면서 찍었는데....
거기에 혹시 엽기적인 그녀들이 찍혔을 겁니다.
암튼 이렇게 1박2일의 카리브해에서의 일정을 마쳤습니다.
그냥 몇일 그 곳에서 보내면 정말 좋을것 같은 아쉬움을 남기구여.....

이번엔 이 곳에서 살 맘이 있는 분들을 위해(있을지 모르겠지만..^^)
여기 날씨와 주거 문화와 교육,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날씨는 적도부근이기 때문에 물론 덥습니다....
낮 기온은 대약 40도정도 되는것 같아여.... (근데, 그늘은 시원하더라구여..)
한국과 같은 북반구이기 때문에 12월경이 겨울이라고 하네여....
겨울이 되면 저녁엔 폴라T를 입을 정도로 춥다고 하는데... 제가 겪고온 날씨로는 상상이 되지 않더군여....

이 곳은 빈부의 격차가 심해 어떤이들은 집의 끝이 보이지 않는
대저택에서 살고, 어떤 사람은 천막같은 곳에서 살기도 합니다.
여긴 한국에서 처럼 네모반듯한 건물들 아니구여...
유럽풍의 건물들이 대부분 입니다... 건물은 이쁘게 잘 짓는것 같아여..

제가 머문 집은 대체적으로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있구여...
5층짜리 빌라 3동이 한 단지를 이루고 있는데여....
(여긴 주거지역으로 5층 이상가는 건물은 없습니다....
한국에서의 10- 20층짜리 아파트는 없다고 보시면 맞습니다..)
그리구 어느 건물이든 그 건물을 관리하는 경비가 한 명씩 있데여...
총 들고 근무 합니다.....이런 경비가 없는 단독주택은 좀도둑이 든다고 하네여..(치안은 중,남미중에 제일 괜찮다고 합니다...)

집안으로 들어와 볼까요?
4개방과 4개의 화장실 2개의 거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일 의아한 것이 화장실의 갯수입니다.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한국은 이 정도 평수면 2개 정도면 적당할 겁니다....
그 이유는 방과 거실의 용도를 안다면 끄덕일수 있을 겁니다.
여긴 식모방이 따로 있습니다,,, 옆의 아이티라는 나라의 값싼 인력땜에
거의 식모를 둔다고 하네여... 식모방에 딸린 화장실이 있구여....
거실이 둘로 나눠져 있는데...
하나는 식구들이 생활하는 거실, 하나는 손님접대용 거실입니다...
(한국식으론 이해할수 없는 일입니다. 거실을 둘로 나누면 공간이 작아지잖아여.)
손님용 거실에 손님이 사용하는 화장실이 하나 있구여...
안방에 화장실 하나, 식구들이 쓰는 화장실 하나, 이렇게 해서 모두 4개입니다....
물론 돌아보니, 독신자용으로 작은 평수의 아파트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지만, 이 지역은 대부분이 40-50평인걸 보면 보통은 이런 구조입니다...
(물론, 100평이 넘는 집도 많습니다...)
한국에선 가장 비싼 층이 가운데 층이잖아여....
여기선 제일 비싼층이 1층입니다... 보여주는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다네요...위로 갈수록 싸 집니다....
한국돈으로 월세가 4-50만원정도 라네요....
여긴 전세가 없구여... 모두 월세입니다...

다음은 교육입니다....
현지인들이 다니는 학교와 외국인이 다니는 사립학교가 있는데여...
대부분 이곳에 오면 외국인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다닙니다....
산디아고에 유명한 사립학교가 있는데여....
그 곳은 유차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교육시킬 수 있구여...
입학할때 기부금이 약60만원 정도, 매달 3-40만원의 학비가 듭니다.
영어로 교육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느정도 지나면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 3개국어를 하게 됩니다...
원한다고 모두 입학할 수 있는건 아니구여.... 어느 정도의 실력이 필요하다네여.
초등학교 2학년정도에 입학하려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줄 알아야 한답니다.
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재수도 한다고 합니 대단하죠?
미국식 학제로 되어 있어서 학교를 마치면 미국의 대학으로 입학할 수 있구여....
여기 산티아고에도 세계적으로 보면 서울대보다 알아주는 pucc(뿌까마이마) 대학이 있다고 하네여....
거기서 영어연수 같은 것을 받을 수 있다고 하네여....

여기선 남자들이 주말이 되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골프구여... 하나는 카지노에 가는 겁니다....
물론 건강 및 여러가지를 생각해도 골프를 하는게 훨씬 좋겠죠?
골프는 필드를 도는데 한국돈으로 3-4만원 정도 합니다...
정말 싸죠? 도대체 한국과 가격차가 얼마나 나는지 계산이 힘들 정도네여....(물론 더 비싼 곳도 있습니다.)
대신 이 곳은 헬스장이 비싸다고 합니다...
헬스장은 돈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라고 하네여....

이곳은 관세가 비싸기 때문에 같은 종류의 것이라도
이 나라에서 난건 굉장히 싸구여... 외국에서 수입한 것은 무지 비쌉니다...
그래서 슈퍼에 가도 가격이 천차만별입니다....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자동차나 프라스틱류 같은 것은 좀 비싸여....
대신 이 곳에서 나는 농산품 같은 것은 무쟈게 쌉니다....
대충 이런 모습들입니다.... 이것으로 이곳의 모습이 그려지긴 힘들겠지만....
난생 처음 미국에 갔을때 '아 .. 이곳도 사람사는 곳이구나..'라고 느꼈던것처럼 이 낯선 땅도 그때의 그 느낌처럼 느꼈습니다....

또 먹는 이야길 해 볼려구 합니다....

도미니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봉' 이라는 아이스크림과 '프레지덴떼'라는 맥주 입니다. 물론.... 두 개 다 먹어봤습니다.....
'봉'은 우선 도미니카의 우유에 대해 말씀드려야 그 맛에 대해 알 수 있을것 같습니다...
도미니카의 우유... 죽음입니다..... 정말 정말 느끼합니다......
도미니카의 다른 음식을 먹고는 그렇게 느끼하단 생각 별루 안 하는데.....
우유만 마시고 나면 속이 느끼해서 '김치'를 찾습니다... ^^;;
그런 우유로 만든 아이스크림인데여....
무척 진하고, 맛있습니다..... 아무래두 그런것 먹으면 살찔것 같더라구여....
거기도 베스킨 라빈스가 들어와 있는데여...
'봉' 때문에 발을 붙이지 못한다고 하네여.....
이름도 어떻게 생각하니까 좀 웃기죠????
'프레지덴떼'는 뭐 맥주맛을 잘 모르니까...
아주 맛있는거라고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아쉽게도... 다른 맥주와 어떻게 틀린지 자세히 말씀 못 드리겠네여.....
맥주캔의 색갈을 중국의 '청도'맥주와 색갈이 비스무리....
혹 '청도' 맥주를 모르신다면.... 하이네켄 색갈과 비스무리 합니다......
그냥 한마디로 촌시럽습니다!!! ^^;;

도미니카에서 먹어 본 음식 중에 타코가 있는데여....
뭐... 요즘은 훼밀리 레스토랑이나 타코벨이 있으니까
아주 특이한 음식이라고 말한긴 힘들지만.....
(아시죠? 얇은 전병 같은 거에 여러가지 싸서 먹는거...)
그 곳 분들은 '타코벨'에 안 간답니다...맛이 없어서여....
전통적으로 한다는 음식점에 가서 먹었는데여....
음식이 나오면 벌려서 내용을 알수 없는 소스 3가지를 무조건 많이 넣어 먹었습니다... (그렇게해야 맛있다고 해서리...)
맛있었습니다.... 입맛에 맞더군여... (원체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체질이라서... ^^)

그리고.... 또 다른 음식점은여.....
세계 어느 곳에라도 있는 중국음식점 입니다....
물론, 짜장면은 없구여.... 비스무리 한거 있습니다.....
요리를 5가지 정도 시켰는데.... 다 맛있었습니다....
아마두 그 곳에 사시는 한인들이 시행착오를 거쳐
한국사람들 입맛에 맞는 요리를 골라 놓으신것 같아여.....
그리곤... 한국음식점을 두 번이나 가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반찬으로 김치, 오이무침, 오뎅, 달걀말이... 기타등등 이런걸 먹은것 같네여..
뭐니 뭐니 해도 한국사람은 한국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김치!! 얼마나 맛있습니까.... 동의하시죠?

(TIP 도미니카에서 어느 곳을 가든 메랭게라는 전통 음악이 나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트롯트.... 한마디로 뽕짝이죠... ^^
놀라운건 음식점은 물론이고 젊은 사람들이 다니면 디스코텍에도
그 음악이 나온다는 겁니다...)

살벌할때 뉴욕을 거쳐 돌아왔습니다.... 뉴욕...정말 살벌한 분위기더군여....
이것 저것 생각나는데로 써 봤습니다....
혹 나중에 도미니카를 여행하시게 될 분들이 있으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르단 최고의 관광유적지 페트라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무대 장미의 도시


요르단의 전성시대는 1960년대 초반이다. 친(親) 서방노선을 걸으며 미국의 환심을 사 달러 보따리가 쏟아져 들어오고, 때마침 불어닥친 세계적 관광붐으로 예루살렘엔 서구인들이 떨어뜨리고 간 달러가 풀풀 날아다녔다. 당시 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역(현재의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은 요르단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7년, 3차 중동전인 6일전쟁으로 요르단은 하루아침에 풍전등화의 땅이 된다. 황금알을 낳던 요르단강 서안지역을 통째로 이스라엘에 뺏기고, 주변 아랍 형제국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더욱이 수백만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이 나라에 정착하자 자연히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나라안의 나라로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 아랍 형제인 PLO와 요르단 간에 내전이 벌어지자 이스라엘은 표정관리에 바빴다. 1970년대 초 PLO를 겨우 제압한, 곡예외교의 귀제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4차 중동전을 계기로 아랍측 전열에 가담함으로써 아랍세계의 고아신세를 겨우 면했다. 요르단은 미국과 아랍 형제국 사이를 오락가락하지 않으면 안되는 숙명을 지난 나라다.

그런가 하면 요르단은 억세게 운이 없는 나라다. 우리 남한한만한 땅덩어리에 모래사막뿐이다. 옆나라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에서는 같은 모래벌판인데도 '검은 황금'이 솟구쳐 오르는데 요르단만은 예외다.

석유가 안 나면 물이라도 풍족해야 할텐데 먹을 물조차 모자라 시리아로부터 인공수로를 통하여 물을 공급받는다. 시리아가 요르단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이다. 또 물만 먹고는 살 수가 없어 아랍의 눈치를 보며 미국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어 이스라엘과 강경 아랍국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하며 미국의 원조를 얻는다. 세계 각국이 미국의 눈치를 보며 이라크를 외면하는데도 요르단만은 이라크와 외부세계를 연결하여 많은 마진을 남기는 중계무역을 한다. 말하자면 숨통이 막힌 이라크의 창구역할을 한다. 물론 미국이 눈감아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세계의 골칫거리인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수용해 주는 대가로 요르단은 유엔과 아랍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는다. 재작년에 타계한 후세인 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압둘라 왕도 역시 선친의 노선을 답습하고 있다.

요르단이 서방세계에 웃음을 보내고, 또한 이스라엘로 오가는 국경의 문을 여는 또 다른 이유는 관광이다. 예루살렘에 성지순례를 온 기독교인들을 요르단으로 끌어들여 마음놓고 여행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 뺏겼지만 요르단엔 그에 못지않은 깜짝 놀랄 만한 관광자원이 수두룩하다.

"사우디 모래 속의 검은 황금을 다 준다 해도 페트라와 바꿀 수는 없다"

요르단이 자랑하는 페트라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로 서방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페트라에 첫발을 디디면 너무나 엄청난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에 몸이 얼어붙는다.

불과 4~5m 밖에 안되는 틈새를 두고 100여m나 되는 암벽이 마주보고 섰다. 꼬불꼬불 이어진 협곡이 2km나 이어진다. 대자연이 만든 이 경이로운 협곡에 인간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기원전 나바탄왕국은 이 협곡을 수도로 정하고 마주본 절벽 바위를 통째로 조각해서 사원, 보물창고, 왕릉, 목욕탕 등 온갖 건물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협곡에 햇살이 들면 바위는 붉은 장미색으로 변해 페트라는 '장미의 도시'로 불린다.

대상들의 길목으로 번창하던 페트라는 로마의 끝없는 공격에 손을 들고 이번엔 정복자 로마의 명을 받아 이 땅에 원형극장을 조각한다. 그후 몇세기가 지나면 비잔틴제국이 이곳을 지배하며 비잔틴 건축을 꽃피운다.

페트라뿐만 아니다. 모래에 파묻혀 있다가 통째로 발굴된 로마시대의 도시 제라시, 십자군 요새 쇼박성, 사막 위의 바위꽃 와디럼….

벌린 입을 다물 수 없게 하는 자연과 유적들이 온 나라에 깔려 있다.

그러나 중동에 전운이 깃들면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나라가 요르단이다. 유럽의 관광객이 하루아침에 뚝 끊어지기 때문이다.

▶ 여행안내

요르단은 참으로 여행하기 좋은 나라다. 첫째, 지갑 축나는 걸 겁낼 필요가 없다. 수도 암만에서도 40달러만 주면 딜럭스호텔에서 자고 두 사람이 아침까지 먹을 수 있다. 영어 잘하고 넥타이를 맨 운전기사가 딸린 렌터카(현대 엑셀이 주류를 이룸) 비용이 하루에 4만원이 채 안된다.

좁은 땅에 볼거리는 지천으로 깔려 있어 바쁜 일정에 매여 있는 사람이라면 3일 안에 모든 걸 볼 수 있다. 요르단에서 하루밖에 시간이 없다면 단연코 사막 하이웨이를 달려 페트라를 보고 와야 한다. 평생에 이 지구에서 꼭 가봐야 할 곳 다섯 군데를 꼽으라면 나는 페트라를 뺄 수가 없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페트라로 가는 길을 사막 하이웨이로 잡지 말고 킹스하이웨이로 잡아야 한다. 가는 길목마다 볼거리다.


서부아프리카 말리 반디아가라 계곡의 도곤족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침투에서 살아남은 참 아프리카인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광활한 사막이 끝간데 없이 펼쳐진 불모의 평원에 난데없이 사선으로 그어진 칼자국처럼 계곡이 뻗어 있다. 먼 옛날 지각 함몰로 생긴 암벽 단층지대다. 이 고원 구릉지대에 뻗은 반디아가라(Bandiagara) 계곡은 동북에서 남서 방향으로 그 길이가 자그마치 100km가 넘는다.

이 사선의 계곡을 따라 옹기종기 도곤(Dogon)족이 모여 산다.

11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이슬람 세력이 초승달칼을 휘두르며 사하라 사막 이남까지 휩쓸어 버릴 때 사헬(준사막) 지역의 거의 모든 종족이 고유 문화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반디아가라 계곡은 너무나 멀리 떨어진 오지여서, 너무나 척박한 땅이어서, 늘 극심한 가뭄지역인 덕택에 이슬람의 칼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이곳 도곤족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가장 잘 보존한 종족이 되었다.

도곤족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통과 문화를 소중히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무장한 게 아니라, 조상들이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쌓아온 방식을 답습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도곤족은 계곡의 절벽 아래에서 마을을 이루며 살아가지만, 몇몇 마을은 절벽 위에 터전을 잡고 있다.

반디아가라 계곡 서남단 절벽 위에 앉아 있는 지기봄보(Djiguibombo) 마을에 첫발을 디디면, 뾰족뾰족한 초가 모양이 마치 조지 루커스의 영화 ‘별들의 전쟁’에나 나옴직한 괴상한 혹성을 연상시킨다.

그 옛날, 정복자 모슬렘들의 칼은 피했지만 그 후 말없이 스며 들어온 코란의 독경 소리는 살아 있다. 이 마을 한복판엔 흙으로 지은 모스크(이슬람 사원)가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곤족의 가슴속엔 토속 신앙이 훨씬 깊이 박여 있다. 창조신 ‘암마’ 아래 풍요의 신 ‘논모’와 근친상간의 원죄를 안고 있는 불모의 신 ‘율그’는 세상사가 언제나 양과 음, 선과 악, 비와 가뭄으로 대립한다는 원리를 상징한다. 이러한 고유 신앙 앞에 코란은 맥을 못춘다.

모스크가 마을 복판에 자리잡았지만 어느 도곤 마을이나 실질적인 중심은 토구나(Togu-na)다. 토구나는 남자들의 회합장소로 여자는 한 발도 들여놓을 수 없다. 큰 동네엔 몇 군데가 있지만 작은 동네엔 하나뿐이다. 큰 마을인 지기봄보엔 세 개의 토구나가 있다.

나무기둥 혹은 흙반죽에 돌을 쌓아올린 기둥에 서까래를 얹고, 그 위에 조 수숫대를 두툼하게 몇 겹으로 쌓아 햇볕의 열기를 막는 단순한 그늘집이다. 동네 원로들이 이곳에 모여 앉아 섭씨 50。까지 치솟는 한낮의 열기를 피하기도 하고, 현안이 발생하면 이곳에서 끝없는 토론으로 해결책을 모색한다.

또 지기봄보 마을엔 도살장이 있어 소와 염소의 피를 아무데서나 뿌리지 않는다.

동화에서나 나옴직한 을씨년스러운 바오밥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여앉은 네모꼴 흙벽돌 초가집 마을에 원추형 집이 있다.

이 집은 월경을 하는 여자들을 감금하는 곳이다. 도곤족은 여자의 월경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한다. 함부로 이곳저곳 다니며 피를 흘리는 것은 악령을 부르는 짓이기 때문에, 월경 하는 여자들은 악령이 발붙일 수 없는 성역인 원추형 집에 집단으로 감금돼 있다가 월경이 끝나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지기봄보 마을에서 동북쪽으로 30여km쯤 떨어진 절벽 위에 베니마또(Begnimato)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반디아가라 계곡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기독교 마을이다.

“주위의 이슬람 마을과 종교적 분쟁은 없는가?”

베니마또 마을의 추장은 빙긋이 웃으며 “종교보다는 피가 먼저다. 우리는 형제”라고 대답한다. 이 마을의 초가 지붕 꼭대기 용마루는 작은 십자가로 마감되었고 초라한 성당이 마을 아래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지난 세기 초 프랑스 식민지시대에 프랑스 신부들이 억지로 심어 놓은 기독교는 도곤족의 토속신앙 앞에서는 맥을 못춘다.

바싹바싹 타들어가던 대지에 여름 한 철 짧은 비가 내리면 조와 옥수수를 심어 1년 양식을 하고 풍년이 들면 술을 빚어 마시기도 한다.


▶ 여행안내

서부아프리카 말리의 반디아가라 계곡은 총연장 100km를 넘으며 ‘도곤 컨트리’라 불린다. 서부아프리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숨막히는 절경, 전통과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도곤족들의 민속, 삶, 집, 예술 등은 아프리카에 마지막으로 남은 진짜 아프리카의 모습이다. 일생을 두고 꼭 한 번 가볼 만한 곳이다. 3~5월은 섭씨 50。를 오르내리는 가마솥 기온이므로 여행을 피해야 한다. 11∼2월이 여행 적기다. 고추장을 가지고 가서 그곳의 닭(2000원)을 잡아 도리탕을 해먹을 일이다.


서부 아프리카 코트 디부아르 방코강을 천연색으로 물들이는
세탁부의 나라


서부 아프리카 해안도로를 따라 차를 달리면 휘파람이 절로 난다. 가나에서 국경을 넘어 코트 디부아르 땅을 밟자 휘파람은 한숨으로 바뀐다. 출입국 관리들이 국경을 넘어오는 사람에게 돈을 뜯으려고 꼬투리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진땀을 흘리며 출입국 검문소를 빠져나와 이 나라 항만도시 아비장(Abidjan)을 향하여 달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도 잠깐, 이번엔 길가의 엉성한 초소에서 길을 막는다.

한 흑인 여자가 초소 아래 잡초밭에 파묻힌 쓰러져가는 흙집으로 끌려가더니 브래지어와 팬티만 걸친 채 소지품 검사를 당하고 있다.

내 차례가 되자 후줄근한 군복에 인상이 고약한 군인이 “마약이 밀반입된다는 첩보가 왔다. 모두 벗고 카메라 가방도 열어라”고 한다. 옷을 벗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찍은 카메라 필름도 체크해야겠다고 협박하는 것이다.

결국은 돈이 문제를 해결했다. 아비장까지 올 동안 세 번이나 이런 낭패를 당하느라 3시간 거리에 5시간이 걸렸다. 하도 화가 치밀어 관계기관에 그들의 공공연한 비리를 고발하려고 했더니 아비장에서 만난 우리 교민이 “그렇게 해서라도 밥먹고 살라고 정부에서 묵인해주는 겁니다”고 충고한다.

아비장에 입성했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배낭여행의 바이블인 ‘Lonely Planet’은 “나이지리아의 라고스에 이어 아비장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치안 상태가 나쁜 곳”이라고 말한다.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 나라는 건국의 아버지 우푸에가 초대 대통령으로 정권을 잡아 국민의 신망을 한몸에 받으며 커피 생산 세계 3위, 코코아 생산 세계 1위로 농업 혁명을 일으켜 1970년대 아프리카의 기적이라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의 파리’라 불리던 아비장이 오늘날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해답은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바로 이것이다. 우푸에가 장기 집권하며 철권통치로 일관, 나라가 썩기 시작했다. 내륙에 있는 소읍인 그의 고향, 야무수크로를 어느날 갑자기 수도로 정하고 차관으로 들여온 외화를 그곳에 쏟아부었던 것이다. 1993년 88세 고령의 우푸에가 사망하자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찾아오는가 싶더니 이번엔 쿠데타와 혼란이 반복된다.

“세탁물 맡기세요, 세탁물.”

아비장의 새벽은 골목길을 누비는 세탁부들의 외침으로 깨어난다. 아비장 도심에서 서북쪽으로 3km 떨어진 개울 같은 방코강은 이른 아침부터 세탁부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파니코스(세탁부)’로 불리는 이곳은 아비장의 명소가 되었다.

세탁부들은 대부분 부르키나파소, 말리, 라이베리아 등 내전의 와중에 탈출하여 이 나라로 들어온 가난한 이웃나라 피란민들이다. 그들은 무학문맹자들로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른다. 이집 저집에서 거둬들인 갖가지 세탁물을 치부책에 기록하거나 보관증을 써 주는 절차를 무시하지만, 모든 걸 머리 속에 기억하고 있다가 저녁이면 정확하게 세탁물을 집집마다 돌려준다.

세탁비는 우리 돈으로 상하의 각 85원이고, 한 벌은 170원. 거기에 다림질까지 하면 곱절인 340원이 된다. 부지런한 사람은 하루에 5000원 벌이를 해, 한 달이면 일반 공무원 봉급의 2배나 수입을 올린다.

아무나 방코강에서 세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방코강 세탁조합에 가입을 해야 하고 조합원은 한 달에 5100원(하루 한 벌 세탁비×30)의 하천 사용료를 아비장시에 납부해야 한다. 지금은 조합원이 포화상태인 425명으로 더 이상 신규 가입은 동결됐다. 조합원 면허증이 17만원에 거래된다.

오전 10시쯤 되면 강 주위의 풀밭은 햇볕에 말리는 알록달록한 세탁물 꽃밭으로 변하고 세탁부들이 빠져 나간 방코강은 멱감는 아이들 차지가 된다.

그리고 산비탈 여기저기에는 드럼통에 야자유와 재를 넣고 끓여 응고되면 두부 모 자르듯이 토막내어 세탁부들에게 비누를 파는 원시적인 비누공장이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린다.


▶ 여행안내

프랑스 식민지였던 서부 아프리카는 아직도 정치, 경제적으로 프랑스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곳으로 가는 길도 파리를 거쳐가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아비장에서 단연 첫 번째로 가볼 만한 곳은 방코 국립공원 입구에 있는 세탁부들의 대장판 파니코스 (Fanicos). 이름 아침에 가야한다.

아비장에서 동쪽으로 45km 떨어진 식민지시대 수도 그랑바상(Grand Bassam)이 가볼 만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빈약한 유적에 바가지 기념품 가게만 바닷가에 늘어섰다. 토속적인 기념품을 사려면 시내에 있는 코코디 시장(Marche' de Cocody)이 훨씬 좋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단(Dan)족의 목각탈 한 두점은 살 만하다. 또 이 나라의 영어 이름인 아이버리 코스트(Ivory Coast)답게 도처에 상아제품이 산더미처럼 쌓였댜. 그러나 도장 하나라도 사지 말 일이다. 파리공항에서 적발되면 구속이다.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직물 상가
베품과 나눔이 일상이 된 아랍 사람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로 가는 고물 합승택시를 탔다. 콧수염을 기른 운전기사와 30대의 승객 두 사람은 요르단 사람이고, 20대의 젊은이는 시리아 대학생으로 3시간 반 동안 동행하게 되었다.

암만 시내를 벗어난 합승택시가 차 머리를 북쪽으로 향한 채 끝없는 사막길을 1시간 반쯤 달리자 신기루처럼 모래언덕에 우뚝 솟아오른 국경검문소가 앞을 가로막는다.

요르단의 출국수속은 간단히 끝나고 시리아 입국수속 차례가 되었다. 다른 승객들의 여권은 서슴없이 쾅쾅 스탬프가 찍히는데 내 여권을 들고 사라진 창구의 국경수비대원은 나타나질 않는다.

한참만에 나타난 군인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다. 초청장과 나의 입국 목적이 틀리다며 지루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고개를 돌려 창구를 보니 택시기사와 동행한 승객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거의 1시간이 지났을 무렵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나와 택시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나 때문에 지체돼서 미안하다. 금방 끝날 것 같지 않다. 트렁크 속의 내 보따리를 내려주고 너희들은 출발해라.”

그들은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흔든다.

“우리 걱정은 하지 마라, 미스터 조.”

“다마스쿠스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전화로 늦춰놨다.”

“밤을 새우더라도 우리는 함께 가야 한다.”

또다시 사무실에서 끝없는 심문이 이어지기를 거의 3시간, 마침내 입국 스탬프를 받아들고 나오자 석양에 벌겋게 물든 운전기사와 승객들은 활짝 웃으며 내 손을 잡는다.

“다마스쿠스에 가서 저녁을 사겠다.”

그들은 나의 제의를 한사코 사양하며, 어둠이 내리는 길가 구멍가게에서 목을 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는 운전사에게 “나 때문에 손해가 크다. 내가 보상하겠다”고 하며 30달러를 건넸다. 그러자 그는 깜짝 놀라며 5달러짜리 하나만 집어들고 25달러를 돌려주는 것이다.

다마스쿠스 길가에서 그들은 한사람씩 나를 껴안고 “당신은 나의 친구”라는 말 한마디를 조용히 던지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기원전부터 오리엔트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중심이었던 다마스쿠스. 그 옛날 실크로드의 대상들이 모여 중국 비단을 흥정하던 하리카 거리는 지금도 직물상인들로 시끌벅적하다.

조그만 2층 건물 위층에 ‘G.S텍스타일’이라는 회사 간판이 붙어 있다. 유일한 우리 교민 이규상씨가 처자식을 서울에 두고 국교도 없는 이 나라에 혼자 와서 옷감 중계무역을 하고 있는 곳이다.

좁은 사무실은 열띤 상담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현지인 직원 바샤르가 천을 펼쳐들고 열을 올리고 아랍상인 두 사람은 또다시 값을 깎자고 늘어진다. 이규상씨는 즉석에서 우리나라로 국제전화를 걸어 메이커의 바닥 가격을 애원해 본다.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삐그덕 열리며 양동이를 든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와 온갖 천으로 발디딜 틈도 없는 사무실 바닥에 주저않는다.

아랍상인들의 빠듯한 흥정에 속이 탄 바샤르는 할머니가 갖다놓은 양동이를 펄쩍 뛰어넘어 다른 샘플 두루마리를 들고 나와 활짝 편다. 지루한 실랑이 끝에 거래는 성사되지 않고 아랍상인들은 나가고 사무실은 실망의 한숨으로 가라앉는다.

양동이를 들고 온 할머니는 치즈장수다. 이쯤 되면 치즈장수 할머니에게 화풀이 고함이라도 쏟아질 만한데, 바샤르는 조용히 커핏잔을 여럿 들고 와 미소를 보내며 그 치즈 할머니에게도 한잔 건네는 것이다.

30대 초반의 바샤르는 이규상씨 밑에서 일을 하지만 시리아 대학을 나온 지식층 젊은이다. 이규상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어느날,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아이를 업고 사무실로 들어와 바샤르와 오랜 시간 얘기 끝에 함께 나갔다. 바샤르는 그녀의 집에 다녀온 것이다. 남편은 죽고 아이들 다섯을 키우는 그녀에게 바샤르는 큰아들이 돈벌이할 수 있을 때까지 매달 일정액을 주기로 했다 한다.

그 여자와 바샤르는 서로 처음 보는, 아무 연고도 없는 사이라는 것이다. 매달 일곱 사람이 찾아오는데 미소를 머금은 바샤르는 그들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돈 봉투를 준다는 것이다. 다섯은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사람들이고 두 사람은 바샤르 자신이 선정했다. 이규상씨의 얘기는 이어진다.

“시골길을 가다가 길을 물으면 붙잡혀 집에 들어가 최소한 커피와 차 한잔, 어떤 때는 식사까지 대접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절대로 길만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아랍인들이 배타적이고, 호전적이고,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라는 고정관념은 전적으로 기독교 바탕 위에 형성된 서양문화로부터 우리가 세뇌되었기 때문입니다.”

▶ 여행안내

시리아로 가는 길은 두바이를 거쳐야 한다. 현재 시리아는 이스라엘과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데다, 아사드 사후 권력을 잡은 둘째아들인 바샤르 체제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경 출입이 여간 까다롭지 않은 게 흠이긴 하다.

그러나 일단 이 나라에 들어갔다 하면 여행자의 천국이 된다. 예상외로 개방되어 술집도 있고 수상쩍은 ‘거리의 여자’도 보인다. 폐쇄된 나라에다 여행객도 거의 없어 어디를 가든 따뜻한 인정을 맛볼 수 있다. 아랍세계에 대한, 그리고 골수 아랍 강국 시리아에 대한 두려움은 시리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얼마나 부질없는 생각이었는지 금방 깨닫게 된다.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 이것만은 가슴속에 담고 가야 한다.


아메리카대륙의 ‘개미 허리’ 파나마
미국과 대결 끝에 파나마 운하 돌려받은 작지만 당찬 나라



16세기 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유럽의 열강들은 황금과 향료를 찾아 앞다퉈 신비한 미지의 땅, 동양으로 향했다.

목선에 돛을 올리고 남십자성을 좌표로 삼아 대서양을 사선으로 가로질러 남미대륙 끝과 남극대륙 사이, 즉 풍랑이 미친 듯이 날뛴다는 드레이크 해협을 건너 태평양으로 빠져나가려다 수많은 사람이 고깃밥이 되기도 했다.

1520년 남미대륙의 뾰족한 끝 부분에 있는, 강처럼 가느다란 해협이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위대한 탐험가 마젤란이었다. 풍랑 없고 안전한 마젤란 해협은 이후 세계사를 바꿨다.

그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후 항해자들은 마젤란 해협의 안전한 뱃길에 만족하지 않고 더 빠른 지름길을 찾았다. 북미대륙과 남미대륙을 잇는 잘룩한 끈, 파나마의 땅을 뚫어 수로를 만드는 아이디어가 제기됐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상 최대의 토목공사가 시작되었다.

1880년 프랑스인 레셉스가 7년 내에 운하를 완공하겠다고 큰소리치면서 이듬해에 양대양 주식회사를 설립,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했다.

레셉스는 11년 전 수에즈 운하를 완공했다는 자신감으로 덤벼들었지만 이곳 지형은 수에즈와는 달랐다. 수에즈 운하는 수평식으로 모래땅을 파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한 것이지만, 파나마는 가로막은 땅이 너무 높고 지질은 암반투성이였던 것.

운하를 계단으로 만들어 배가 산 위로 올라갔다 다시 내려가는 갑문식으로 설계를 바꾸었으나, 자금 부족에다 황열병과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려 건설공사 중 많은 노무자가 죽어갔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9년 만에 공사는 중단되었고 레셉스를 믿고 양대양 주식회사에 투자한 프랑스의 수많은 갑부들은 파산하고 말았다.

레셉스가 손을 들고 난 후에도 아메리카 대륙의 잘룩한 허리에 운하를 뚫어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만 하면 떼부자가 되리라는 망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니카라과가 자국 땅에 운하를 건설하려 했지만 몇 달 못 가 제정신을 차리고 공사를 중단했다.

19세기 중엽 멕시코로부터 방대한 땅을 빼앗은 미국은 중남미를 지배하던 스페인과 일전을 벌여 압승했다. 신대륙의 패권을 한손에 거머쥔 미국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운하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1903년 미국은 파산한 레셉스의 운하 굴착권과 기계 설비 일체를 프랑스 정부로부터 사들였다.

그때까지 파나마는 콜롬비아의 한 주였다. 미국은 운하 건설과 건설 후의 운하 운영권을 단독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 지역의 치외법권을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사들이려 했으나 콜롬비아 상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미국은 세력이 미약했던 파나마 민족주의자들을 선동해 콜롬비아로부터 분리독립 투쟁을 하도록 사주했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인해 콜롬비아는 결국 손을 들고 파나마는 독립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파나마 운하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말라리아와 황열병을 막는 대대적 방제사업에 증기삽, 준설선이라는 새로운 건설장비가 등장했다. 또 유럽에서 1만2000명, 서인도 제도에서 3만1000명의 노동력을 투입해 지상 최대의 대역사는 1914년 8월15일 마침내 끝날 수 있었다. 8만1237t급 퀸 엘리자베스호가 최초로 이 운하를 통과했다.

남한 땅의 4분의 3에 불과한 작은 땅덩어리에다 인구 260만 명의 이 가난한 나라는, 자기 나라 한복판에 있는 파나마 운하로 수많은 배가 들락거리며 통행료로 던져주는 달러 보따리를 냉큼냉큼 받아먹는 미국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운하를 건설하려는 미국의 야심과 지원에 따라 파나마가 콜롬비아에서 떨어져 나왔으니, 당시 미국과 파나마가 맺은 운하에 관한 협정은 일방적으로 미국에 유리하게 작성되었던 것이다. 운하를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이 미국인과 미국 군대가 주둔하는 미국 땅이 된 것이다.

1968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토리호스 장군은 1977년 미국과 담판을 벌여 1999년 12월31일에 파나마 운하를 돌려받기로 약속을 받았다. 그 날짜가 코앞에 닥치자 미국은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파나마 운하 관할권과 운하 지역 내에서 미군 주둔을 연장하려 했다. 그러나 파나마는 노(No)로 일관했다.

“우리나라의 진정한 독립일은 바로 파나마 운하의 관할권이 우리에게 돌아온 2000년 1월1일이 되는 겁니다.”

파나마 국민에게 새 밀레니엄은 너무나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새 천년의 장엄한 문이 열리면서 파나마 운하는 드디어 파나마 국민에게 돌아왔다. 파나마 운하 반환식에 중남미 6개국 정상이 참석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다.


▶여행안내

파나마는 중미 지역에서 코스타리카 다음으로 잘사는, 안정된 나라다. 파나마에 가면 파나마 운하를 건너는 크루즈를 빠뜨릴 수 없다. 그러나 운하를 관통하는 관광 크루즈가 많지 않다. 파나마시티의 에코투어 여행사가 12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매주 토·일요일 두 차례 운하 관통 크루즈를 하고 있다. 운하를 따라 이어진 도로로 택시를 빌려 관광할 수도 있다.

대서양 쪽 운하 입구이자 파나마 제2의 도시 콜롱은 위험한 도시다. 대낮에도 이방인은 혼자 거리를 걸어다닐 수 없을 정도다. 파나마 운하를 구경한 후엔 초코 나 엠베라, 엘바예 등 스페인 정복자를 피해 오지로 달아났던 인디오 마을을 방문해볼 일이다.


필리핀의 사가다 & 말레이시아의 카메론 하이랜드
야자수 해변보다 시원한 유럽풍 고원 별장지대



여름 휴가철이 다가온다. 사무실의자를 뒤로 젖혀 눈을 지그시 감고 이런 상상을 해볼 때가 온것이다.

야자수가 너울너울 춤을 추는 와이키키 해변의 은모래 위에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바닷속으로 첨벙첨벙 뛰어든다‥.

그러나 이것으 상상으로 그치는 게 좋을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라면 양쪽 발바닥이 피투성이가 되어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서 뛰쳐나오는 상황이 벌어질 게 뻔하다. 운 나쁘게 병조각을 밟았기 떄문이 아니다. 몇걸음만 들어가도 바다바닥이 날카로운 산호초와 암초로 덮여 있기 떄문이다. 그래서 바다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발목까지 감싸주는 장화를 신어야한다.

하와이의 와이키키해변엔 몇년마다 한번씩 벌크선이 모래를 싣고 와 파도에 씻겨나간 모래를 보충한다. 하와이 뿐 아니다. 괌도 사이판도 와이키키아 다를 바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해변에 도열한 딜럭스 호텔들은 한결같이 야외풀을 갖추고 있다.

'여름 해외여행은 야자수 너울대는 바다!'라는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시원한 고원지대로 행선지를 바꾸는 것은 어떨가. 성격이 다른 해외고원지대 두군데를 추천한다.


필리핀의 사가다(SAGADA)


루손섬 대산맥, 코르디렐라의 첩첩산중 울울창창한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파묻힌 해발 1500m산꼭대기 마을 사가다에 내리면 유럽의 어느산골마을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사가다를 푸르고 깨끗하게!'
곳곳에 표어를 붙여놓고 동네사람 어느 누구도 담배꽁초 하나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깨끗한 여관방 하나 잡아 보따리를 던져놓고 다음날부터 주위를 한바퀴 훑어보자.

솔숲을 걸어 산마루에 오르면 계단식 논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일하는 농부가 있다면 내려가서 말을 건네볼 일이다. (거의 모든 사가다 주민들은 영어를 한다.)그들의 집에 따라가 차 대접, 술 대접을 받을 수도 있다.

사가다애서 30분쯤 걸으면 수마깅 동굴이 기다린다. 조명시설도 없고, 손잡이와 계단 같은 편의시설도 없는,끝없이 아름다운 자연 동굴 그대로다. 6000원을 주고 램프를 든 가이드를 고용하는 게 좋다.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있는,절벽에 매달린 관도 찾아볼 일이다. 이는 사가다의 전통적인 장례의식이다. 멍하니 관을 쳐다 보노라면 사색의 늪에 빠지게 된다.

사가다에 가서 볼거리만 보고 돌아가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세파에 찌들린 사람들이 사가다에 며칠 묵으면 영적인 힘을 얻게 된다고 사가다 주민들은 말한다.

나이 지긋한 부부가 평소에 읽고 싶던 책 몇권 싸들고 와서 솔바람소리, 새소리 속에서 살아온 날을 반추하며 며칠 보내고 나면 영적인 힘까지는 몰라도 마음의 안정은 찾을 것이다.

간소한 술집도, 식당도, 가게도 있지만 밤9시만 되면 마을회관의 종소리와 함께 모든것이 문을 닫는다. 그래서 혈기방장한 젊은이나 아이들을 데리고 갈 곳은 못된다.

이곳이 장점은 하루 3만원이면 두사람이 숙식에 술까지 마실여유가 있고, 여름 휴가철이라고 해서 번잡스럽지 않다는 것. 그리고 쌀밥이 따라나오는'아도보'라는 음식은 우리의 갈비찜과 흡사해 고추장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는 길

필리핀 마닐라와 당와(Dangwa)버스터미널에서 아침 6시에 떠나는 바나우에(Banaue)행 첫 버스를 타면 9시간 만에 도착, 그곳에서 하룻밤 잘 일이다. 이곳에 해가 남아 있을 때 3000원을 주고 트라이시클을 대절하여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계단식 논을 구경한다. 이튿날 아침, 지프니를 타고 마운틴주의 주도인 본톡(Bontok)까지(2시간 반 소요) 가야한다. 오금이 저려오는 산비탈에 붙어 가는 길이 장관이다. 본톡에서 기다렸다가 다시 사가다로 가는 지프니를 타야한다.(40분 소요)


말레이시아의 카메론 하이랜드


이 나라에서 잘 알려진 고원은 수도 콸라룸푸르에서 가까운 겐팅 하이랜드인데, 산위의 라스베이거스로 불릴 만큼 카지노업소가 많다. 그러나 열대 고원지대의 참맛을 보려면 단연 카메론(CAMERON)하이랜드로 가야한다.

열대정글을 뚫고 나선형으로 이어진 길을 버스로 계속오르다가 기온이 뚝 떨어져 시원해질 떄면 마을이 나타난다. 카메론 하이랜드는 세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첫마을 링글레트(RINGLET) 엔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농부들과 나비농장 등이 있어 여행객들이 머물만한 시설은 빈약하다. 거기서 2~3km더 올라가면 카메론의 중심지이자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여행객에게도 만만하게 보이는 숙소와 온갖 음식점이 몰려있는 타나라타(TANAHRATA)마을이 나온다. 두번째 마을에서 하차, 방을 잡을 일이다. 하룻밤 20~30달러를 받는 모텔,호텔이 수두룩하다. 해발 1500m 지대라 밤이면 긴소매를 입어야 할 만큼 시원해 호텔 시설이 좀 빈약해도 큰 불편이 없다. 또 중국,인도,태국,말레이시아 음식점에 밤이면 포장마차도 즐비하다.

지갑이 두둑하다면 맨 위에 자리잡은 브링창 마을에 보따리를 풀 일이다. 이곳엔 스위스의 산장같은 고급 리조트가 그림처럼 들어 앉았다. 세개의 마을이 위치한 높이에 따라 그 수준과 씀씀이가 비례하는 것이다.

이 곳에서는 할것도 많고 볼 것도 많아 젊은 사람들도, 아이들을 대동한 부모들도 가볼 만하다. 타나라타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열대정글 트레킹은 시간 따라, 능력 따라 선택의 폭이 무진장이다. 중간에 폭포가 있어 땀을 씻을 수도 있다. 구름속에 아스라히 내려다보이는 차농원,수천수만 마리의 나비농원, 계단식 밭의 야채농원도 가 봐야 할곳이지만 진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정글속에 반라 상태로 숨어 사는 원주민인 사카이족을 찾아가는 일이다. 링ㅋ늘레트 마을 사람을 앞세우면 어렵지 않게 그들을 만날 수 있다.

또, 브링창 마을에서 블루벨리 차농장으로 가다가 정글 속에 서는 조그만 시장도 꼭 들러봐야 한다. 온갖 열대과일, 찐 옥수수,각종 먹거리에 진기한 물건도 볼 수 있다.

▶가는 길

말레이시아의 수도 콸라룸푸르에서 타나라타까지 가는, 잘 냉방된 직행 버스가 있어 가는길이 편하다(5시간 반 소요). 렌터카를 이용한다면 콸라룸푸르에서 이포로 올라가는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타파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꼬불꼬불 산으로 계속 올라가야 한다.

뉴질랜드는 남태평양에 위치한 두 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인구는 400여만명이며 70%가 백인, 15%가 원주민(마오리), 기타 여러 민족이 어우러진 다민족 국가입니다. 공용어는 영어와 마오리어이며 영국식 영어를 사용합니다. 계절은 우리나라와 정반대이며, 기온은 연중 온화한 편이나 일교차가 매우 크며, 산간지방이나 퀸스타운등의 남쪽 지역은 겨울에 상당히 춥습니다. 통용되는 화폐는 뉴질랜드 달러(NZ$)로 $5, $10, $20, $50, $100의 지폐와 5c, 10c, 20c, 50c, $1, $2의 동전이 있습니다. 전기는 230V를 쓰며 플러그 방식이 우리나라와 다르기 때문에 어뎁터를 준비해야 합니다. 시간은 우리나라보다 3시간 빠르며 여름에는 썸머타임을 실시합니다.


***기차여행

기차여행을 가장 좋아합니다. 참 여유로운 여행의 한 방법이죠. 낮에는 창밖으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떼들을 보며 사색에 잠길 수도 있고, 밤에는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짧은 인생을 돌이켜 볼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들도 이런 열차 여행의 경험이 있을겁니다.

***히치하이크

하지만, 뉴질랜드까지 왔다면 히치하이크도 빼놓을 수 없는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적극적이면서, 경비도 절감할 수 있고, 현지인들과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웰링턴 근교에 머무를 때, 제가 머물던 농장의 아주머니가 히치하이크를 권유하더군요. 처음에는 고개를 설래설래 내저었습니다. 가뜩이나 내성적인 내가,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탈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히치하이크를 시도한 곳은 남섬의 넬슨이었습니다. 일요일이었는데, 가야할 곳의 버스는 이미 끊긴 상태고, 해는 뉘엇뉘엇 저물어 가는데... 히치하이크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트램핑을 막 마치고 오는 길이라 무척 지친 상태였지만,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으며 차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이라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간간이 지나가는 차에 신호를 해 보았지만... 결국 세시간여를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했고,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한달정도가 지나고...
우연히 한국인 여행객을 크라이스트쳐치의 어느 한 백패커스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클랜드에서 크라이스트쳐치까지 히치하이크로만 왔다고 하더군요. 그가 말하는 방법은 우선 목적지를 등에 써붙이고 한참을 걸으라는 겁니다. 예전의 실패를 무릅쓰고 다시 한번 시도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목표는 크라이스트쳐치에서 픽턴까지...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서 무작정 걷기 시작했습니다. 등에는 "PICTON"이라 쓰여진 종이를 한장 달랑 붙이고... 한시간여를 걸었을까? 어느 젊은 남자가 앞에서 차를 세우더군요. 그리고 그 사람이 말하길 히치하이크는 아무데서나 하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히치하이크도 다 좋은 장소가 있기 마련인데 무식하게() 아무데서나 차를 잡으면 어떻하냐는 충고와 함께 저를 히치하이크 하기에 좋은 장소까지 데려다 준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처음으로 히치하이크를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픽턴까지는 아니지만 카이코우라까지 쉽게 갈 수 있었습니다. 절반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갖게 되었죠. 그후로는 이동할 때 히치하이크를 즐겨 이용하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노하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무지무지 고생해서() 얻은 정보를 여러분들께 공개합니다...


1. 가만히 서서 엄지손가락만 치켜세우지 말 것(운전자들이 말하길 가만히 서 있는 히치하이커보다는 그래도 걷고 있는, 의지있는 히치하이커를 태우고 싶다고 하더군요.)
2. 선그라스()를 쓰지 말 것(선그라스로 위화감을 만들게 됩니다. 힘들어도 웃는 얼굴로...)
3. 목적지를 크게 써서 운전자가 쉽게 볼 수 있도록 할 것(저같은 경우는 두꺼운 유성 매직을 하나 구입했습니다.)
4. 히치하이크의 요지를 파악할 것(아무데서나 차가 잡히는게 아닙니다. 각 도시마다 히치하이크에 적합한 도로가 있습니다.)
5. 가능한 일찍 시작할 것(100% 성공이 보장되는게 아닙니다. The early bird catches the worm...)
6. 운전자의 시선을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것(제가 한 건 아니지만 어느 호주 아줌마는 저글링을 했다더군요.)
7. 어느정도의 음식과 음료수를 준비할 것(일단 도시 외곽도로로 빠지게 되면 아무런 가게도 없습니다. 오로지 길벗이 되어주는건 들판의 양떼들 뿐이니까요.)
8. 차도쪽으로 접근하지 말 것(일반국도 제한속도가 100km/h로 무척 빠릅니다. 안전을 위해서...)
9. 체력 안배에 신경 쓸 것(무거운 배낭을 메고 무작정 걷는 다는것... 군대에서의 행군 못지 않습니다.)
10. 운전자와 친해질 것(아무리 피곤하다고 차안에서 그냥 자버린다면... 예의가 아니겠죠? 그리고 여러가지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호주에서는 이미 법으로 히치하이크를 금지시켰다고 하더군요. 이와 관련된 사고가 끊이질 않았답니다.
뉴질랜드에서도 사고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주의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구데기 무서워서 장 못담그겠습니까?
배낭여행이 젊음의 상징이듯, 히치하이크는 보다 적극적인 여행의 한 방법이라 생각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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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권씨의 뉴질랜드 여행기/인도와 인니 여행사진


뉴질랜드 여행을 계획하시는 분...
단순한 이동의 수단으로서가 아닌, 값진 경험으로서의 히치하이크... 어떨까요?

***뉴질랜드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맥주가 있습니다.

외국으로부터 들여온 맥주에서부터 현지에서 생산되는 맥주까지, 못해도 백여가지는 족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대형마켓이나 리커샾(Liquor Shop)에서 구할 수 있는데 6, 12, 18, 24병(혹은 캔) 단위로 판매합니다. 각 지역마다 판매하는 맥주도 다르고, 가격도 차이가 있습니다. 예들들어 넬슨지역에서 판매하는 태즈먼비터(Tasman Bitter)의 경우 6병들이 팩을 5불이 채 안되는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수입맥주인 버드와이저(Budweiser)나 하이네켄(Heineken), 코로나(Corona) 등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쌉니다. 가장 많이 판매되는 스타인라거(Steinlager)를 비롯해서, 남섬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스페이트(Speight's), CD, 엑스포트(Export), 빨간 포장이 귀여운 투이(Tui) 등이 유명합니다. 저는 기념품으로 별다른걸 사오지 않고, 뉴질랜드에서 마신 맥주 병뚜껑을 모아왔습니다. 40여가지를 모아왔는데, 계산해보니 6개월동안 300병정도를 마신 것 같더군요. 뚜껑들이 색깔이 가지각색이라 꽤 이쁩니다.

펍(Pub)에서도 맥주를 마실 수 있습니다. 물론 슈퍼마켓에서 직접 구입하는 것 보다는 비싸지만, 현지인들과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을 수 있습니다. 보통 포켓볼이나 다트를 갖춘 곳이 많으며, 가라오케 시설을 갖춘 곳도 있습니다. 대부분 안주를 팔지 않고 간혹 감자튀김을 파는 곳이 있습니다.
이러한 술집에도 여러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우선 복장에 대한 규제입니다. 슬리퍼, 모자, 반바지 착용이 금지되는 곳도 있고, 어떤 곳은 청바지 차림도 제재를 받습니다. 그리고 계산 방식도 우리와 다릅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네명이 호프집을 간다면 피쳐를 시켜놓고 같이 마십니다.(계산은 누가 쏘던가, 모아서 지불하겠죠?) 하지만 그들은 각자 개인이 피쳐 하나씩 직접 사서 마십니다.(거의 선불입니다.) 혹시 같이 마시게 된다면 한번씩 번갈아가면서 사오는게 예의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뻔히 쳐다보거나,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상당한 실례라고 하더군요.(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바로 주먹 날라오겠죠?)

***소주를

참고로, 소주는 구하기도 힘들고 가격도 비쌉니다. 보통 한인지역의 구멍가게(Dairy)에서 6~7불정도에 팔고 있습니다. 한인 식당에서는 10불 정도를 받더군요.

***퀸스타운(Queens Town),
***로터루아(Rotorua),
***카이코우라(Kaikoura),
***밀포드(Milford)...
뉴질랜드에는 많은 관광명소가 있습니다. 퀸스타운에서는 스키와 번지점프를 비롯한 각종 아웃도어 스포츠를 만끽할 수 있고, 로터루아의 유황온천에서 피로를 풀 수 있고, 카이코우라에서는 세계에서 멸종 위기에 처해진 거대한 향유고래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손 꼽히는 트램핑 코스가 바로 밀포드와 루트번 트랙입니다.
이들은 모두 뉴질랜드가 가진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경험하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뉴질랜드인들, 소위 키위(Kiwi)라 불리는 그들의 생활과 언어, 음식, 문화를 좀더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저는 주저없이 우프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우프(Willing Workers On Organic Farm).
말그대로 유기농장(화학비료를 쓰지 않는)에서 일을 하는 겁니다. 뉴질랜드는 세계적인 여행명소임과 동시에, 수백여개의 우프농장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뉴질랜드는 북유럽의 여느 나라들 못지 않은 낙농업 국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뉴질랜드 하면 '넓은 초원 위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는 양떼들' 을 떠올릴 정도니까요.

***우퍼(WWOOFER)가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지(Willing)와 단돈(?) 30불(2001년 3월 기준)만 있으면 되니까요. 30불은 뉴질랜드 우프 협회에서 발행하는 책자를 구입하기 위한 돈이며, 여러 도시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책이 없어도 우프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책에는 농장주들에게 우프 책을 보여서 멤버임을 확인시켜야 한다고 쓰여있지만, 실제로 검사를 하는 농장은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가끔 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를 떠나서라도, 30불이면 그다지 비싼 가격도 아니고, 우프 책에는 500개가 넘는 우프 농장에 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농장들을 비교해보고 자신이 원하는 곳을 찾으려 한다면, 이 책은 필수입니다.

***스키, 번지점프, 온천, 고래구경, 트램핑...
물론 뉴질랜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번지점프는 단 몇초의 스릴을 맛보기 위해 무려 100불을 넘게 지불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우프는 돈이 한푼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물론 농장주에게는 일정량의 노동을 지불해야 하지만,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뭐가 또 필요하겠습니까? 그리고 운이 좋다면 많은 좋은 경험을 공짜로 할 수 있습니다. 승마, 스쿠버다이빙, 사냥, 골프...

***여행하면서 즐기는 음식문화 또한 좋은 경험이라 생각됩니다.
뉴질랜드는 다민족 국가인 만큼 아주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여러 가지 과일도 있습니다.

**뉴질랜드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맥도날드, 버거킹, KFC 등의 패스트푸드점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왠만한 도시에서는 피시앤칩스(fish&chips)와 중국음식점을 볼 수 있구요.
피시앤칩스는 말그대로 생선과 감자를 튀긴 것을 말합니다. 아주 저렴한 가격에 배를 듬뿍 채울 수 있기 때문에 굶주리고() 주머니사정이 어려운 여행자들에게는 인기품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음식점은 우리의 것과는 많이 다르지만, 역시 쌀밥이 그리울 때 한번쯤 들를만한 곳입니다. 물론 얼큰한 맛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나라에서의 볶음밥 수준의 음식을 맛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일식당, 태국식당 등의 여러 아시아 식당들도 있습니다.

**정통 뉴질랜드 음식은 현지 가정에서 먹는 음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침은 씨리얼이나 빵을 먹습니다. 점심에도 대부분 빵을 먹거나, 혹은 전날 남긴 저녁을 먹습니다. 역시 하이라이트는 저녁식사입니다. 파스타, 피자, 양고기, 닭고기, 쇠고기 등등...(돼지고기는 베이컨을 제외하고는 잘 먹지 않더군요. 쇠고기가 워낙 싸서 그런가?) 양고기는 특유의 냄새()로 한국인의 입맛에는 그다지... 보통 그레이비(gravy)라는 소스와 곁들여 먹습니다.

**바닷가재 요리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랍스터(lobster)와는 조금 다른 크레이피시(crayfish)라 불리는 것으로, 집게가 아주 작고 더듬이가 길며 등이 까칠까칠한 것이 특징입니다. 남섬의 카이코우라는 바닷가재로 아주 유명한 곳으로 그곳에 있을 때 주인이 스쿠버다이빙으로 잡아온 바닷가재를 처음 맛볼 수 있었습니다. 보통 끓는 물에 익혀서 식초나 타르타르 소스(마요네즈 비슷한)에 곁들여 먹습니다. 그리고 전복(abalone)도 남섬의 해안가(특히 카이코우라와 픽턴)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쌀이 있으면 전복죽이라도...

*** 잘 알려지지 않은 Sheep Farm이라는 것에 대해 알려드리려구요.
우프 보다 역사는 짧아서 1994년 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80여개 농장으로 수에서도 WWOOF보다는 딸립니다. 제가 있던 WWOOF 농장 대부분은 양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던데, 양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Sheep Farm도 괜찮으리라 생각 듭니다.

자세한건 아래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Imformation sheep farm helperin new zealand
fax 06)376-4582
가입비는 20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 홈페이지에도 많은 내용이 있으니 방문해 주시구요.
주소는 http://my.dreamwiz.com/dkyin 입니다.

***Willing Workers On Organic Farm.

말 그대로 유기농장에서 일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프는 1971년에 영국에서부터, 그리고 뉴질랜드에서는 1974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보수는 없고, 농장마다 다르지만 주로 하루에 적게는 세시간에서 많게는 여섯시간 정도를 일을 합니다. 농장일 뿐 아니라, 그들의 가사 일을 돕는 등 아주 다양한 일을 하게 됩니다. 대략적으로 500여 개의 우프 농장이 뉴질랜드에 있습니다.우프 책에는 우프에 관한 간단한 소개와 뉴질랜드에 있는 우프 농장들을 지역별로 다루고 있습니다. 농장주의 이름(Name), 지역(Region), 주소(Address), 필요한 우퍼인원(Persons), 우퍼가 필요한 시기(All Year), 농장의 규모(Area), 전화번호(Telephone), 농장에서 하는 일(Activities), 그리고 짤막한 소개(Details)가 우프책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농장에 미리 연락을 취하고(적어도 일주일 이전), 만날 장소를 정합니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농장에 이미 우퍼가 있거나, 농장 측에서 우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다른 농장을 찾아야 합니다. 만나기 전에는 확인전화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보통 우퍼가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수 있고, 2~3주가 적당합니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일하는 시간, 일의 종류, 휴일 등은 농장마다 다르고, 각 농장마다 특색이 있으니, 우프 책에 소개된 농장의 소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들의 광고를 100% 믿어서는 안되겠죠?

가입절차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프 책 한 권의 구입으로 가입할 수 있습니다. 여러 도시에서 판매하고 있으며, 자세한 사항은 아래를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Mail : info@wwoof.co.nz
Homepage : http://www.wwoof.co.nz/

***뉴질랜드는 양뿐만 아니라 바닷가재(cray fish)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남섬의 북단, 카이코우라나 픽턴 연안에 많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일본으로 수출되고, 남은 것들은 현지 식당이나 마켓에서 소비되고 있다고 합니다. 집게가 아주 작고, 더듬이는 훨씬 길고, 등이 아주 까칠까칠(날카로울 정도로)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재라기 보다 아주아주 커다란 새우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픽턴에서 우프일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농장 아저씨(레이)의 친구(크레이)가 바닷가재 양식(?)을 하고 있는데 하루 가서 도와주지 않겠냐는 거였죠. 새벽부터 나가는거라 망설이긴 했지만, 이것도 좋은 경험일거라는 생각에 나가기로 했습니다.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은 깜깜한 새벽에, 크레이와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처음에는 비몽사몽이라 정신이 없었는데, 깜깜한 바다 한가운데서 모닝커피를 한잔 하고 나니 정신이 맑아지더군요.

처음 제게 주어진 일은 생선을 토막내는 일이었습니다. 바닷가재의 미끼로 쓰기 위한 것이죠. 커다란 우리(?) 안에 생선을 두면 바닷가재가 우리 안으로 미끼를 먹으러 들어옵니다. 한번 들어온 바닷가재는 나갈 수가 없게끔 만든겁니다. 이런 우리 수백여개를 바닷속 깊은 곳에 놓아두고 다음날 안에 있는 바닷가재를 수확하는거죠. 그리고 크기가 작거나 알을 배고 있는 암컷은 바로 놓아 주더군요.(항상 자연을 먼저 생각하는 뉴질랜드인들이란걸 느꼈답니다.) 이렇게 하루에 잡는 바닷가재 수가 수백마리에 이릅니다.

그리고 바닷가재를 낚아 올리는동안 희한한 바다 생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1m가 훨씬 넘는 문어, 2~3m정도인 바닷장어(eel), 카펫상어(carpet shark : 껍질이 정말 카페트처럼 생겼더군요), 커다란 꽃게, 웬만한 남자 손바닥보다 큰 불가사리, 그리고 보도 듣도 못한 각종 물고기들....
그런데 크레이는 바닷가재 이외의 것들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돈이 안되서 그러는건지...

낮 2시가 조금 넘어서야 다시 뭍으로 돌아왔습니다. 크레이로부터 감사의 의미로 30~40cm정도의 큰 바닷가재 네마리를 얻었습니다. 나중에 북섬에 가게 되면 아는 사람에게 선물하려고 했는데... 웬걸, 떠나던 날 정신 없이 서두르다가 바닷가재를 레이네 집에 놓고 와버렵답니다.

***북섬보다는 남섬이 여행지로서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글쎄... 북섬은 여행이라기보단 관광코스가 아닌가 싶네요.^^ 아무튼... 남성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카이코우라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일본 친구들과 남섬 일주 여행을 마치고, 크라이스트쳐치에서 머무는 중이었습니다. 또 다른 농장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마침 비가 오는 때라 농장을 구하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생각나는게 카이코우라에 있는 바나클빌스라는 백패커였습니다. 전에 넬슨에서 농장생활을 할 때 한번 가보라고 추천 받았던 곳이었기에 바로 전화기를 들었죠. 바로 백패커스의 주인 빌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근데 웬걸... 엄청 말이 빨라서 알아듣기가 힘들더군요. 오로지 들은 얘기는 '우퍼 필요하다', '수요일(웨데이라고 들렸거든요, 샌드위치를 새뉘지라고 하더군요.)', '저녁 7시에 카이코우라 버스 정거장 앞에서 만나자'... 뿐이었습니다.
아무튼 일본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가는 중 내내 오른쪽에는 바다가 보이는데 야경이 환상입니다. 어떤 뉴질랜드인의 말로는 픽턴-크라이스트구간 기차여행에서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고합니다. 제 생각도 그렇구요. 특히 블레넘에서 픽턴 구간은 동화에 나오는 듯한 풍경입니다.
도착해보니 이미 해는 저물고, 5분정도를 앉아서 기다리니 어떤 여자가 봉고차를 몰고 오더군요. 이름은 리즈(엘리자베스), 빌의 아내였습니다. 빌은 어디 가서 못오고 자신이 나왔다더군요. 도착하자마자 백패커스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었습니다. 핏자를 먹었는데, 동그랗지도 않고 아주 길쭉한, 모짜렐라치즈가 아닌 체다치즈가 듬뿍 들어간 생에 가장 맛있는 핏자였습니다.(혹시 가시는분 꼭 드셔보시길...^^). 아무튼... 허기진 배를 핏자로 채우고, 백패커스에서 짐을 풀고 잠이 들었습니다.

***퀸스타운 관광

버스로 8시간정도 걸린다니 그래서 크라이스트처치와 퀸스타운의 중간정도되는 트와이즐에서 묶기로 했다. 16:00크라이스트처치를 떠났다. 이동중에 차창으로 보이는 넓은 평야에 바치 바둑판처럼 잘 정돈된 초지에 양들의 모습이 보였다. 가도가도 끝없는 평야와 멀리 웅장한 산들이 보였다. 사람은 몇시간을 가도 보이질 않았다. 뉴질랜드는 1차산업과 3차산업위주의 경제틀을 가진나라라 2차가공품들은 외국에서 수입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공해를 유발하는 시설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하늘은 높고, 공기는 맑고, 물은 깨끗하고 말그대로 환경제일주의 였다. 멀리 있는 산들도 가까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것을 입증할려면 사진을 찍어보면 안다. 자동카메라로 찍어도 사진은 아주 선명하게 잘나온다. 3시간정도 가니 1953. 5. 29 세계최초로 에레베스를 정복한 뉴질랜드의 탐험가 "에드먼드 퍼시벌 힐러리(Edmund Percival Hillary)" 경이 우리집 뒷산에 오르며 등산연습을 했다며 자랑했다는 "마운트쿡(3,764M)"산이 그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푸카키호수에 비친 마운트쿡의 모습이 한폭의 유채화를 보는 것 같았다. 푸카키 호수의 물빛은 옥을 갈아풀어놓은 것처럼 푸른 옥색깔을 띠고 있었다. 마운트쿡의 정상은 항상 구름에 가려 그모습을 보기가 힘든데 나는 구름이 걷힌 마운트쿡을 보았다. 이것도 행운이라고 한다. 1시간을 더가서 숙소가 있는 트와이즐에 도착하였다.짐을 풀고 저녁을 먹은시간이 9시 였는데 아직도 밖은 환했다. 이곳 숙소에서는 헬기를 이용하여 마운트쿡 정상을 다녀오는 여행상품(NZ$315-180,000원정도(45분소요)이 있었다. 나는 일정상 이용을 못했지만 이 글을 보는 분들은 기회가 닿으면 꼭 이용해 보시길 권하고 싶다.

09:00 퀸스타운을 향해 숙소를 출발하였다. 여기서부터 3시간정도가 걸린다
북섬에는 고속도로가 있는데 우리가 탄 버스도 이 고속도로를 이용해 왔다, 이곳의 고속도로는 왕복2차선의 도로로 우리나라의 국도정도의 수준이었다. 쭉 뻗은 도로가 아니라 계곡,산의 형세에 따라 만들어진 길이다.그러니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리고 이곳 기사분들은 바쁜게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답답할 정도로 규정속도를 준수하고 있었다.
참고로
-크라이스처치 → 트와이즐(330km)
-트와이즐 → 퀸스타운(271km)의 거리다
여기서 잠깐 뉴질랜드의 일반적인 사항에 대해 가이드의 말을 빌어 적는다

-뉴질랜드는 수돗물값을 따로 내지 않는다(1년에 2번 재산세 낼 때 포함해서 낸다)
-경유값 1liter 77cent(440원)
-남극과 가장가까운 뉴질랜드는 지구의 오존층이 파괴되어 자외선이 매우강하다. 그래서 뉴질랜드는 피부암 발생 비율이 높다고 한다(반드시 자외선 차단 크림을 피부에 발라야 한다)
-상가도 오후 5시면 문을 닫는다(저녁에 쇼핑하기가 힘들다, 단 퀸스타운은 밤에도 상점 들이 영업을 한다)
-남섬의 크기는 우리나라 남한크기에 인구 80만명이 살고 있음
-한국인식당에 가면 우리나라 소주를 먹을수 있다(가격은 17$(9,860원)임).

12:30 드디어 세계최대의 휴양도시인 퀸스타운에 도착하였다. 입구에 와카테포 호수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영국여왕이 살아도 될 정도로 아름답다는 퀸스타운(http://www.combos.co.nz) 정말 말이 필요없다.
도착하자마자 한국인이 운영하는 tree-top이라는 식당에서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이식당의 한가운데는 나무가 한그루 서 있는데 집지을 때 나무를 자르지 않고 그대로 살려서 집을 지었다. 이것만 봐도 뉴질랜드 사람들의 환경보호 정신을 엿볼수 있는 기회였다. 식사후 와카테포 호수주위를 1시간정도 산책했다. 그 비경이란 말로 다 표현하기가 힘들었다.그리고나서 100여년전 이곳의 골드러시때 이곳에 와서 금을캐던 중국인들의 유적지가 있어 들러보았다.오는중에 계곡에 제트스키장이(http://www.shotoverjet.com) 있었다 1인당 요금은 75$로 40분을 탄다. 운전자의 각종 묘기로 온갖 스릴을 만끽했다.배가 출발전에 사진을 찍어주는데 배를 타고 돌아오면 멋진 기념사진을 만들어준다. 요금은 10$로 사도되고 안사도된다. 뉴질랜드 어디를 가도 이러한 상술이 활용되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위해 퀸스타운에서 제일높은 전망대에 올랐다(Sky Line이라고함) 제일먼저 전망대쪽으로 이동하였다. 퀸스타운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아름다운 퀸스타운의 비경을 무대삼아 전망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숙소인 노보텔호텔에 짐을 풀었다. 이 호텔에 한국인이 근무하고 있어 도움을 잘 받았다. 시내하고는 조금 떨어져 있어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었다. 퀸스타운 시내에 가서 쇼핑과 관광을 하고 호텔로가는 막차를 타고 숙소에 도착후 잠자리에 들었다.

전설

퀸스타운에 있는 와카테포 호수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조수간만의 차이가 나는 호수란다. 뉴질랜드의 과학자들이 연구를 하였으나 그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전설이 있어 소개할까 한다.
와카테포 호수와 접해있는 2,100m의 리나크볼산에 옛날에 괴물이 살고 있었는데 이괴물의 횡포가 너무심해 마오리사람들이 1년에 한번 여자를 바치도록 되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해에는 추장의 딸을 바치되록 되었다고 한다. 이때 그딸의 애인이 이괴물을 죽이러 산에 올랐고 괴물이 잠든사이 칼을 꽂았으나 괴물은 죽지않고 굴러서 호수로 빠졌다고 한다.그래서 아직도 죽지않은 괴물의 심장이 뛰고있어 조수간만의 차이가 난다는 마오리족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밀포드싸운드 관광일정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오기 때문에 서둘러 가기위해 06:30에 기상하고 아침식사후 07:30분에 숙소를 출발하였다.(5시간정도 소요됨)
아침일찍 서둘른 덕분에 버스에서 잠을 청했다. 3시간정도 가서 테아나우에 도착하여 잠시휴식을 가진후 다시출발하였다. 밀포드사운드까지 가는도중에 여러곳을 보았다.

**첫 번재로 호버터널이다.
이 터널은 사람들이 망치와 정으로만 18년간 뚤어서 1965년에 완공된 터널로 1,270m의 길이로 입출구만 콘크리트로 마무리 공사를 했지 안에는 자연석그대로 였다. 그리고 터널의 경사가 10도 정도되어 배수는 자연적으로 되고 있었다.넓이는 버스 2대가 겨우 통과할수 있는 넓이였다.
둘째로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개울가였다. 이물을 먹으면 한잔 먹을때마다 1년씩 젊어진다고 한다, 정말 물맛이 차고 맛있었다.(물병을 소지하는게 좋다)
셋째로 빙하가 최종적으로 녹았다는 평야지역에 도착하였다. 넓은평야로 먼 옛날 빙하가 빌려 여기서 녹았다는 곳이다.
넷째로 미국의 영화감독 스티븐스필버그의 쥬라기공원의 원시림 배경으로 촬영했다는 원시림숲에 도착하였다. 정말 태고의 신비를 감추고 있는 원시림들이 빽빽하다, 금방이라도 공룡이 나올정도였다.

***밀포드사운드에(http://www.redboats.co.nz) 도착하였다.
거대한 산들이 직벽을 이루고 있으며 실폭포와 거대한 폭포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이곳에서는 유람선을 타고 피오드랜드 국립공원의 신비로운 경치를 2시간에 걸쳐 볼 수 있다. 배안에서 식사를 하면서 영어,한국어,일어로 안내되는 방송을 들으며 구경할 수 있다.이곳은 1991년에 현재의 관광지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밀포드사운드는 지금으로부터 12,000년전 빙하에 의해 형성된 곳으로 유럽인 물개사냥꾼 존 그르노가 1822년 자신의 출생지의 이름을 다서 밀포드사운드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1년에 약 7,000mm정도의 비가오는 곳으로 강우량으로 치면 세계최고 지역의 하나라고 합니다. 관광순서는
1.담수기지를 출발하여,
2.보웬폭포,
3.마이터봉,
4.신밧드골,
5.사자산,
6.코끼리산,
7.코퍼지점,
8.페어리폭포,
9.데일지점,
10.애니타만,
11.세인트 앤스 지점,
12.해양보호구역,
13.물개바위,
14.스터어링 폭포,
15.현곡,
16.빙하 줄무늬,
17.해리슨 만,
18.펨브로크 산,
19.폭포지대와 펭귄무리와 돌고래를 볼 수 있습니다. 이중에서 스터어링 폭포는 146m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장관으로 이 폭포물을 맞으면 힌머리도 검은머리가 된다고하여 많은 사람들이 폭포의 물줄기를 맞는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나무사태가 일어난다고 한다. 눈사태나 산사태는 들어봤어도 나무사태는 처음이다. 나무사태는 이곳의 산은 대부분 암반산으로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먼저 이끼가 끼고 70년이 지나면 그위에 나무가 자라고 300년이 되야 현재의 울창한 숲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뿌리가 약하고 경사가 심해 맨위의 나무가 넘어지면 도미노 식으로 연쇄적으로 나무가 사태를 이룬다고 한다. 이러한 나무사태의 흔적을 여기서는 쉽게 볼 수 있다.

*** 켄터베리평원을 지나 크라이스트처치로 이동하기위해 출발하였다.

11:45 트와이즐에 도착하여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푸카키가든 03-435-0773)에서 된장찌개와 연어회로 점심을 먹었다.
가는도중에 테카포호수에 있는 착한 양치기의 교회와 그옆에 있는 바운더리 개동상을 둘러보았다. 이 교회는 개척시대 양치기들의 모습을 기념하려는 개척민의 손에 의해서 1935년에 세워진 교회라고 한다 교회내부에 들어가면 재단뒤에 있는 창으로 보이는 서던알프스의 산이 아름답게 보인다. 교회 옆에는 양몰이 개의 동상이 있다.이개는 개척시대에 바운더리 개라고 불리는 이름 그대로 방목지의 경계선을 지키는 역할등을 수행하고 사람대신 양들을 잘 키켜주는 개였기에 개들의 헌신적인 활약을 기리기위해 세웠다고 한다.

***17:00 크라이스트처치에 도착하였다. 간단한 쇼핑을 마치고 국일관이란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길건너 공원에서 휴식을 취했다. 18:00공항으로 이동하여 수속을 마치고 20:40대한항공 ke824편으로 북섬으로 이동하였다, 이 구간은 국내선 구간이므로 면세점 이용이 않된다. 23:00 뉴질랜드 북섬의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의 숙소는 스카이 타워(http://www.skycity.co.nz)가 있는 Sky City Casino, Auckland Hotel 묵었다.

2001.2.11(일)
07:00 기상해보니 밖에는 비가내리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09:00 숙소를 출발하여 2시간 30분정도 걸려 로토루아의 와이토모 동굴(http://www.waitomocaves.co.nz)에 도착하여 관광을 하였다. 동굴의 규모는 크지않으나 이 동굴에는 Glowworm이라는 지렁이가 천장에 붙어 사는데 몸의 일부분이 반딧불처럼 발광을 하고 있어 마치 그모습이 은하수를 보는것처럼 아름답다. 동굴안에서는 사진을 찍을수 없고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무동력배에 24명정도 타고 천천히 그 광경을 볼수가 있다. 처음 보는 사람치고 그 곳에서 탄성을 지르지 않는 사람이 없을정도로 그 광경은 황홀하였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두형제가 꾸몄다는 Paradise valley Springs에 도착하였다. 넓은대지위에 자연과 조화를 이룬 정원과 동식물, 연못과 시내물, 특히 가는 곳곳마다 크고 작은 송어들이 자연의 상태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등을 볼 수가 있다.(http://www.paradisev.co.nz) 16:00경 숙소인 Millenium Hotel, Rotorua에 도착하였다. 간단히 방을 배정받고 호텔 인근에 있는 폴리네시안 온천욕장에(http://polynesianspa.co.nz) 갔다. 이곳에 가니 입구부터 유황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에는 큰 수영장과 실외의 4단계 온천풀을 이용할 수 있는데 수영복은 필수다(혹시 수영복이 없는사람은 입구에서 빌려준다, 유료로...)옥외의 4단계풀은 각각 온도가 틀리다 제일 뜨거운곳의 온도가 42정도고 다른곳은 30-35정도의 온도다. 그 날 비를 맞으며 유황온천을 했는데 그 기분도 남달랐다. 온천을 마치고 숙소에 와서 저녁을 먹으며 마오리족의 원주민 쇼를 감상하였다.쇼중에 원주민 남자들이 혀를 내미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적을 위협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한다.

2001.2.12(월)
09:00숙소를 출발하여 로토루아의 관광을 시작하였다. 처음 포레스트 공원에 갔는데 심은지 100년됬다는 나무 숲을 가게되었는데 나무들이 얼마나 큰지 그 규모에 놀랐다. 잠시후 로토루아의 제일유명한 화카레와레와라는 지열지대에 도착하였다.도착전 가이드로부터 마오리족의 인사법에 대해 설명을 들은게 있어 잠깐 소개한다. 마오리족의 인사법은 처음 만났을 때 코를 비비는데 그 회수에 따라 2번비비면 인사이고, 3번은 사랑한다, 4번은 존경한다의 뜻이란다.매표를 하고 들어서면 정면에 마오리족의 조각상이 있는 건물이 나오는데 이곳은 마오리족의 미술 공예학교로 이곳에서 각종 조각물등을 만들어 내는곳이다.(http://www.nzmaori.co.nz)키위하우스는 뉴질랜드의 국조인 키위새를 볼 수가 있다. 키위새는 야행성이라 어두운곳에 있다. 물론 사진촬영은 금지된다. Frog Pool은 뜨거운 진흙이 계속해서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데 그 모습이 개구리가 뛰는 모양같아 지어진 이름이다. 간헐천지대는 지금도 땅속에서 수증기가 하늘높이 뿜어대고 있다. 이곳 관광을 마치고 양박물관인 아그로돔을 찾았다. 이곳에는 온갖종류의 각종양들이 사람에 지시에 맞춰 쇼를 보여주며, 양털깍기 시범, 양몰이 개의 시범, 관객이 직접해 볼 수 있는 우유짜기, 양젖주기 등을 해볼수 있다. 입장할 때 입구에서 헤드폰을 하나씩 가져가게 하는데 자리에 앉아 헤드폰을 꽂으면 우리나라 말로 번역해준다. 이곳에는 양과 관련된 각종 기념품들이 많아 쇼핑도 가능하다.

2001.2.13(화)
오늘은 뉴질랜드의 마지막 관광의 날이다. 일찍 기상하여 짐을 정리하고 오클랜드로 향하였다. 12:00오클랜드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오클랜드대학 (http://www.auckland.ac.nz)견학을 하였다. 국제담당부서의 갈랄시아라는분이 안내를 해주었다. 1883년에 설립된 국립대로 학생수 27,000명, 교수수 3,000명, 직원2,000명의 규모에 우리나라 학생도 수백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오클랜드대학방문을 마치고 쇼핑센터에 들러 기념품을 샀다. 이곳에서 살만한 것은 꿀제품과 천연항생제인 프로폴리스 제품, 양모제품, 사슴녹용등이다.
오클랜드 공항을 저녁 7시쯤떠나 중간기착지인 피지공항에 10시경도착하였다. 11시30에 피지공항을 떠나 2001.2.14(수) 07:00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뻐스 패스 정보
여행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숙소라고 생각하는 본인의 입장에서 좋은 숙소를 고르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중의 하나였다. 뉴질랜드에서는 젊은 유럽배낭객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그들이 선호하는 숙소는 백패커스라는 곳이다. 유스호스텔과 비슷한 개념의 숙소인데 약간 더 저렴하고 젊은이들이 유스호스텔보다 더 많은 곳이다. 백패커스는 우리돈으로 약 9000~11500원정도한다. 가격 시설이나 지역, 중심부와의 거리에서 차이가 난다. 인포메이션 센타에 가면 BBH라는 백패커 평가표가 있는데 그것을 보면 BBH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다. 여름같은 성수기에는 하루 전이나 그 날 아침까지 예약을 해야 좋은 곳에서 묵을 수 있다. 뉴질랜드는 교통비가 비싸기 때문에 배낭 여행객들은 대부분 여행 버스패스를 끊어야 한다. 많이 이용하는 버스 패스로는 키위버스와 인터시티, 매직 버스가 있다. 이 버스들은 구간별로 패키지로 묶어 티켓을 판매하기 때문에 장거리 배낭자들은 이것을 이용하는것이 편리하다. 내가 끊은 버스패스는 키위버스였는데 난 '드래곤플라이'라는 상품을 구입했다. 오클랜드에서 남쪽의 넬슨까지의 비행기를 타고 가서 남쪽의 대부분을 여행할 수 있는 버스패스와 다시 픽톤에서 페리를 타고 북섬을 여행할 수 있는 버스패스가 포함된 것이었다. 여기까지 여행에 대한 기본정보이다..내가 적을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이다

***1월 16일 (넬슨에서의 아쉬운 하루)
오클랜드에서 탑승인원 30명정도에 승무원인 한명뿐인 비행기를 탔다. 맛있는 기내식을 먹기위해 기대했던 우리의 기대를 정녕 모르는건지 우리에게 제공된 음식은...주스한잔과 샌드위치라고도 볼수없는 아주 작은 롤뿐이었다. 거기다 그전날 여행한단고 들떠서 잠을 2시간 정도밖에 못잔것이 대단한 실수였다. 조그만 요동에도 마구 흔들리는 경비행기 안에서도 나와 내친구는 잘도 잤다..
1시간 30정도를 타고 넬슨에 도착했다..넬슨 중심부에 가기위해 공항에서 셔틀택시를 탔다. 두명에 10달러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6000원정도였다. 번잡한 서울에서 살다가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오클랜드를 보고 참 황당했었다. 오클랜드에서 중심부는 우리나라의 종로 1가에서 3가 정도까지의 거리밖에 안되고 상점들은 정확이 5시에 문을 닫는다. 그래서 정말 여기가 큰도시가 맞나 하는 의문을 가졌었었는데 넬슨에 오고나니 오클랜드가 큰도시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심부라고 내린곳은 사람이라고는 정말 셀수있는 정도였고 상점은 벌써 모두 닫은 상태였다. 대충 짐을 풀고 넬슨에서 역사적이고 가장 큰 성당을 찾아갔다. 지도를 볼 필요도 없이 우리 숙소 뒤에 바로 있었다. 뉴질랜드에는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 많은데 그곳마다 방명록과 세계 각지에서 온 어린이들이 쓴 기도문이 게시판에 붙여 있다. 남자친구가 돌아오게 해달라는 어는 소녀의 기도에서부터 세계 평화를 기도하는 기특한 한국의 어린이의 한글 기도문까지 ..동양인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곳 넬슨에서 한글을 보니, 한국사람이 많아서 조금 질리기도 했던 오클랜드가 갑자기 그립기 시작했다..
침낭이 없어서 모든 옷을 다 껴입고 잤다.(유럽의 배낭객들은 침낭을 대부분 소지하고 있어 백패커에는 매트리스만 있는곳이 많다. 돈을 지불하면 이불을 빌릴 수도 있었지만 헝그리 정신으로 여행하자고 마음먹은 친구와 나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돈을 내고 이불을 빌릴 수 없었다) 그 다음날 버스 일정으로 인해 아쉽게도 넬슨은 더 구경하지 못한체 ( 그 날 출발하지 않으면 넬슨에서 2일을 더 머물러야 했기에 시간적 그리고 경제적 이유로 떠나야 했다)

1월 17일(금빛의 카이테리티 해변과 웨스트 포트)
키위 버스의 운전자는 거대한 체구의 마오리 족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성수기라서 그런지 버스는 젊은 배낭객으로 꽉찼다. 배낭객들의 대부분은 20대 초반의 유럽인들이었다. 모두들 8등신의 모델같이 보여 친구와 나는 조금씩 쫄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은 검은 머리의 검은 눈동자는 친구와 나뿐이었다. 친구와 나 둘다 다니던 영어 학교를 때려치우고 인생의 경험을 먼저 하고자 했기에^^ 영어실력은 그냥 간단한 생활회화 정도였다. 대부분 영국인과 미국인 캐나다인었기에 그들은 정말 자유자재로 그들끼리 의사소통을 했다...중간에 kateriteri해변에 들러서 점심시간을 보냈다. 금빛 모래에 암석에는 굴 비슷한 것이 잔뜩 붙어 있는 곳이었다. 굴을 따서 먹고 모래사장에 그냥 엎어져서 잠을 잤다..그리구 수평선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나의 여행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날 저녁은 웨스트포트의 어느 숙소에 묵었다. 이불이 무료로 제공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친구와 나는 그 사실만으로도 무지 행복해했다. 그 다음부터 우리의 숙소 평가기준은 오로지 이불이었다..

1월 18일(황량한 서부영화 같은 마히나푸나)
그 다음날은 마히나푸나로 향했다. 특별히 볼곳은 없는곳이고 저녁에 남녀가 서로 상대방의 옷을 입는 파티가 재미있다는 어느 선배의 말을 들은 곳이다.그러나 나는 지금도 마히나푸나의 경치를 잊을 수 없다. 그곳은 정말 황량한 곳이었다. 우리가 묵은 유일한 백팩커는 작은 바를 운영하고 있었다. 서부영화에서나 볼수 있는 그런 황량함이 느껴지는 그 곳이 나한테는 참 인상적이었다. 짐을 풀고 잠시 산책을 하려고 나오니 얼마안가 사슴목장을 볼 수 있었다. 그때가 어두어지기 시작하는 노을이 지려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정말 아름다웠다. 정말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나와 목장너머의 몇몇의 사슴의 눈이 마주쳤다. 그 사슴들은 마치 별 이상한 동양애도 있구나 하는 표정으로 오랫동안 그렇게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아직도 난 그 때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오랜만에 9불을 내고 모든 친구들과 부페식 저녁을 먹었다. 정말 우리에게 9불은 큰돈이었고 과감한 무리였기 때문에 친구와 나는 정말 그동안 못먹은 음식과 앞으로 이런 기회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정말 아주 열심히 먹었다. 드디어 파티 시간 ..이때 난 서양의 그 자유스러운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남자들은 정말 적나라하다고 느낄정도로 여장을 하고 여자들도 그에 질세라 정말 남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것을(?)표현해서 남장을 했다. 그렇게 바에서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고 잠시 나왔다. 마히나 푸나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그 바와 우리들뿐..깜깜한 밤에 별은 빛나고 있었고 도로에는 차도 지나가지 않았다. 바에서는 음악소리와 불빛만이 흘러나왔다. 그 도로에 앉아 있다가 누워버렸다. 그 자유스러움...정말 멋있게 담배 한대 피우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1월 19일 (프렌츠 조세프 빙하의 워크 투어1)
오늘은 프렌츠 조세프 빙하로 가는 날이다. 눈이 오지 않은 나라에서 빙하가 존재한다는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참 날 설레게 했다. 여기서 난 액티비티로 빙하 워크투어를 신청했다. 핼프데이 코스와 풀데이 코스가 있는데 풀데이 코스를 하려고 하니 등산을 잘 오르지 못하는 나로서는 좀 걱정이 되었다. 괜히 무리했다가 중간에 힘들어서 포기하면 너무 돈이 아까울거 같았다. 그러나 빙하워크투워의 가이드의 말을 듣고 ( 중간에 힘들면 ..그는 이것을 언해피라고 표현했다..돈을 환불해준다는 것이었다..)그렇게 접수를 하고 다음날을 기다렸다.

1월 20일 (프렌츠 조세프 빙하 오르다..2)
그전날도 무지 추웠지만..산이라서 그런지 여름이라고는 느낄수 없었다..이불을 빌리지 않겠다는 나의 굳은 의지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옷을 다 껴입고 잤다..빙하를 걷는 다는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센타로 가는 버스를 탔다. 모든 장비를 다 갖추고 빙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빠른 그룹과 느린 그룹으로 나누어 가다 느린 그룹에서 또다시 빠른 그룹과 느린 그룹으로 나누었다. 나는 물론 가장 느린 그룹..그러다 조금 그 뒷단계의 그룹으로 옮겼다. 튼튼한 나의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빠른 그룹에 속하는데 어떤 아주 건장해 보이는 남자 2명이 가장 느린 그룹에 속해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비웃었는데...근데 알고보니 그들은 남아프리카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풀데이 코스로 신청했기 때문에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였다. 정말 나의 체력이 약하다는것을 온몸으로 느낄수 있었다. 무지 힘든것을 느꼈다. 장비를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끄럽고 가이드가 곡괭이처럼 생긴걸로 길을 만드는데 그 길이라는 것이 정말 건너라고 만드는건가 싶을 정도로 무지 위험해 보였다. 빙하와 빙하절멱을 건너는 순간에도 그 거리가 너무 길어 평소 롱다리라고 자부해왔던 나였지만 뛰다가 그 아래로 떨어져 버릴 거 같았다.. 드디어 빙하워크 투어가 끝나고 시계를 봤을땐 오후 5시..어찌 그리 시간을 잘 맞추는지 가이드의 그 놀라운 직업상의 프로정신이 대단해 보였다. 그날 난 후회는 없었다. 참 좋은 경험이었고 지금도 힘들어두 포기안하고 한 것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난 그날 오자마자 아무것도 먹지 못한체 뻗어버렸다.

1월 19일 (평화스러운 호수 와나카)
오늘은 와나카를 향해 출발했다. 온몸이 쑤시는 것을 참아가며 그러나 나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유일한 아시아인이자 한국인인 내 친구는 원래 스트롱걸이라는 자칭타칭의 별명을 가진 아이엮기 때문에 빙산으로 인한 피로를 가진 사람은 나뿐이었다..^^
와나카는 호수이다. 호수라고 하면 강보다 작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고정된 지식에서 와나카는 호수가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꼭 강과 같았다. 아니 바다라고도 볼 수 있었는데..그곳 역시 아주 조용한 지역이었다. 뉴질랜드에는 이렇게 큰 호수가 여러개 있는데 난 개인적으로 와나카가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생각한다. 정말 세상의 모든 평화가 한곳에 모딘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여행으로 인해 지친 몸과 마음을 그 크고 햇빛에 빛나 아름다운 호수를 보면서 휴식을 취했다.

***아름다운 남섬 - 크라이스트처치...

큰 사건도 없고, 별스런 일이 없는 이 곳 시골의 남섬에서는 사람들은 애들 방학 때가 되면 뭐 있다 하면 50 km, 100 km 는 아무 생각없이 갖다가 오는가 보다. 이번 여름 방학엔 cherry 철과 겹친다. 체리는 앵두과에 속하는 앵두이다(?). 알이 크고, 빨간 색과 검붉은 색을 띠고 아주 달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아카로아 방향으로 30 km 쯤 가면 체리 농장이 나온다.

앵두나 복숭아 같은 과일을 키우는 이곳은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PYO [ 니맘대로 따가세요 ] 피켓을 밖에다 내걸고, 농장에서 과일을 판단다. 복숭아는 아직 덜 익었지만, 체리는 제철이다. 수퍼에서 kg 당 12 불 씩에 파는 체리를 이곳 농장에서는 6 불에 판다. 패시픽 로스 사과가 kg 당 2 불 하는 것을 생각하면 비싼 과일축에 속한다. 방문자들이 나무에 올라가 자기가 가져갈 체리를 직접 딴다. 재미 있는 것은 농장안에서는 얼마든지 무한정 공짜로 먹을 수 있다. (공짜라면 남녀노소 없이 다 좋아하드라) 사람들은 이 나무 저나무를 옮겨 다니며 어떤 나무에 있는 체리가 맛이 좋은지 고른다. 두, 세 시간 넓디 넓은 농장에서 원숭이 같이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다니다가 같이 온 사람들이 서로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면, 배가 불러 이젠 체리를 따 먹기도 지쳤다는 신호이다. 가져가는 것보다 그 자리에서 먹는 양이 더 많을 것이다. 가져갈 만큼 따서 봉지에 담아 오면 된다. 가져가는 체리만 무게를 달아 값을 지불한다. 체리는 과일케익을 만들기도 하고, 푸딩에 올리기도 하고, 칵테익에 장식으로 넣기도 하고, 과일모듬에 쓰기도 하고, 그냥 마구마구 배부를 때까지 먹기도 한다 ... 이

***오클랜드 여행을 시작하는 첫 머리에 들러야 하는 곳이 한 군데 있다.
원트리힐. 야트막한 봉우리인데, 엡섬을 지나서 뉴마켓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우측으로 콘월 공원 (공원의 이름은 땅을 기증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으로 들어가면 공원의 반대쪽 문으로 나와서 봉우리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꼭대기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는 곳인데, 꼭대기에 오클랜드의 상징물들 중의 하나인 소나무가 있어서 원트리 힐로 불렸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일목봉 정도가 되겠다. 그 꼭대기에 심어진 나무가 이 나라의 원주민인 마오리와 백인 간의 전쟁에서 백인이 승리한 기념으로 심어졌다고 해서 마오리 행동주의자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그 중 한 명이 몇 년 전에 밤을 도와서 중동을 거의 절반이나 베어버렸다. 둥치에 주사기를 매달고 각종 약을 투입하는 구원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생의 가능성이 없어서 작년에 시의회의 결정으로 그 나무를 잘라버린 덕분에 이제는 노트리힐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곳은 오클랜드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거쳐야 할 곳인 데는 변함이 없다. 그 이유는 이곳에 오르면 눈 닿는 곳까지 북과 남으로, 그리고 좁은 지협인 이 도시를 양쪽으로 공격하고 있는 서쪽의 타스만 해와 동쪽으로 남미까지 뻗는 남태평양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를 일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콘월 공원은 시내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도시의 소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거목과 울창한 숲으로 둘러 쌓여 있어 땅 값이 비싼 이 지역에서 좁은 정원으로 만족해야 하는 사람들의 산책, 조깅, 또는 피크닉 장소로 인기가 있다.

***엡섬

엡섬은 자타가 공인하는 오클랜드 최고의 주택가다. 강남이 개발되기 전의 성북동이나 명륜동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이 곳은 오래된 주택가답게 집들은 오히려 요즘 새로 개발된 지역에 비해서 허름하지만, 동네의 짜임새와 수목의 아름다움은 오클랜드 어느 지역과 비교할 수 없다. 거기에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명문학교의 학군이라는 점까지 보태어져서 동네의 집 값 또한 오클랜드 어느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 곳에 사는 한국 교민이 많지 않은 까닭에 친지 방문을 목적으로 이 지역을 가 볼 기회는 쉽지 않겠지만 근처의 파넬에서 저녁 식사를 하러 갈 때, 조금 일찍 출발해서 엡섬 지역의 주택가를 하릴없이 돌아보는 것도 권장할 만하다. 봄이 오는 9 월에는 주택가에 심어진 아름드리 벚나무에 가득 핀 벚꽃들이 가로등 불빛을 받으면서 화사한 봄기운을 천지에 가득 채우며 마치 조명을 받고 무대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70 년 대 창경원 밤 벚꽃 놀이를 가 본 사람은 그 기분을 약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밖에서 보기에도 울창하게 나무들이 정원을 가득 채운 집들은, 저 안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어떤 집들은 1900 년 대 초기에 지어져서 그 동안 약간의 증개축이나 내부수리는 있었지만 그 원형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고, 그 안에는 한 집안이 3 대, 4 대에 걸쳐서 살아왔고, 살고 있다. 우리나라는 그 기간 동안에 일제침략, 육이오, 그리고 산업화를 겪으면서 국토와 사람살이의 모습이 전혀 딴 모습이 되었는데. 한 세대 전의 우리 어른들이 살던 삶의 모습을 이제는 인공으로 조성한 민속촌에 가서야 겨우 볼 수 있는 우리네로서는 3, 4 대 전의 선조들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집에서 오늘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울 뿐이다.

***동해안은 가족 해변, 서해안은 서핑 파라다이스

오클랜드의 동쪽 바다에서 서쪽 바다로 가는 데는 좁은 곳에서는 차로 10분이고, 동쪽의 제일 유명한 해변에서 서쪽의 제일 유명한 해변으로 가는 데는 차로 30 분이 걸린다. 도시의 서쪽으로는 마치 우리나라의 태백산맥처럼 얕은 산줄기가 있어서 사람의 접근이 제한되어있고, 도시는 그 산맥의 동쪽, 완만한 구릉지를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도시, 주거, 그리고 가족 동반의 해수욕장은 모두 그 산줄기의 동쪽에 있고, 산을 넘어가는 서쪽의 바다는 타스만해에서 부터 거칠것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의 경연장이다. 12 살이 넘어서 시작하면 아무리 타고난 운동신경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전혀 가능성이 없다는 서핑이 그들의 언어이고. 한국에서는 다같이 파도타기라고 하나로 번역되고 있지만 파도를 타는 활동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서핑이고 하나는 부기보딩이라고 부른다. 서핑은 거친 파도의 흐름에 밀려가는 널판지 위에 서서 온갖 묘기를 부리는 것이고, 부기 보딩은 역시 파도에 밀려가지만 그 위에 엎드려 가는 것이다. 남보기와 본인의 신바람도 서핑을 부기 보딩은 흉내도 낼 수 없지만, 12 살 이전에 파도와 친숙해질 기회를 갖지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기보딩만으로도 즐겁고, 아무리 추운 여름에도 10 분이 지나지 않아서 이빨이 딱딱마주치는 그 타스만해의 바다 속을 세 시간, 네 시간을 좋은 파도 하나를 기다리며 버틸 힘을 준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그 옆을 쌩하고 스쳐가는 페라리를 보면서 느끼는 부러움도 부기보딩을 하는 사람들이 서핑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느기는 감정에 비하면 훨씬 부드럽다. 그러기에 이 나라의 잘생긴 젊은 남녀들이 오직 서핑을 하는 재미로 공부도, 취직도, 다 내버리고 웨이터같은 단순 직업으로 간단히 하루 세끼 식사만 해결하면 그 나머지의 노력과 시간과 열정을 오직 여기 이곳, 서핑 클럽에 바치는 것이다.

***피하 비치

드디어 오클랜드에 여름이 왔다. 길고 지루하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유난히도 뉴질랜드 다왔던 올해 겨울이었다. 이곳은 여름이 온다고 주변 경관이 눈에 띄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땅은 항상 녹색이고, 겨울과 봄에 피었던 꽃들과 여름에 피는 꽃은 정원가꾸기에 특별한 정성과 열의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구별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은 확실히 다르다. 기온이 높아지면서 천지간에 나른한 분위기가 만연하고, 오존층이 구멍나서 특별히 몸에 위험하다고 하는 남국의 햇빛은 가리는 곳 없이 내리 꽂힌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갈 곳은 바다이다. 피하. 여름을 맞은 젊은이들의 성소. 발바닥이 뜨거워서 10 미터 이상을 맨발로 걷기 힘든 검은 모래밭이 몇 킬로미터나 뻗어있는 곳. 타스만 해를 향해서 포효하는 사자바위를 바라보며 왼쪽 편이 뉴질랜드 서핑의 메카, 피하 비치이다. 해마다 몇 십 명이 반드시 구조 헬리콥터의 신세를 지고, 그 자신들이 서핑 광인 해상구조원들이 두 분을 부릅뜨고 지키다가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눈이 띠면 아무리 파도가 높아도 동력 고무보트로 몇 분 내에 구조의 손길을 펼치지만, 한 해 여름을 결산하면 반드시 몇 명 정도는 익사했다는 기록이 남는 위험의 바다. 우리 교민들도 몇 명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분들은 파도타기가 아니고 낚시를 하다가 바위 위로 쳐오른 큰 파도에 휩쓸려 가면서 바위에 머리를 부딪고 의식을 잃어서 돌아가신 것이지만.
그렇다고 피하가 위험한 곳은 아니다. 해상구조대가 항상 대기하고 있고, 그들이 세워놓은 안전구간 표시 깃대 사이에서만 있으면 절대 파도에 휩쓸릴 우려가 없다. 사고는 그 구간 밖에서 놀던 자신 만만한 써퍼들, 그 중에서도 아마 초보자들이, 겪는 것이고.
오클랜드의 바다가에 가보면 두 가지가 없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첫째는 비치 파라솔이 거의 없는 것이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런 가리개없이 햇빛을 그냥 맞는다. 자외선이 강해서 피부암 위험이 높다는데도 이들은 전혀 괘념치 않는다. 젊어서 너무 많이 태우면 나이들어 피부가 쭈글쭈글해지는데도, 당장 하얗고 습한 피부를 참을 수 없나보다. 올리브 색으로 그을린 피부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흰 피부를 소망해서 유독물질이 든 것을 상관않고 피부표백제를 바르는 것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건지는 모르겠다.
두번째로 없는 것은 탈의실이다. 어릴 때 연례 행사인 부산 송도 해수욕장 방문은 제일 먼저 호객꾼들에게 끌려서 탈의장을 정하는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갈아입은 옷을 맡겨놓고, 나중에는 샤워를 하는 것이 모두 그 곳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얼마의 댓가를 지불하고.
피하에서는 모두 앉은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티셔츠로 가리고 윗 옷을 갈아입고, 수건으로 가리고 팬츠를 수영복으로 바꿔입는다. 처음에는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해 보니까 어렵지도, 쑥스럽지도 않았다. 샤워는 해변에서 약간 떨어진 공중화장실 바깥에 꼭지가 하나 있는데, 노천이니 만큼 수영복을 입고 물을 맞아야 한다. 거기까지 가기가 귀찮아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바닷물을 그냥 수건으로 쓱쓱 문질러 닦고 만다. 공중화장실에는 옷을 갈아입을 곳이 있는데, 수건으로 가리고 갈아입는 것이 영 마땅치 않는 사람은 여기까지 걸어가는 수고를 하시면 되겠다.
피하의 놀이는 서핑과 부기보딩이다. 우리나라의 해수욕장처럼 튜브를 타는 사람은 거의 없고, 널판지 위에 서는 기술을 어릴때 익히지 못한 사람들은 너도 나도 부기보딩을 한다. 스포츠용품점에서 2 만원에서 10 만원 사이로 구입할 수 있는 부기 보드는 단단한 스티로폴로 되어있고, 한쪽 편에 끈이 달려있어서 손목에 묶을 수 있다. 이것을 들고 가슴 높이 까지 되도록 걸어들어가서 들어오는 파도를 껑충껑충 뛰면서 맞다가, 그 중에서 힘이 좋아 보이는 것이 나타나면 해안을 향해 돌아서서 부기보드 위에 엎드린다. 운이 좋아서, 아니면 선별력이 좋아서, 힘센 파도를 만나면 파도의 힘에 밀려서 해안으로 한없이 활주해 들어오는데, 아무런 동력없이 움직이는 즐거움은 요트를 타보기 전에는 이것이 최고였다. 파도의 힘은 놀라워서 가슴 높이의 깊이에서 부터 발등 높이 정도로 물이 얕아지는 데까지 밀어준다. 사전 훈련도 필요없고, 파도를 고르는 능력이 없는 초보자는 주변에 서있는 사람들을 살펴서 그 중에서 많이 타본 것 같은 사람이 자세를 취하면 따라하면 된다. 부기보드를 대여해주는 곳은 없어서, 이 즐거움을 누리려는 사람은 하다못해 웨어하우스의 2 만원짜리 하나라도 구입해서 가져가야 한다.
피하에서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곳은 딱 한군데. 구조대 뒤 쪽의 구명가게에서 음료수와 과자, 그리고 파이 같은 요기거리를 사먹을 수 있다. 이 음식으로는 죽어도 점심을 때울 수 없는 사람은 컵라면 이라도 가지고 가야한다. 뜨거운 물은 예의 간이매점에서 커피를 한 잔 사면서 예쁘게 요청하면 얻을 수도 있다.
피하 비치는 오클랜드의 퀸 스트리트에서 서북쪽으로 약 40 분 거리에 있다.

***피아노가 있는 해변 - 카레카레 비치
피하 가는 길에 카레카레 비치가 있다. 뉴질랜드 출신 여자 감독, 제인 캠피온의 아카데미 수상작 '피아노'를 뉴질랜드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은 구상단계에서 반드시 보아야한다.
남편을 잃고 뉴질랜드의 정착민에게 사진결혼으로 시집오는, 딸 아이를 데린 실어증의 여인, 해변에 내려진 피아노를 원시림의 산맥을 넘어 정착지로 가져오는 비용이 아까운 남편, 피아노를 옮겨주는 댓가로 돈 대신에 알몸을 보게해달라는 원주민 혼혈의 입이 무거운 남자. 초기 뉴질랜드 이민 생활의 단면과, 사랑, 그리고 음악에 대한 갈망이 어울리면서 엮어지는 화면은 맺힌데 없이 두 시간동안 사람을 끌어들인다.
그 영화에서 피아노가 내려진 곳, 황량하게 파도치는 바다를 배경으로 실어증의 여인이 피아노를 치는 해변. 그곳이 카레카레 비치이다.
피하로드로 가다가 와이타케레 산맥의 서쪽 능선의 다치지 않은 원시림과 두 개의 담수호가 내려다 보이는 인포메이션 센터를 지나서 조금 가면 왼쪽으로 카레카레 비치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좁고 구불구불하며 경사가 가파른 길을 2 킬로미터 정도 2 단 기어를 넣고 내려가면 커다란 포후투가와 나무들이 서있는 주차장이 나타난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시기에 이곳에 가면 포후투카와가 빨간 꽃이 만발한 모습으로 그대를 환영할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 꽃술같은 빨간 꽃을 가득피우는 포후투카와를 뉴질랜드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트리라고 여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일단 내려온 길을 되돌아서 좌 우편으로 한번 바라보라. 능선의 모습은 마치 고향의 뒷동산을 보는 듯 눈에 익다. 염소라도 한 두어 마리 걸어가는 것을 볼라치면 저들을 따라가면 굴뚝에 연기가 오르는 초가집을 만날 것 같은 환상에 빠진다.
방향을 돌려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개천을 맨발로 건너서 왼쪽으로 갈잎처럼 억센 풀이 듬성 듬성 나있는 모래 길을 약 5 분 쯤 걸어가면 눈 앞에 탁트인 해변 위로 바다 물이 눈높이에서 나타난다. 처음 갔을 때는 정말 바다가 모래밭 위에 있는 것 같았다. 파도소리는 이곳에서 유독 우렁 우렁하고, 해변의 오른 쪽은 뉴질랜드에서는 드물게 황량한 풍경의 바위 언덕이 막고 서있다.
바다를 한참 바라보다가 눈이 시어지면 돌아서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맥을 쳐다보라. 그리고 만난 적도 없는 남자와 결혼하려고 이 낯선 곳에 도착해서는 마중나올 사람을 기다리며 모래밭위에 내려진 피아노를 치는 여인의 마음이 되어보라.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의 바다 - 무리와이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을 아는가? '나는 것은 단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닐 것이다,'라는 문제제기에서 출발해서 초월을 만나는 수단으로 '나는 것'을 파악하고, 물고기 떼 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동류들을 가엾이 여기며 (또한 그들로 부터 이상한 놈으로 왕따를 당하면서), 날개가 찢어지도록 바람을 거슬르고, 초고속 비행을 연습하다 실속해서 온 몸에 멍이 들도록 해면과 부딪히기를 수 십 수 백 번 반복하고, 처음에는 4 방위점 찍고 날기 등의 기계적인 훈련으로 시작해서 마침내는, 날개를 움직이는 근육을 초월한, 나는 것과 존재가 하나가 되어서, 난다는 의식만으로 이미 정한 곳에 도달하는 수준에 이르고는, 마침내 일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세계에 도착하는 갈매기. 리처드 바크라는 사람이 쓴 한국 제목 '갈매기의 꿈'이란 책의 주인공 갈매기, 그가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다.
뉴질랜드에 오면 갈매기를 많이 만난다. 낚시터에서 미끼로 쓰는 생선을 낚시꾼이 보지 않는 틈에 훔쳐가는, 눈 주위가 빨간 갈매기들이 이곳에서 가장 흔한 갈매기들이다. 조나단이 경멸하던 갈매기를 그들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저런 무리 가운데서 조나단이 나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나는 보았다. 조나단들이 알을 깨고 나오는 곳을. 그들은 낚시밥이나 훔쳐가는 바닷가의 일반 갈매기와는 외모부터 달랐다. 체구가 약간 클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늘씬하다. 머리 위에는 중세 유럽 수도승들의 빵떡 모자처럼 노란 털이 나있다. 움직임은 우아하고 울음소리는 우렁차고 맑다. 이름은 가네트 (Gannet). 덩치가 커서 이륙할 때 부양이 필요한 그들은 바닷가 절벽위 바위 위에 모여서 산다. 뉴질랜드에는 그들이 모여사는 곳이 두 군데 있다. 그 중 하나가 무리와이 비치. 오클랜드 시내에서 서북 고속도로를 따라 약 30 분 정도를 달려서 쿠메우(Kumeu)를 지나 조금 가면 왼쪽으로 무리와이 비치로 가는 길 안내판이 보인다. 좌회전을 해서 양쪽으로 양떼 목장이 펼쳐진 별로 가파르지 않은 길을 약 20 분 쯤 달리면 무리와이 비치를 만난다. 카레카레, 피하, 무리와이 순으로 오클랜드 서북쪽의 인기있는 비치들의 행렬 중 제일 마지막이다. 이곳도 역시 서퍼들에게 인기있는 곳이다. 모래는 까맣고 해변은 주욱 길게 벋어있다. 해변 오른 쪽으로는 세계에서 제일 빨리 자라는 뉴질랜드 소나무를 인공재배하는 숲이 벋어있고. 그 모습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은 해변을 만나기 직전에 왼쪽으로 오르막 길을 약 5 분 쯤 가면 있는 행글라이더 출발점이다. 앞서 말한 가네트의 서식지는 그 길에서 행글라이더 출발점 조금 전에 오른 쪽으로 Gannet Colony라는 표말을 따라 가면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에서 바다쪽으로 나있는 산길처럼 생긴 보행로를 약 2 분 걸어가면 만난다. 이곳이 식민지라고 이름이 붙은 이유는 호주에 살고 있는 가네트들이 몇 년 전 부터 이곳에 겨울이면 와서 새끼를 까고 그들에게 나는 법을 훈련시켜서 데리고 가기 때문이다. 가네트 서식지를 구경하는 곳은 그들이 사는 곳 보다 약간 높은 곳에 마련되어 있어서 그들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널찍한 바위위에 각각 해초로 조그맣게 둥지를 만들고, 그 위에 알을 품고 엎드려들 있다. 가끔 짝이 돌아와서 입으로 먹을 것을 넣어주고, 교대를 하는 모습은 정겹기 짝이 없다. 서식지 오른 쪽으로 바람이 치어 오르도록 바위 틈이 벌어진 곳이 있고, 그곳에서 출발하는 가네트의 움직임은 아름답다. 봄 볕이 좋은 날에 가면 하루의 피크닉으로 알차게 보낼 수 있고, 여름 날에는 검은 모래를 건너서 맑어 거친 타스만 해에 몸을 담그고 파도를 노리며 한 나절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낼 수 있다.
무리와이 비치로 오클랜드 서북해안의 비치 순례는 끝난다.



















뉴질랜드 여행 동영상 보기

1.뉴질랜드 관광청을 찾아서
2.교통과 쇼핑 그리고 먹거리
3.축제와 특별한 볼거리
4.스포츠로 즐기는 여행-1
5.스포츠로 즐기는 여행-2
6.가족과 함께하는 여행
7.뉴질랜드에서 허니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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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인도네시아 여행사진



카렌족여인

남쪽정문에서 수로를 따라 바라본 타지마할의 전경

아침햇살에 빛나는 타지마할의 모습

빅토리아기념관

거리풍경

강변 철도주변의 빈민가

시민들이 가장 즐겨찾는 휴식처인 톤레삽 강변의 평화스런 모습

강변에서 노숙을 준비하는 순례객

가트의 풍경

디왈리축제기간의 순례객

새벽길의 순례자행렬

시장거리 올드델리

힌두사원의 사람들

화려한 원색옷차림의 여인들

카주라호의 힌두사원

카주라호의 힌두사원

힌두사원의 석조조각

힌두사원의 석조조각

Hindhu temples(AD.9-10 C)

Hindhu temples(AD.9-10 C)

힌두사원의 성애조각







pink city,Jaipur>

라자스탄의 사람들

앰버성

앰버성

아잔타석굴 아우랑가바드

아잔타석굴 아우랑가바드

아잔타석굴 아우랑가바드

City Palace,Udaipur

자이나교사원 뭄바이(봄베이)

도비가트(대형세탁장)

실프그램민속촌

서헬리온키바리공원

뭄바이 사창가


Hindu temple, Bali

Kecak Dance Denpasar, Bali

다니족사람들 와메나

몸에 진흙칠로 미망인임을 나타내고 있다.Dani tribemen Wamena

Market Wamena,Irianjaya

다니족사람들 와메나

지위카,다니족부락

보로부드르사원 족자카르타

쌀농사

발리의 쿠타해변

보로부드르사원 족자카르타

강가에서 벌거벗고 노는 아이들

롬복섬의 사삭마을


다양한 모습의 인형들

보로부드르사원 족자카르타

보로부드르사원 족자카르타

보로부드르사원 족자카르타

파람바난사원 족자카르타

파람바난사원 족자카르타

파람바난사원 족자카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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